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88화
88. 레벨 업(6)
새로운 사무실로 옮긴 지 어느덧 일주일.
넓어진 사무실에 걸맞게 DNP는 새로운 직원 인선을 서둘렀다. 작은 사무실 시절부터 가장 아쉬웠던 건 역시 디자이너 부족.
영상 광고 하나를 찍는 동안 그 열 배에 가까운 의뢰를 쳐내야 했던 이미래를 도와줄 직원이 급선무였다.
입사하면서부터 이미래의 직함이 팀장이었다. 언젠가 직원을 뽑게 된다면 그녀의 직원들을 뽑아주겠다는 일종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기왕 팀을 구성할 거라면 기초부터 가르치고 싶다는 이미래의 의지에 따라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디자이너 두 사람이 출근을 시작했다.
“좀 어때요?”
간만에 이미래와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난 그녀에게 새로운 팀원들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와, 솔직히 놀랐어요.”
물어보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짝 박수를 친다.
“어떤 부분이요?”
“요즘 애들 역량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신입 디자이너들이 출근한 지 이틀, 이미래는 가장 먼저 그들의 역량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우리 때는 하나만 잘해도 취업 문제없었는데. 요즘 애들은 영상 편집에 디자인은 기본이고 그래픽까지 싹 배워놨더라구요.”
한마디로 역량이 뛰어나다는 말. 하지만 그녀의 설명 중 그래픽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픽이요?”
“아 네. 한 친구는 대학 휴학하고 일 년간 영화 쪽 특수효과 외주사 근무를 했더라구요. 또 한 친구는 짧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사 인턴도 해봤고.”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우린 새로운 광고를 준비하는 중. 그건 6월 말부터 온라인 론칭 예정이어서 작업 일정이 빠듯한 광고, 바로 에어닉스의 선풍기 광고였다.
어제 에어닉스 메인을 맞고 있는 김다미가 괜찮은 광고 기획을 만들었다. 하지만 난 그 기획을 쉽게 오케이 할 수 없었다.
“마침 잘됐네요. 다미랑 디자인팀 잠시 후에 회의하죠.”
그건 녀석의 광고에 우리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던 방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네? 왜요?”
지금껏 완성된 영상에 간단한 작업만 해주었던 이미래가 물었고.
“이번 광고에 그래픽 능력이 좀 필요할 거 같거든요.”
잠시 후 오후 2시.
새로운 DNP의 대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광고는 마음에 쏙 드는데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던 작업방식이 들어가야 하는 관계로 전전긍긍 머리를 싸매고 있던 김다미.
회의 시작 30분 만에 녀석의 고민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거 어려운 작업 아니에요. 저희 쪽에서 캐릭터 모델링만 해주면 이후 작업은 외주사 쪽에서 마무리해 줄 겁니다.”
특수효과 외주사 근무경력이 있는 남자 직원이 말했고.
“요즘 이런 작업이 많아서 어지간하면 더빙에 후작업까지 해줘요. 괜찮은 업체 많이 있으니까 두세 군데 미팅해 보고 결정하면 될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 회사 근무경력이 있는 여직원이 의견을 보탰다. 꼬박 하루를 고민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돌아온 대답.
김다미는 기뻐하기보다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어요?”
“그럼요. 선배님.”
남자 디자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드라마도 오래전부터 그래픽 작업 필수거든요.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전보다 훨씬 저렴하게 괜찮은 퀄리티 뽑아낼 수 있어요.”
이로써 이번 광고를 위한 유일한 걸림돌은 제거되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난 회의 결과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광고, 김다미 씨랑 디자인 팀이 같이합시다. 다미는 어제 얘기한 방향으로 광고 기획부터 만들어서 컨펌부터 받아. 기획서 만들려면 캐릭터 이미지 필요할 테니까 그건 디자인팀 두 분이 협조해 주세요.”
회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컨펌 끝나면 곧바로 업체 섭외해야 합니다. 디자인팀에서 업체 리스트 뽑아주시면 제가 직접 컨택해 볼게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짝 박수를 쳤다.
“이번 광고, 우리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식입니다. 하나하나 배우면서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간 없어요. 신입사원 두 분 출근한 지 얼마 안 돼 정신없겠지만 최우선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김다미의 두 번째 광고는 힘겨웠던 첫걸음을 떼었다.
* * *
짧아진 밤 때문이었을까. 시간을 빠르게 흘러 어느새 여름은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아내.
그녀가 지친 몸을 소파에 묻으며 중얼거렸다.
“아우, 더워.”
창밖엔 여전히 해가 남아 있다. 덕분에 실내온도는 28도까지 치솟은 채 떨어지지 않는 중. 그녀가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며 소리쳤다.
“여보!”
“네?”
그녀보다 일찍 퇴근해 저녁을 준비하던 남편이 나타났다. 요리를 위해 입은 편안한 청색 반팔티는 흘러내린 땀으로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아이고, 곰탱이. 더우면 선풍기라도 꺼낼 것이지.”
그녀가 쯧쯧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하던 거 해. 내가 꺼낼게. 근데 선풍기 어디 있더라?”
“그거 버렸는데.”
“아…….”
그제야 생각났다. 신혼집 혼수를 장만할 때 사은품으로 받았던 선풍기, 유독 바디가 하얀 탓에 누렇게 변한 게 보기 싫어 작년 가을 마지막으로 쓰고 버렸다.
“그럼 에어컨을…….”
하지만 아내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 청소 안 했는데.”
지난가을부터 반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다.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했을 필터엔 세균이 한가득일 터. 그런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의 얼굴이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저녁 준비 금방 되니까.”
남자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소파 옆 작은 책을 부채 삼아 휘두르며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선풍기.”
여자는 작은 것 하나도 쉽게 사지 않는다. 최소한의 가격 비교와 리뷰 검증은 기본.
하지만 선풍기는 수백 가지, 선풍기를 만드는 제조사만 수십 곳이다. 그걸 하나하나 비교할 수는 없기에 그녀의 손가락이 너튜브를 터치했다.
수백 가지 선풍기 중 적당한 걸 추천해 주는 동영상은 반드시 있다. 검색창에 선풍기를 입력했을 때였다.
그녀가 찾는 영상들 아래 섬네일 하나에 시선이 멈추었다.
처음엔 광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섬네일엔 하얀색을 좋아하는 그녀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디자인의 선풍기. 그리고 그 옆엔 여러 디자인의 선풍기들이 보였다.
“뭐야? 이건.”
대충 보고 넘기자니 이상하다. 멋진 하얀 선풍기도, 그 옆의 가지각색의 선풍기도 하나같이 눈과 입을 달고 있었던 것.
“별…….”
어느새 짜증 나던 더위는 잊혔다.
톡.
그녀의 손가락이 섬네일을 터치했다.
“형님.”
걸걸한 목소리, 그건 범죄 느와르 속 행동대장의 그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작고 옹골진 체격의 에어서큘레이터였다.
선풍기를 움직이게 만든 비결은 정교한 실사 그래픽이었다. 서큘레이터의 상단에 자리 잡은 두 개의 눈이 몇 번 깜빡였다.
“얘기 들으셨습니까?”
“신입 온다는 말?”
돌아온 대답의 주인은 보통 선풍기, 커다란 헤드를 달고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검은색 평범한 모습이었다.
“들었지.”
“엄청 좋은 거라던데. 가만히 앉아서 당하실 생각입니까?”
서큘레이터가 불만스레 묻는다. 선풍기의 두 눈이 히죽 웃는다.
“냅둬. 그래 봤자 선풍기야. 대단할 게 뭐 있어.”
씹어 뱉듯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막내야! 이리 와봐라.”
“네. 형님.”
뒤뚱거리며 나타난 막내. 그건 팬리스 타입의 타워형 선풍기였다.
“얘 왔을 때 생각해 봐. 팬도 없고 디자인 멋지다고 해서 우리 엄청 긴장했잖아.”
“헤헤…….”
막내 타워형이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근데 막상 봐봐. 팬이 없으니까 바람이 멀리 가질 않아. 주인도 쓸모없다고 구석에 처박아 놓고 안 쓰잖아.”
그가 서큘레이터를 바라보았다.
“너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틀어놓으면 집안 공기가 막 진짜 빙글빙글 돌아가는 줄 알았잖아.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과대광고더라고.”
“형님 제가 성능 하나는 확실해요. 에어컨이랑 같이 쓰면 효율 끝내준다니까요? 우리 주인도 그래서 산 거고…….”
“그거야 광고에선 네 소음이 얼마나 큰지 안 나오니까 그런 거고.”
“크흠.”
선풍기가 서큘레이터의 등을 툭툭 두드린다.
“뭐, 말이 좀 심하긴 했다만, 핵심은 이거야. 선풍기는 백 년 동안 바뀐 게 없어. 아무리 잘나봐야 그놈이 그놈이고 아무리 신선해 봐야 결국 선풍기다, 이 말이야.”
“아, 역시…….”
“형님…….”
동생들이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온다. 으쓱해진 보통 선풍기가 보라는 듯 어깨에 힘을 준다.
“그러니까 걱정 마, 그놈이 우리 자리 뺏을 일 없으니까 말이야.”
삑삑.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선풍기들이 화들짝 놀란다.
“야야. 주인 온다.”
후다닥 제 위치로 돌아가는 녀석들. 보통 선풍기가 실눈을 뜨고 주인을 살핀다. 예상처럼 주인의 손엔 새로운 선풍기가 들려 있다.
“뭐야…….”
미려한 하얀색, 월등히 큰 키, 작은 헤드 덕에 압도적인 비율.
“왜 저리 잘빠졌어?”
보통 선풍기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한다.
“잘 돌아가나 한번 볼까?”
주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선풍기를 내려놓는다. 그 앞엔 두 동생, 서큘레이터와 타워형이 있다. 그들 역시 실눈을 뜬 채 신입을 관찰 중.
“쟤 코드가 없는데요?”
타워형의 목소리에 서큘레이터의 눈이 조금 커진다.
“뭐야? 코드 탈착식인가?”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선풍기를 내려놓은 주인이 핸드폰을 조작하자 신입이 작동을 시작했던 것.
“뭐야? 코드도 없는데 어떻게?”
선풍기는 돌아가면서 강한 바람을 뿜어냈지만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주인이 핸드폰을 조작하자 선풍기는 점차 그 위력을 높인다. 3단 또는 4단이 아닌 미세한 단계 조절에 서큘레이터의 두 눈이 당혹으로 물든다.
그리고 놀라움도 잠시.
“어어! 형님, 저 저…….”
신입의 강력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타워형.
“넘어가요!”
쿠당.
기우뚱대던 녀석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 버렸다.
“서…… 설마.”
하지만 서큘레이터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는다. 화면이 분할되고 보통 선풍기와 서큘레이터의 모습이 동시에 잡힌다.
“무선형?”
깨달음과 동시에 암전되는 화면. 그리고 떠오르는 헤드카피.
[미려한 디자인, 무선의 편리함, 입맛대로 커스텀할 수 있는 100단 미세 조절까지.]
[우린 이것을 선풍기라 부르길 거부한다.]
[에어닉스의 공기역학 기술력의 결정체, 윈드 포스(Wind force)]
[지금 에어닉스 쇼핑몰에서 절찬 판매 중.]
다시 밝아진 화면. 주인의 집을 지키던 선풍기 삼 형제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에이씨.”
“망했네.”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 나란히 버려진 삼 형제 앞에 목줄을 단 애완견 한 마리가 지나간다.
쪼륵.
“악, 오줌!”
울상 짓는 타워형, 한숨을 내쉬는 선풍기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선풍기 세대교체, 에어닉스 윈드포스!]
영상이 끝났다.
“여보!”
“준비 끝났어. 밥 먹으러와!”
“선풍기 하나 산다?”
“네. 그러세요.”
아내의 손가락이 영상 마지막에 떠오른 구매 링크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