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79화 (79/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79화

79. 도플갱어(3)

“흐음…….”

회사 근처의 카페,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차혜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난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핸드폰을 내 앞으로 밀어 놓고 눈앞의 커피를 들어 올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미가 하소연할 만했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사장이나 대표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서 잘 모르지만…….”

들어 올린 커피로 목을 축인 그녀가 빙긋 웃었다.

“이번 일은 덕모, 네가 너무한 거 맞아.”

이건 시작부터 잘못 쌓은 탑이었다. 내가 보령에 내려가 있을 때 경원전자의 광고 의뢰를 받았던 김다미.

상대는 기준 이하의 광고비를 제안했고 다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왔다.

일 끝나고 올라가서 결정을 한다거나 아니면 김다미에게 결정 권한을 줬어야 했다. 하지만 난 기준대로 하라고 말했고 덕분에 녀석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광고주로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거기서 끝이었다면 별일 아니었겠지만.

“그걸 덕모 네가 덜컥 오케이 해버렸으니까.”

고사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광고를 수락했다. 게다가.

“다미가 계속 말렸다면서?”

하지 말자는 녀석의 의견을 무시했다.

“나 같아도 모델 디자인이 이 모양이면 광고 절대 안 받았어.”

그녀가 내 앞으로 밀어 놓은 핸드폰을 가리켰다. 손을 뻗어 들어 올리니 액정에 경원 안마의자의 괴랄한 디자인이 떠오른다.

“네가 걔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 어땠을 것 같아?”

이번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김다미의 의견과 엇나간 것이었다. 이내 녀석의 기분이 짐작이 갔다.

“화가 났을 것 같네요.”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이다.

“근데 다미는 어땠어? 너한테 화내고 짜증 내고 그랬어?”

“아니요.”

조금 까칠한 건 사실이었지만 녀석은 한 번도 감정을 터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어젯밤 녀석은 차혜민에게 전화해 서운했던 감정을 쏟아냈다.

“걔 아무것도 없는 네 회사에 제일 먼저 와준 애야.”

기억난다.

처음 회사를 만들고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시절. 다미 녀석이 아니었다면 동남풍 애드가 회사로서 기능을 시작하고 첫 광고를 만든 건 한참 뒤에나 가능했을 거다.

충분히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도 남을 스펙을 가지고 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 하지만 녀석은 회사의 대소사를 챙기고 스스로 수행비서 역할까지 자청했다. 그러면서도 카피라이터로서의 본연 역시 잃지 않았다.

장담컨대 녀석이 없었다면 오늘의 동남풍 애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좀 잘해줘. 아직 어린애야. 별거 아닌 일에 자기만의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나이라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좋을까요?”

돌아간 물음에 차혜민은 그저 빙긋 웃는다. 비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

“아무리 고문이지만 거기까지 답해주진 못할 거 같네.”

내 곁을 스쳐 가며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이럴 땐…… 그냥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는 게 정답이지 않을까?”

뜻 모를 미소와 함께 차혜민이 떠나갔다.

난 그 뒤로도 테이블에 앉은 채 비워진 차혜민의 커피잔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 * *

다시 돌아온 동남풍의 사무실.

“이 부분이 조금 아쉬운 거 같아요. 제품 배치를 이쪽으로 빼고 배경을 조금 더 보강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네? 제법이다, 너. 디자이너 해도 되겠어.”

“정말요?”

이미래의 책상 옆에서 홍보 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다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사장님 오셨어요?”

뒤늦게 날 발견한 이미래가 꾸벅 고개를 숙였고.

“아, 네.”

“사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오늘 광고주한테 최종 검토해서 넘기려고 하거든요.”

김다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난 사무실 벽에 달린 시계를 한번 올려보았다.

“다미야. 점심 약속 있어?”

“네?”

멍한 얼굴로 몇 번 눈을 깜빡이는 녀석.

“아니요.”

“그럼 나와, 밖에서 점심 먹으면서 아이디어 회의하자.”

“네에?”

놀란 녀석이 되묻는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미래의 눈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웬일이에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밖에서 식사를 곁들인 아이디어 회의, 그건 김다미가 오래전부터 졸랐던 부탁 중 하나였다.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간 난 한 번도 녀석의 소박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출장, 촬영, 광고주 미팅.

여유롭게 식사와 회의를 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일이었다.

조금 전 차혜민이 떠난 카페에서 뒤늦게 그 생각이 떠올랐고 이번 기회에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 팀장님도 같이 가요. 영찬 씨 외근 나가서 혼자 드셔야 한단 말이에요.”

김다미가 말했지만 역시 눈치 백 단.

“아이고, 됐네요. 제삼자는 빠질 테니 당사자들끼리 오붓하게 드세요.”

차를 타고 나왔다.

사무실이 있는 필동에서 빠져나와 익숙한 회사가 있던 근처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김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여기.”

“그래. 기억나?”

광인 기획 사무실 근처의 레스토랑이었다. 오래전 인턴이었던 시절 차혜민이 점심을 사주었던 그곳.

“……그럼요. 기억나죠.”

회사에서 가까운 식당 중 그나마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파스타를 먹고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있으면 집중하기 좋은 곳이다 보니 모처럼 호사를 부리고 싶을 때 신입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녀석이 점심 먹으면서 아이디어 회의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 그건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녀석은 말했었다.

‘커피를 시켜놓고 조용한 음악 소리가 들리는 테이블 위에서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으면 마치 드라마 속 프리랜서가 된 느낌에 안 굴러가던 머리도 굴러간다’고 했던가?

“가자.”

“네.”

난 레스토랑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오늘따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모처럼 찾아온 단골에게 레스토랑에서는 커피에 곁들일 조각 케이크 서비스까지 해주었다.

적당히 배가 부른 상태로 테이블 한편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본격적인 아이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난 고민했던 화두를 먼저 던져 놓았다.

“역시 디자인이 문제야.”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근데 자꾸 보다 보니까 전 조금 다른 생각이 들던데요?”

“어떤?”

김다미가 노트북 액정을 휘익 젖혀 놓는다. 회삿돈으로 사라고 해도 굳이 사비를 털어 산 녀석의 노트북 액정은 완전히 젖혀져 두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최근 판매 상위 안마의자들이에요. 디자인 보시면 다들 비슷한 형태죠?”

평소 많이 본 안마의자들이다. 오래전 가죽 재질 위주의 외부 재질에서 탈피해 메탈 재질을 채택한 최근 제품들.

재질이 바뀌니 대부분 과감한 유선형을 채택했고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휘황찬란한 LED와 디스플레이를 채택할 수 있었다.

“그래. 잘빠진 슈퍼카 같네.”

빨간색, 황금색은 물론 눈길을 확 잡아끄는 원색까지. 인기 안마의자들의 디자인은 말 그대로 ‘현대적’ 그 자체였다.

“멋지고 예뻐요. 근데 집 안에 있는 다른 가구와의 조화는 별로죠.”

난 눈매를 좁혔다. 녀석의 지적은 제법 무서웠고 그 덕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가능성으로 향하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재 같은 독립된 공간에 두면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건 집이 큰 경우의 얘기죠.”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가정집은 안마의자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가구와 같이 둬야 하는 상황, 그런 경우엔 이런 투박한 디자인이 유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녀석이 쓰게 웃었다.

“그치만 검은색은 절대 안 돼요. 그건 어떻게 해야 될 거 같아요.”

타닥.

난 정리된 내용을 재빨리 노트북에 적어 나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을 중얼거렸다.

“이미 만들어둔 200대는 색상 변경 여지가 없을 거야. 그렇지만 추가 생산 제품엔 다른 색을 적용할 수 있을 거 같네.”

“확인해 볼까요?”

“아니.”

난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녀석과 시선을 맞추었다.

“일단 괜찮은 방향 하나 나왔잖아? 나도 생각한 거 있는데 마저 얘기하고 정리하자.”

“네. 말씀해 보세요.”

“디자인 문제는 해결해야 할 이슈고 역시 키바잉펙터는 기능성이야. 광고의 핵심에서 기능성이 빠지면 안 되거든?”

“으흠.”

녀석의 손가락 끝이 입술에 달라붙는다.

“전 안마의자 사용 경험이 별로 없어서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써보셨을 때 느낌이 좀 어땠어요?”

나 역시 엄지손가락으로 까칠한 턱을 슥슥 매만졌다.

“단지 시원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으흠.”

“상쾌하다?”

“아니.”

“그럼 개운하다?”

“부족해.”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그래. 녹는다.”

“녹아요?”

“그래. 너무 강하지도 않고, 필요한 부위에 적당히 마사지가 들어가면 굳었던 부분이 풀어지면서 녹는다는 느낌이 들거든?”

김다미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한데 어깨에 손 대도 돼?”

“네? 저요?”

“그래.”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에 선 채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으…….”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움찔 어깨를 떤다.

“이야. 많이 굳었네.”

피로가 쌓이면 어깨 근육이 뭉친다. 지금 김다미의 여리여리한 어깨 근육은 축적된 피로로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어?”

힘을 들이지 않고 천천히, 손끝으로 단단한 근육을 풀어주었다. 긴장한 어깨가 펴지고 이윽고 편안히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더욱 손끝에 집중했다. 이윽고 인대에 손끝이 닿았고 반응은 소리로 돌아왔다.

“오, 뭐지?”

“좀 알겠어?”

“어…… 네. 와.”

짧은 마사지가 끝났다. 생소한 느낌에 상기된 볼을 한 채 녀석이 중얼거린다.

“진짜 시원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하네요, 녹는다. 좋은 표현인 것 같아요.”

눈을 반짝이는 녀석, 난 두 번째 포인트를 노트북에 적어 나갔다.

* * *

회의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방해 없이 오롯이 광고 기획에만 집중해본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늦은 밤 레스토랑을 빠져나왔을 때 우린 기획 초안을 가져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초안 재검토가 진행되었다. 기획이 결정되고 콘티 작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촬영 준비도 시작되었다. 오랜 파트너인 스튜디오 판타지아와 회의가 이어졌고 모델 섭외가 시작되었다.

컨펌은 필요 없었다. 시연을 제안했지만 필요 없다는 윤재원의 대답만 돌아왔다.

그리하여 시작된 촬영엔 생각보다 많은 배우가 투입되었다. 경원전자에서 받은 광고비는 진작 동 난 상황.

그때부터 동남풍의 투자가 들어갔다. 만에 하나 광고가 실패하면 큰 손실을 봐야 하지만 나도 김다미도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 따윈 안중에 없었다.

버전별 영상 편집, 리터치와 그래픽 작업이 일사천리로 끝나고 마침내 광고가 완성되었다.

* * *

끼익.

문이 열렸다. 윤재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윤장식이 환한 미소로 아들을 맞이한다.

“이리 와서 앉아라.”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래, 재원아.”

“저 이 회사만 생각하며 평생 노력했어요. 근데 저한테 물려주실 생각인 건 맞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그걸 바라보는 노인의 눈.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럼 이 꼴로 물려줘 봐야 건질 것 없는 쭉정이라는 것도 인정하시죠?”

“…….”

노인의 얼굴에 당혹이 스친다.

“미안하구나.”

결국 흘러나간 사과, 하지만 윤재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럼 광고 보기 전에 저랑 약속 하나 하세요.”

아버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번 광고 실패하면요.”

어린 자식의 두 눈은 매섭게 빛났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제 결정에 토 달지 마세요.”

무겁게 내려앉는 사장실 공기. 틀어 둔 TV 소리만이 무거운 침묵 속을 공허하게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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