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81화
81. 도플갱어(5)
어느새 익숙해진 자취방.
출근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전날 밤의 피로도 몸에 끈적하게 남은 잠기운도 날려버리는 샤워는 일종의 아침 루틴.
샤워를 마치고 출근 복장을 골랐다. KJ식품을 그만두고 카피라이터가 된 후 복장은 항상 편한 캐주얼이지만 오늘따라 한구석에 방치된 정장에 자꾸 눈길이 간다.
간만에 입어볼까?
잘 다려 비닐에 쌓인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살결에 닿는 부드러운 소재의 느낌이 간질거린다. 정장 바지와 재킷까지 입고 거울을 보니 뭔가 아쉽다.
머리를 좀 깎아야겠다.
제멋대로 자라난 머리가 자꾸 눈을 가린다. 고민하다가 욕실 한구석을 뒹굴고 있던 헤어젤을 찾아냈다.
슥슥.
한창 출근룩에 신경 쓰던 신입사원 때처럼, 적당히 덜어낸 젤로 머리를 정리하니 조금 봐줄 만하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거울 속 옆얼굴은 조금 매력적인 것 같기도.
먼지 쌓인 구두도 솔질했다. 가방을 메고 집 밖으로 나서니 시간은 8시. 버스를 타는 곳으로 나오니 출근길 동지들이 한가득이다. 버스에 올라 주머니 속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핸드폰을 조작해 즐겨 듣던 영화 OST를 듣고 있자니 창밖으로 서울의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필동 중심가의 작은 건물 5층, 사무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멈춘다.
가끔 커피를 사곤 했던 카페, 저가형 커피숍 중 맛이 괜찮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던 그곳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직원들 것도 좀 살까?
“따듯한 아메리카노 네 잔이요.”
주문을 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만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에 벨 소리가 울린다. 이어폰을 터치하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덕모?]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고문, 은퇴하겠다는 말을 정말로 실천해 버린 전 광인 기획 본부장의 목소리였다.
“네. 고문님.”
내 목소리는 무척 반가웠다.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들고 걸어가는 길, 차혜민과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반응 좋더라? 온라인 속편도 조회 수 잘 나오던데?]
얼마 전 경원 안마의자를 주제로 한 짧은 영상 두 개가 너튜브에 추가로 올라갔다. 크게 벌려놓은 판에서 TV 광고 하나만 건지기 아까워 이틀을 더 투자해서 찍었던 영상들.
하나는 영화 타짜의 선상 씬 오마주.
고니와 아귀가 대치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전 재산과 손모가지를 판돈으로 거는 대신 안마의자에 앉았다.
“밑장 빼기 했어? 안 했어?”
안마에 몸을 맡긴 고니에게 던져진 아귀의 물음.
“뺐어요. 그리고 정 마담한테 준 거 장 아닌데. 어?”
신선하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물론 그보다 반응이 좋았던 건 두 번째였다.
케이블 TV 광고 편의 마지막 쿠키영상에 착안해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의 실토가 필요한 상황을 모티브로 한 짧은 영상 모음.
아내는 비상금을 들킨 남편을 안마의자에 앉혔고 남자는 바람피운 연인을 안마의자에 앉혔다.
특히 새로운 수사기법으로 안마의자를 채택한 경찰과 검찰. 대규모 장비 납품을 둘러싸고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벌어진 여야의 예산 논쟁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시사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광고 수준 많이 올라간 느낌이야. 농수산물 전문 이미지에서 좀 벗어나는 것 같은데?]
“뭐든 들어오면 해야죠.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인가요?”
[엄살은? 러닝개런티로 대박 나겠더구만.]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고문이면 알아야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차혜민 고문.
고문이라는 직함답게 명목뿐인 투자자거나, 잊어버릴 때쯤 한 번씩 조언을 해주는 명예직에 차혜민은 머물러 있지 않다.
비상근이면서도 동남풍의 곳곳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광고와 회사의 운영 방향은 가끔은 일감도 넘겨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역할은 직원들의 멘탈 케어.
경험 없는 어린 사장, 하지만 동남풍이 내부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이유는 그녀의 노력이 크다. 허물없이 직원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있으니까.
[안마의자, 하나 사려고 주문해 놨는데 배송까지 두 달 걸린다더라. 개런티로 대체 얼마나 받는 거야?]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정장을 입고 나온 이유, 출근길에 커피를 사 가는 이유. 그 모든 게 어찌 보면 러닝개런티가 일으킨 긍정적인 효과.
TV 광고가 나간 지 어언 한 달, 윤장식 사장은 러닝개런티 결산 전 예상되는 금액을 알려주었고 그건 내가 생각했던 금액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혹시 경원에 지나친 부담이 아닐까 하던 고민은 기우에 그쳤다.
안마의자의 역주행으로 경원전자는 재비상을 위한 속도를 내는 중. 라인이 정상 가동되고 대형 유통 입점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덕분에 회사의 자금줄을 경색시킨 제품들도 빠르게 소진 중.
자신의 회사에 벌어지고 있는 극적 변화에 윤장식 사장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러닝개런티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슬슬 회사 확장 타이밍이 온 것 같은데?]
회사를 세운 지 이제 반년, 한 번도 여유로운 적 없던 동남풍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제2의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직원 모집 공고 내놨어요.”
[조만간 사무실도 옮겨야겠다.]
지금 사무실은 작다. 한두 명 정도는 더 뽑아도 수용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이면 어차피 옮겨야 한다. 반년 만에 이사가 번거롭긴 하지만 회사가 잘된다는 증거니 뒤로 미룰 필요도 없다.
“그래야죠.”
[사무실 위치는 중요해, 기왕이면 회사 방향과 맞는 광고주들 근처가 좋으니까.]
세심한 지적, 난 보일 리 없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시간 내. 한번 보자.]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난 어느새 사무실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도 새로운 동남풍의 하루, 난 크게 숨을 내쉬며 힘차게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그리고 보았다. 내 자리 옆에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 난 멍하니 그를 살피다 김다미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들어 올린 한 손으로 빠르게 목을 쳐내는 시늉을 한다. 이미래와 조영찬은 그런 김다미를 보며 킥킥대는 중.
낯익은 얼굴이 이쪽으로 향한다.
“안녕하셨습니까, 사장님.”
난 문도 닫지 못한 채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머릿속에 그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이 무럭무럭 가지를 뻗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신입사원 지원자 윤재원입니다.”
마주 인사를 건네지도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난 그저 몇 차례 눈만 깜빡거렸다.
* * *
신입사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대해져 버린 러닝개런티를 문제 삼기 위해 온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회사인 경원전자를 그만둔 상태. 그게 벌써 보름 전이었다.
“이보세요, 윤재원 부장님.”
“네. 말씀하세요.”
공손한 자세의 그가 웃는다. 그 모습은 제법 꼴 보기 싫었다.
“그리고 저 부장 아니에요. 신입사원 지원자입니다.”
말문이 막혀버렸다. 선수를 치듯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전공은 광고 마케팅, 졸업 성적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열심히 했습니다. 광고 관련 동아리에서 4년 활동했고 그중 2년은 회장으로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 맨 마지막 장 보시면…….”
녀석이 책상 위에 올려둔 이력서를 가리킨다.
“지도교수님 추천서도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접수해도 되는 걸 굳이 빳빳한 종이로 출력해 온 이력서, 그건 내가 본 어떤 이력서보다 두툼하고 정성스러웠다.
“아니…….”
하지만 그걸 펼쳐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돌아간 물음, 파티션 너머 직원들의 고개가 하나둘 올라온다. 이미래와 조영찬, 두 얼굴은 호기심.
째릿.
김다미는 거부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안덕모 사장님 밑에서 일하며 배우고 싶습니다.”
말문은 또 막혀버렸다. 그의 이유 역시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중견 가전회사의 오너. 이 자는 그곳 부장까지 달았던 후계자.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저희랑 윤 부장님 서로 웃으면서 일한 사이는 아닌 걸로 아는데?”
녀석은 김다미를 괴롭혔다.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우리와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컨펌마저 거부한 덕에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한 달도 넘은 상태.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썩 진지한 표정을 그려 보인다.
“이번 일을 통해 제가 얼마나 부족한 놈인지 깨달았습니다. 이런 표현 진부합니다만 우물 안 개구리 그제 딱 저더군요.”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자기반성.
망할 거라 생각했던 광고는 성공했다.
폄하했던 아버지의 방식은 결국 먹혔다.
덕분에 경원전자는 다시 살아났다.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녀석이 알게 된 것.
“전 경원전자에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조금 놀랐다. 저돌적이고 당돌했던, 그래서 기묘하게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윤재원은 조금 다른 인간이 되어 나타났다.
“뭐 그건 알겠고.”
하지만 웃으며 반길 마음 따윈 들지 않는다.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저희도 윤 부장님 같은 사람 필요 없어요.”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칙칙해진다. 그건 묘하게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는 모습이었다.
“어우…….”
미어캣에 빙의한 조영찬이 중얼거렸고.
“좀 심했다.”
그 옆의 이미래가 의견을 보탰다.
이 인간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자 놀란 고개가 쏙쏙 내려간다.
“안 사장님이 말씀 이해하지만, 저 이 회사에서 꼭 일해보고 싶습니다.”
조용히 흘러나온 말, 그의 목소리에선 허위와 가식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 회사 이어받을 생각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광고,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고 그래서 사장님 밑에서 배우고 싶어요. 기회만 주신다면 절 뽑은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하아…….”
거듭되는 애원, 더는 몰아붙이기 어렵다. 난 말없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이력서를 들어 살피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조용한 사무실에 이력서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오랫동안 말없이 난 꼼꼼하게 이력서를 살폈다.
툭.
이력서가 책상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난 미간을 좁힌 채 이쪽을 바라보는 김다미를 불렀다.
“김다미?”
“네?”
갑작스러운 호출, 몸을 일으킨 녀석이 쭈뼛쭈뼛 이쪽으로 다가온다.
“입사 테스트를 합시다.”
물샐틈없이 닫혔던 문, 난 녀석을 위해 그 문을 아주 조금 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윤재원의 얼굴이 화악 밝혀진다.
“테스트 기간은 일주일, 최종 입사 결정은.”
고개를 돌리니 미간을 찌푸린 김다미가 눈에 들어온다. 난 녀석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여기 김다미 씨가 합니다.”
물론 들어오고 말고는 녀석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당사자가 한다.
“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자신 없고 안될 거 같으면 그냥 돌아가시고.”
반전된 갑을 관계, 그로 인해 혼란에 휩싸인 두 사람.
“그래도 일하고 싶다면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언젠가 내게 던진 윤재원의 당돌했던 제안, 그대로 되돌아간 제안에 윤재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