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87화
87. 레벨 업(5)
“고생했다 다미야.”
직원들이 한 방향을 바라본다. 술과 안주가 가득한 테이블 너머 얼굴을 붉히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고개를 숙인 채라 작은 목소리만이 되돌아온다.
“……진짜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잔의 맥주를 남김없이 털어 넣은 이미래, 그녀가 움츠러든 김다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그래도 시사회 분위기 엄청 좋았다며?”
“네……. 근데 대표가 왜 거기서 나오는지.”
그녀의 말처럼 1차 시사회에 대표가 참석했다. 그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조수연 팀장이 말했던 에어닉스의 시사 방식을 뒤흔든 이변이었다.
“뭐, 덕분에 시사 한 번으로 끝났잖아.”
그제야 올라오는 김다미의 얼굴,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한 손을 가슴에 올려둔 채 묻는다.
“저 많이 떨었죠?”
갑작스러운 대표의 등장과 질문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당혹스러운 얼굴과 목소리의 떨림은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표가 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발표장의 적절한 당황 덕에 시사회의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다.
‘때론 완벽한 PT보다 인간적인 PT가 감성을 자극하는 법.’
어느 선배의 가르침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아니.”
이 순간 그걸 지적해 줄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그저 약간의 격려.
손을 뻗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녀석의 머리가 내 손으로 다가온다.
“잘했어, 김다미.”
난 언제나처럼 녀석의 머리를 슥슥 헝클어뜨렸다. 이제 내 이런 습관조차 자연스러워진 듯, 녀석의 두 눈이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 * *
시사가 끝났다. 대표의 승인이 떨어진 일이었기에 이후의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촬영 준비, 배우 섭외, 일정 조율.
이번 광고의 모든 일은 김다미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우리가 밥 먹듯이 해온 일이었기에 모든 일은 순풍을 받아 전진하는 배처럼 순조로웠다.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끝나고 완성된 편집본을 광고주와 조율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예년에 비해 유난히 더웠던 3월이 끝나고 마침내 찾아온 4월.
뉴스에선 매일같이 때 이른 더위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한낮 기온이 정확히 30도를 찍었던 그 날부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황사와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덮쳐왔다.
그리고 그날 편집을 마친 광고가 전파를 탔다. 방송 첫날 사상 초유의 미세먼지 경보가 있었고 덕분에 첫 광고의 엔딩 속 하늘은 미세먼지로 벌겋게 물든 하늘이 장식했다.
이번 광고의 스타일대로 파장은 즉시 찾아오지 않았다.
며칠간 미세먼지는 연일 최악을 경신했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냈던 지난 10일 엔딩에 파란 하늘이 등장한 건 봄비가 내렸던 단 하루뿐.
대중들에게 광고가 익숙해질 무렵 나타난 파란 하늘은 엔딩을 통해 노렸던 결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광고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에어닉스 마케팅팀은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전해왔다.
[반응 아주 좋아요. 어제 홈쇼핑 방송 10분 만에 준비한 물량 완판됐구요, 매장 판매량도 쭉쭉 올라가고 있어요.]
탄력을 받기 시작한 판매량에 강지수 과장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시기가 좋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공의 요인 중 하나다. 광고 시작과 동시에 시작된 최악의 황사와 미세먼지.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그것도 사장님 능력이세요. 때맞추어 불어온 동남풍, 그것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에어닉스의 기획사 교체라는 과감한 도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였을까? 강지수 과장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올해는 선풍기 광고 계획이 없었거든요? 근데 대표님께서 온라인 광고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선풍기요?”
좋은 느낌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네. 온라인 선풍기 광고, 동남풍이 맡아줘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난 그 결과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물론, 장담은 못 해요.]
밝은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 난 알 수 있었다. 대표의 검토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에어닉스 공기청정기 픽키, 올봄을 타깃으로 론칭한 신모델은 연일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덕분에 에어닉스 메인 카피라이터가 된 김다미에게 며칠 후 여름 타깃의 선풍기의 광고 의뢰가 들어왔다.
그리고 같은 시간, 나 역시 다른 의미로 무척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날짜는 정했어?]
“네.”
[언제야?]
난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혜민의 목소리에 잠시 뜸을 들였다.
“다음 주요.”
[그렇게 빨리?]
놀란 차혜민의 목소리.
“네. 다음 주말에 이사합니다.”
작았던 필동 사무실, 전부터 검토해왔던 사무실 이전이 확정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작은 건물을 통째로 빌려 동남풍 애드 솔루션 간판을 떡 달아 놓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다.
그래도 의미가 있는 건.
“드디어 강남 입성입니다.”
대형 광고주와 가전회사 본사가 집중되어 있는 강남, 테헤란로 중심가의 빌딩 한 층을 통째로 빌리게 되었다.
[오, 축하해!]
“사무실 제법 넓어요. 고문님 자리도 있으니까 부담 없이 출근하셔도 돼요.”
[내 자리?]
“네. 집에만 계시기 심심하시잖아요. 고문님 집무실 만들어 놓을 테니까 편하게 나오세요. 나오시면 법인카드도 만들어 드릴게요.”
[야! 월급도 안 주면서 심보가 영 고약하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투덜거림.
“월급이 중요한가요?”
하지만 이건 공짜로 고급인력 부려먹겠다는 나쁜 심보도 심술도 아니다.
“지분 20퍼센트면 대주주세요. 회사가 잘돼야 주주님 자산도 쑥쑥 커나가지 않겠습니까?”
강남으로 사무실을 옮김과 동시에 동남풍은 어엿한 법인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법인 전환은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경원전자로부터 들어온 억대의 개런티, 에어닉스와의 거래 규모도 예상보다 커졌다. 개인사업자로 남아 있다가는 세금폭탄을 면치 못한다.
게다가 회사의 확장은 오래전부터 정해둔 수순이었다. 물론 그 시기는 어떤 이의 예상보다 빨랐지만.
그래서 이사진과 지분 배정도 정해져 있었다.
안덕모 40퍼센트, 차혜민 20퍼센트, 김형철과 김형준 형제 20퍼센트.
각자 지분에 해당하는 자본금을 출자했고 덕분에 우린 자본금 3억 원의 주식회사로 당당히 거듭났다.
그리고 하나 더.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이름도 바뀌었다. 동남풍 이니셜을 그대로 따온 DNP, 그것이 법인으로 전환된 회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근데 나머지 20퍼센트의 지분은 어디로 갔냐고?
[나만 주주야? DNP에 주주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차혜민의 말처럼 나머지 20퍼센트는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네 명의 직원이 자발적인 지분참여를 했다.
이미래 팀장이 가장 큰 지분을 가져가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그렇긴 하죠. 다미가 10퍼센트나 가져갔으니까.”
김다미는 공격적으로 자본금을 투자했다. 그건 상당히 의외였다. 위험한 투자일 수 있다며 조언했지만 녀석은 더 사지 못해 아쉽다는 말로 날 아연하게 만들었다.
[뭐, 알겠고. 이사 끝나면 한번 놀러 갈게. 참!]
통화를 끊으려던 그녀가 황급히 말을 보탠다.
[기왕 방 만드는 김에 진열장 하나만 넣어줘.]
그녀가 원하는 건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다기 넣을 장 말씀이시군요.”
[잘 기억하고 있네.]
전화를 끊어졌다. 필동의 작은 사무실에 비밀은 없다.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이미래가 물어온다.
“저희 다음 주에 이사해요?”
“네. 다음 주 주말에요.”
다가온 김다미도 물어온다.
“그럼 주말에 출근해야겠네요? 미리 좀 말씀을 해주시지.”
난 녀석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업체에서 싹 알아서 해줄 테니까.”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 게 현대사회다. 값이 비싸 그렇지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이사를 해줄 업체는 넘쳤다.
“여러분은 월요일 날 오셔서 빠진 게 있는지 확인만 하시면 됩니다.”
하는 일도 많은데 이사에 투자를 아끼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땀과 먼지를 묻히며 이사를 할 필요는 사라졌다.
“각자 귀중품만 잊어먹지 않게 미리 챙겨주세요.”
멍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직원들.
내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 * *
한 주가 지나고 마침내 주말.
이사가 진행되었다. 토요일 오전에 짐을 빼고 오후에 새 사무실로 짐을 넣는 일정, 비싼 서비스인 만큼 일할 사람은 많았고 매니저까지 있어 손쓸 일은 없었다.
일요일에 잔여 정리와 대청소가 진행되었다. 난 이사업체 매니저에게 두둑한 식사비를 넣은 봉투를 전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후 매니저의 움직임은 달라졌다. 오후 5시 몇 번이나 점검을 마친 매니저가 내게 사무실을 보여줬을 때 내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찾아왔다.
월요일 아침.
낯선 건물과 사무실을 향해 얼떨떨한 표정의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을 시작했다.
“우와…… 넓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너무 깨끗해요. 손대기 겁나네.”
난 깔끔한 새 사무실을 바라보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다들 모이세요.”
“네?”
“왜요?”
영문을 모르는 직원들이 쭈뼛쭈뼛 다가온다. 난 책상 위에 준비해 둔 물건을 들어 올렸다.
“현판식 합시다.”
내 손위엔 세련되게 글씨체로 제작된 회사의 현판, DNP가 새겨진 하얀색 아크릴 패널이 들려 있었다.
“자. 웃어요, 웃어.”
“빨리 찍어요, 손 아파!”
“얼굴에 경련 올 거 같아.”
“자, 찍습니다. 둘, 셋!”
찰칵.
DNP의 새 출발을 축하하듯 삼각대 위 카메라에서 눈부신 플래시가 터졌다. 그렇게 얻은 결과물 속 어색한 얼굴을 보며 이미래는 다시 찍자고 고집을 피웠지만.
이로써 동남풍 애드 솔루션은 DNP로 진화했다.
직원들의 역량은 설립 초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안덕모의 개인회사는 이제 운명을 같이하는 주주와 함께하는 주식회사로 거듭났다.
그리고 나는 이제 대표가 되었다.
동남풍 창업 반년 만에 회사와 구성원들 모두가 한 단계 레벨 업을 마쳤다.
직원들이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나도 대표실에서 책상 정리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대표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김다미.
“잠깐 나와보실래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문을 나서니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김다미가 날 회의실로 이끈다.
“아무리 바빠도 할 건 해야죠?”
회의실로 들어서니 한쪽 벽 대형 모니터, 거기에 이미지 하나가 띄워놓고 직원들이 모여 있다.
이미지를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고사 지내려고?”
이미지엔 음식들이 있었다. 웃는 돼지의 얼굴과 떡과 과일, 한 상 가득 차려놓은 고사상.
“우린 광고회사니까 이미지로 하자구요. 자, 대표님이 절하세요.”
김다미가 말했고.
“그래요. 이거 안 하면 두고두고 찝찝하다니까요.”
이미래의 권유에 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품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골라 올려 둘 곳을 고민하고 있는데 윤재원이 스카치테이프를 건넨다.
“하하.”
귀여운 녀석의 발상에 웃음이 나온다.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웃고 있는 돼지의 입 근처에 붙였다. 사무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내 뒤 직원들이 날 따른다.
“우리 회사 정말 잘되게 해주세요.”
작게 속삭이는 김다미의 목소리.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절을 했다. 누군가는 날 따라 절을 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지만 방식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금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DNP 그리고 우리 직원들 다 같이 대박 나게 해주세요.”
숙연해진 회의실, 고사상은 이미지뿐이었지만 우린 제법 오랜 시간 그 자세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