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85화
85. 레벨 업(3)
김다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짧은 말을 왜 못 알아듣냐는 듯 쓰게 웃는 안덕모.
“이번 기획 너희 둘이 만들어 보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니, 갑자기 왜…….”
“왜는 왜야?”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믿고 맡기는 거지.”
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선다. 어깨 위로 휘휘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문이 열리고 안덕모가 빠져나가고 다시 문이 닫혔지만.
“…….”
김다미는 안덕모가 사라진 곳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안덕모.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훌륭한 성적, 흠잡을 데 없는 스펙, 노력으로 얻기 힘든 성격까지. 원하기만 한다면 탑티어 기획사도 노려볼 수 있었던 김다미가 광인 기획에 입사했던 이유였다.
아주식품 광고, 서이준을 내세워 진짜와 가짜에 대한 기업 간의 대립을 풀어낸 광고를 보았을 때 김다미는 충격을 느꼈다.
일 분도 되지 않는 짧은 광고 속에서 등장 인물들의 관계로 풀어낸 두 회사의 역사, 등장 인물 속에 교묘하게 숨어 흐르던 이야기의 반전과 미래에 대한 다짐을 풀어낸 서이준의 마지막 대사는 그녀가 그려왔던 어떤 광고보다 극적이었다.
입사를 한 뒤 그를 따라다니고 광인 기획이 망하고 차린 회사, 첫 번째 직원으로 지원한 이유 역시 순수한 안덕모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보며, 그를 따라다니며 광고를 만들면서 김다미의 머릿속엔 안덕모를 설명하는 확실한 단어 하나가 생겨났다.
‘천재.’
그가 천재성을 발휘한 광고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힘센 자의 견제로 갈 길이 막혔지만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천재는 무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 대단하다는 자동차 광고, 미국까지 건너가 광고를 만든 대단했던 남자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지방을 돌며 농수산물 광고를 찍었지만 그는 역시나 어디서든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동남풍이라는 작은 회사는 승승장구했고 반년 만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스스로 빛나지 않아도, 때로는 섭섭하고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었다.
김, 인삼, 안마의자.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 결과는 항상 좋은 성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깨닫게 된 자신의 역할.
‘안덕모가 아무 걱정 없이 재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역할.’
이번 광고 역시 그랬다. 네 번의 회의를 하고도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답지 않게 초조해하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는 걸 김다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선배?”
“응?”
윤재원의 목소리.
“어떻게 하죠?”
김다미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안덕모가 빠져나간 회의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배, 일종의 악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걸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윤재원이 아니었다면.
“음…….”
김다미는 당장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안덕모에게 물었을 거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토록 중요한 광고를 왜 자신에게 맡기냐고.
“우리끼리 해봐야겠지?”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사장에게 분명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고 그 방향을 따라 걷는 길이 틀리지 않다는 걸 여전히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난 회의 때 올라왔던 아이디어부터 쭉 살펴볼까?”
“네. 알겠습니다.”
윤재원이 준비해 둔 회의록을 내민다. 김다미의 눈은 회의록에 못 박혀 있었지만.
“후우…….”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눈동자는 작게 흔들렸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언제나처럼 정신없이 바쁜 동남풍의 작은 사무실. 오늘도 퇴근 시간을 훌쩍 지나버렸다.
우리 회사에게 내일이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퇴근하라는 사장의 지시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비운 사람이 없다. 이러다 악덕 사장으로 소문나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꼬맹이들!”
불청객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거긴 양손에 묵직한 비닐봉지를 손에 든 김형철이 있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세요?”
“연락은 무슨…….”
큰 액션으로 테이블에 비닐봉지를 내려놓는 김형철. 벌어진 봉투 사이로 치킨과 음료수, 이런저런 먹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꼬맹이들 밥 굶고 있는 거 아닌가 보러 왔지. 니들 굶으면서 일하면 키 안 커.”
“피…… 애인 보러 오셨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돌아간 김다미의 말. 당당하던 김형철의 양 볼이 새빨개진다.
“아니거든? 내가 무슨…….”
의도야 어쨌든 상관없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배려는 무척 고맙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같이 먹게.”
김형철을 부르는데 그의 뒤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나타났다.
“고문님?”
차혜민, 오래전 한번 찾아온 뒤로 좀처럼 사무실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다. 말없이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는 그녀.
한쪽에선 김다미와 윤재원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래와 내가 자리를 붙이고 작업하는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살핀 그녀가 입술을 뗐다.
“내일 시사회지?”
“네.”
“발표는 누가 해?”
질문의 의도는 이미 알고 있다.
“다미가 합니다.”
호명된 녀석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처음으로 이번 광고의 메인을 맡고 시사회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
거대한 부담감을 느낄 테지만 녀석이라면 잘 해낼 거라 난 믿는다.
“잘했네.”
얼마 전 국밥집에서의 조언, 차혜민은 그게 어떤 식으로 실천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
“두 분 다 앉으세요. 자, 다들 식사합시다.”
조영찬과 윤재원이 재빨리 자리를 세팅한다. 하나둘 모여드는 상근 직원들과 비상근 직원들을 보며 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컨펌은 끝났다며?”
“네.”
지난주 우린 완성된 광고 기획을 가지고 에어닉스 실무자들의 컨펌을 받았다. 조수연 팀장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저쪽 마케팅은 전부터 호의적이었어요. 문제는 시사회죠.”
에어닉스의 오랜 전통이다. 컨펌이 끝나면 시사회용 데모 영상을 제작하고 그걸 50명에 가까운 중역과 관리자급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 시사를 한다.
“1차 시사회도 통과율이 절반이 안 된대요. 그거 끝나면 대표랑 오너 상대로 2차 시사도 해야 하구요.”
에어닉스 광고는 이제 시작 단계였다. 두 번의 시사회, 통과율은 높게 잡아야 3할, 그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최종 광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네 느낌은 어때?”
고개를 들었다. 차혜민의 뒤편에선 김형철을 비롯한 나머지 직원들이 한데 모여 내일 발표할 데모 광고를 함께 보는 중.
“오호호. 신선하네. 이거 누구 생각이야?”
울려 퍼지는 김형철의 목소리.
“김다미 선배님이요.”
“이야. 많이 컸네? 우리 꼬맹이.”
그가 다미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아이씨! 하지 마요.”
녀석이 거칠게 김형철의 손을 쳐낸다. 덕분에 그쪽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중.
이번 기획을 주도한 건 물론 데모 광고까지 문제없이 잘해낸 두 녀석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주 좋아요.”
“의외네. 그렇게 평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차혜민이 핵심을 찔러온다. 그녀의 조언대로 이번 일을 직원들에게 넘기고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믿기로 했고 그래서 조용히 기다렸다.
김다미와 윤재원이 만들어낸 광고안은 삼 일 후에 완성되었고, 그걸 받아 본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아뇨, 진심이에요. 저도 결과가 이렇게 좋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이번 광고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빠뜨려서는 안 될 핵심을 아주 잘 잡아냈다.
물론 광고 자체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 번 보면 평범한 광고일 뿐이지만 김다미와 윤재원은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신선한 방식의 그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우리 편이라도 저쪽 마케팅도 나름 까다로운 사람들이에요. 수정 두 번 만에 오케이 한 거 다 저 녀석들이 잘해서 그런 거니까요.”
확신할 수 있다. 녀석들의 방식이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광고주도 오케이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네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틀림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차혜민,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형철과 소란을 피우고 있는 두 녀석을 바라본다.
“이번 일로 쟤들도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고개가 내게 향한다.
“너도 그렇고.”
미소가 찾아온 입가.
“고문님 덕분입니다.”
난 그녀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마침내 새로운 하루가 밝았다.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하루.
밤 열 시가 넘어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지만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우 두 시간쯤 잤을까? 덕분에 충혈된 눈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후우우…….”
자정이 넘어 퇴근하는 바람에 눈가에 칙칙한 다크서클이 생겨난 김다미도 긴 한숨을 내쉬는 중.
“긴장할 필요 없어. 여차하면 내가 끼어들 테니까.”
난 긴장으로 굳어진 녀석의 어깨를 정성스레 풀어주었다.
“선배님 파이팅!”
김다미의 옆에선 윤재원이 한결같은 응원을 보내온다. 그때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
“준비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가실까요?”
에어닉스 마케팅팀 강지수 과장. 그녀의 어깨너머 빼곡하게 자리한 에어닉스 직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김다미가 앞장서 걸었다. 이것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문이 열리고 자리에 앉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단상에선 조수연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시즌 광고는 동남풍 애드 솔루션이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쪽으로 향하는 수십 개의 시선, 그것은 마치 쏟아지는 화살 비 같았다. 내가 그러니 발표자가 느끼는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걸어가던 김다미의 발걸음이 한번 휘청한다.
턱.
난 다시 한번 녀석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작은 떨림이 느껴지는 어깨. 난 녀석을 위해 준비한 마법의 단어를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미야, 다 씹어 먹어. 알겠지?”
떨림이 잦아든다. 신호를 보내듯 잡고 있는 어깨를 한번 들썩인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제 시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사회 시작 사인과 함께 김다미가 단상을 향해 걸어간다. 각자 나누던 대화를 멈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한다.
마침내 단상에 선 녀석. 회의실을 바라보는 떨리는 눈동자.
“안녕하십니까. 동남풍 애드 솔루션, 카피라이터 김다미입니다.”
이제 회의실은 완벽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그럼 에어닉스 공기청정기 픽키(Picky) 데모 버전 광고를 보시겠습니다.”
난 지금 에어닉스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상태, 김다미의 뒤편 화면이 켜지고.
꽈악.
난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주먹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