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84화
84. 레벨 업(2)
“에어닉스의 아이덴티티는 고집스러움이에요. 제품 하나 성공하면 카피 제품들이 물밀 듯이 쏟아지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강지수 과장의 설명,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공기청정기도 마찬가지예요.”
설명과 함께 출력된 제품 설명자료가 앞에 놓인다. 첫 장에 박혀 있는 디자인만 봐도 알겠다.
유선형 위주의 외관에 치중한 최근 제품들과 달리 에어닉스의 공기청정기는 전방 흡기 상부 토출이라는 기능성에 충실하도록 네모반듯한 디자인을 고수하고 있었다.
“기능성은 확실해요. 정기적으로 외주 연구기관을 통해 국내 유통되는 전 제품과 비교 평가를 하고 있거든요?”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어닉스는 단 한 번도 최고를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조수연 팀장, 부하직원의 설명이 마음에 드는지 강지수를 향해 씩 웃어 보인 그녀가 입술을 뗐다.
“에어닉스는 디자인은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신기하더군요. 기능성에만 충실한 디자인을 고집하다 보니 어디가 가져다 놔도 ‘아. 에어닉스 제품이구나’, 그런 평가가 생겨났어요. 지금은 저희 회사의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지요.”
윤재원의 평가대로 그들은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만들어내는 회사였다.
에어닉스는 대한민국 회사지만 에어컨, 공기청정기, 가습기 등에서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 그들은 자체 연구소를 육성해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었고 마음에 드는 해외 기술이 있다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그들만의 고집스러움, 그것은 회사의 정체성이 되었고 덕분에 대중은 올드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들의 디자인을 고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솔직한 평가였다. 한 분야에 진심인 회사, 그 진심이 통했을 때 얻어낼 수 있는 고유의 지위, 에어닉스는 바로 그런 회사였다.
“부럽기도 하구요.”
그건 광고 기획사인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대중들과 광고주에게 동남풍 하면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광고주도 우리의 방식과 정체성을 인정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락을 해오는 그런 회사.
“이번 광고 컨셉은 고집스러움입니다. 그 점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좋은 기획 부탁드려요.”
체계가 확실한 회사답게, 고집스러움을 지키고 있는 트렌드 리더답게 이미 메인 카피도 정해놓았다.
“알겠습니다. 2주 안에 기획안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도도한 이미지와 달리 회사 정문까지 우릴 배웅하는 에어닉스의 직원들을 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어닉스?]
“네.”
전화기 너머에선 차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하네. 거기 쉽게 광고주는 회사 아닌데.]
“시기가 좋았어요.”
에어닉스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광고 기획사의 실책에서 비롯된 기회였다.
작년 겨울 홍보모델인 가습기 광고를 제작하면서 크고 작은 실수가 있었다. 에어닉스는 기획사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새로운 광고 기획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윤재원이 찾아왔다. 아무리 안면이 있는 그였지만 미팅을 허락할 리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찍었던 광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년 동안 만들어낸 몇 편의 광고들, 물론 대부분은 농수산물 광고였지만 에어닉스의 광고주들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리고 끝날 때까진 몰라요. 최종 승인까지 절차가 제법 까다롭더라고요.”
[그 회사 까다롭기로 유명하거든. 그래도 좋은 기회인 건 분명해. 이번에 광고 잘되면 여름부터 그 회사 제품 줄줄이 광고 들어가니까.]
“네…….”
잠시의 침묵, 들렸을 리 없는 한숨을 듣기라도 한 것 같은 차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오늘 안덕모는 내가 아는 안덕모가 아닌 거 같네? 무슨 문제 있어?]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주. 이미 네 번의 기획 회의를 했고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그러는 새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제 아이디어를 종합해 최선을 찾고 그걸 기초로 한 기획안을 만들어야 할 때, 자료를 모으고 기획안 초안을 만들고 있어야 할 지금 차혜민에게 전화를 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디어가 안 나와요.”
[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아요.”
네 번의 회의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없었다.
물론 아무런 아이디어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제법 많은 아이디어를 냈지만 검토를 거쳐 살아남은 녀석은 없었다.
회의가 끝났을 때 화이트보드엔 엑스표가 그어진 문장만이 가득했다.
그 결과 조금 전 네 번째 회의는 화이트보드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끝났다.
[천하의 안덕모가 웬일이야?]
“그러게요. 지금 미칠 것 같아요.”
지난 미팅에서 난 왜 가전업계의 러브콜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규모와 필모의 문제죠.’
묘한 라임이 느껴지는 조수연 팀장의 말.
‘가전은 다른 분야보다 광고 역할이 아주 큰 분야예요. 대부분의 회사가 얼굴을 맡아줄 대표 모델 계약을 하고 제품마다 검증된 홍보 모델을 써요. 광고 기획사 선택 기준도 마찬가지예요. 광고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떠안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규모와 검증된 필모가 필요하죠.’
가전 업체들이 동남풍에 광고를 맡기기엔 규모가 맞지 않다. 게다가 대부분의 필모가 가전과 관련 없는 것들.
소소한 홍보 시안 정도야 들어오지만 본 광고를 맡길 수 없던 이유였다.
‘저희가 좀 특별한 케이스죠. 윤재원 씨도 있고 특히 여기 강지수 과장이 동남풍 광고 팬이더군요.’
부하 직원의 등을 툭툭 두드린 그녀의 마지막 말.
‘이런 말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광고 동남풍 애드 솔루션에 큰 기회가 될 거예요.’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뜻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 광고가 성공하면 농수산물 전문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가전 광고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필모가 생긴다 규모를 키울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즉, 이번 광고는 동남풍의 미래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분기점.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래서 조수연의 마지막 말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전화기 너머에선 차혜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네.]
“어떤 건데요?”
[음…… 지금 사무실이야?]
“네.”
[그럼 일 정리하고 이쪽으로 와. 같이 저녁 하자.]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6시. 사무실을 둘러보니 여전히 퇴근하지 않고 남은 직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김다미와 그 옆에 의자를 끌고 와 토론을 하고 있는 윤재원이 눈에 들어온다. 네 번이나 회의를 했지만 성과가 없으니 카피라이터들이 맘 편할 리 없을 터.
‘나만 조급한 게 아니구나.’
입가에 쓴웃음이 맴돈다.
“자, 퇴근들 하세요.”
모니터에 시선을 못 박고 있던 이미래.
“어디 가세요?”
“네. 약속이 있어서.”
“그럼 직원들끼리 간단히 술 한잔해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미안한 얼굴의 이미래가 눈에 들어온다.
성과 없는 기획 회의에 대해 알고 있다. 세 차례 네 차례 반복되다 보니 회사 분위기도 점점 안 좋아진다고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차혜민과의 통화도 들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터.
조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이 끝나지 않으면 야근이고 철야고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팀장님.”
“네?”
“앞으로 그런 건 물어보실 필요 없어요.”
이미래의 두 눈이 당혹에 물든다.
“식사든 회식이든 얼마든지 하세요. 저희 그렇게 어려운 회사 아닙니다.”
작은 회사라 아직 직원 복지 같은 건 없다. 대신 내겐 확고한 경영 원칙이 하나 있다.
[직원들이 먹고 마시는 것엔 아끼지 않는다.]
오랜 시간 직원으로 지내봐서 잘 안다. 그런 배려는 언제든 성과로 돌아온다. 그러라고 직원들에게 빠짐없이 법인카드를 만들어준 거니까.
사장의 허락, 곁눈질로 눈치만 살피던 직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걱정 말고 좋은 거 드세요. 너무 취하지만 마시고.”
“네. 그럴게요.”
마음이 통했는지 이미래가 웃는다.
잠시 후 용산 중심가의 어느 국밥집.
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앞의 차혜민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세상이 두 쪽 나도 이런 데는 안 오시는 줄 알았더니.”
본 메뉴가 나오기에 앞서 반찬과 함께 올라온 소주, 경쾌하게 뚜껑을 딴 소주를 내게 내민다. 잔에 차오르는 맑은 소주.
“일단 한잔하자.”
잔 두 개가 부딪친다. 빈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젓가락 한쪽으로 깍두기를 푹 찍어 입에 넣는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변화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하는 일도 없는데 남 눈치 볼 필요도 없잖아? 그래서 나도 좀 변해보려고.”
“그래도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닙니까?”
“그런가?”
입에 묻은 김칫국물을 대충 닦아내며 그녀가 씩 웃는다.
“근데 그 변화, 너한테도 필요한 거 같네.”
대답을 고민하는데 때마침 주문한 것들이 올라왔다. 뜨끈한 순대국밥 두 개와 수육 한 접시. 순이 한잔 더 채워지고 안주와 국을 한 번씩 입에 넣은 차혜민이 본론을 꺼내 든다.
“평범한 카피라이터가 일 년에 광고 몇 개나 만들 것 같아?”
“음…….”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이다. 광인 기획 시절을 떠올려본다.
“글쎄요? 한 열 개쯤?”
“아니, 많아봐야 다섯 개 이하야.”
무심하게 돌아온 대답, 난 고요한 눈으로 차혜민을 바라보았다.
“규모가 큰 광고면 세 개 이하로 줄어들지. 근데 덕모 너는 어땠어?”
머릿속에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광인 기획이 망하고 지금 회사를 세우기까지 잠시의 공백을 빼면 한 달에 한 개의 광고도 만들지 않았던 기억은 없다.
“너 아직 일 시작한 지 2년도 안 된 새내기야. 근데 벌써 굵직한 광고만 열 개, 작은 거까지 다 합하면 스무 개 이상 찍어내듯 만들었단 말이지.”
사실이다. 오직 광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날.
“아무리 잘나가는 카피라이터도 3년을 못 가는 게 이 바닥이야. 카피라이터의 창의력에도 한계는 있다는 말이지.”
오래전부터 들어본 말이었다. 업계에 나이 든 카피라이터가 없는 이유, 회사의 에이스가 매년 바뀌는 이유다.
“게다가 이번 광고 동남풍에 중요한 광고라며, 가뜩이나 창의력도 바닥인데 부담감까지 더해지니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 거지.”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업계의 대선배답게 차혜민은 정확히 내가 처한 문제를 짚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번 광고를 잘 해내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성장의 동력마저 잃게 된다.
그래도 해야 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때 차혜민이 선을 그었다.
“이번 일은 애들한테 맡겨.”
“네?”
“동남풍, 작아도 회사야. 사장 혼자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할 필요도,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조직이라고.”
덕분에 꺼내려던 말은 다시 꿀꺽 넘어갔다.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차혜민이 따스한 시선을 맞춰온다.
“때론 쉬는 것도 일이야. 카피라이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리고 이럴 때.”
여전히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국밥, 그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
“직원을 믿는 것도 사장 능력이야.”
깨달음의 순간, 그 순간을 위해서인 것처럼 일순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아무튼 그 말해주고 싶어서 불렀어.”
갑자기 조용해진 식당, 소주잔을 잡은 차혜민의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자, 한 잔 더 할까?”
“좋지요.”
두 잔이 부딪쳐 만들어낸 소리.
챙.
마치 중생을 위해 울리는 어느 고승의 종소리처럼, 머릿속 가득했던 안개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