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75화
75. 스토리의 힘(5)
수업이 끝난 대학 강의실. 가방을 챙겨 든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아우.”
크게 기지개를 켠 여학생 하나가 옆 친구를 바라본다.
“오늘 수업 끝났지?”
“어.”
“집에 들어가긴 좀 이른데. 어때? 빠른 술 한 잔, 고고?”
“됐어. 난 안 먹을래.”
친구가 태블릿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영화 보려고?”
“아니.”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이거 봐야 돼.”
태블릿을 터치하자 프로그램이 실행된다. 프로그램의 메인에 올라온 영상 하나를 클릭하자 촬영 현장이 화면에 떠오른다.
“뭐야, 이게?”
“대환장 카페라고 어제부터 시작한 거거든.”
“나도 이거 봤어.”
“그래?”
“블루 아일랜드 배우들 나오는 거잖아. 내 최애 드라마였다고.”
언젠가부터 공중파 드라마는 나이 든 세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대학생인 둘 역시 드라마 같은 걸 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루 아일랜드는 달랐다. 잘생긴 배우들, 감성을 흔드는 연출, 시골 카페라는 매력적인 공간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블루 아일랜드의 팬이 되었고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보자.”
“그러든지.”
친구가 이어폰 한쪽을 빼 내민다. 그걸 받아 귀에 끼고 영상에 집중하는 여자. 이어폰 너머 현장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간, 블루 타이드 2층 진행본부.
메인 모니터에 테이블 하나에 모인 다섯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여는 공시생.
“오케이, 이제 사장님 마음 완벽히 이해했어요.”
지난 몇 화에서 진상 단골들을 내쫓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펼쳐졌다.
홀 이용 제한시간을 정하고 늘 일정하게 오픈하던 시간을 오후로 미루고, 언젠가부터 대놓고 나가줬으면 한다고 얘기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제한된 홀 이용시간이 끝나면 천 원짜리 쿠키 하나를 시켜 시간을 추가했고 문을 열지 않으면 사장에게 전화 러시를 했다.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한 채 정오쯤 카페에 도착한 사장.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사장을 기다리던 단골들의 모습에 허윤태는 뜨거워진 이마를 짚어야 했다.
주인공의 불만도 단골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지만 바뀐 건 없었다. 단골들은 여전히 카페를 차지했고 오늘 드디어 진솔한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던 것.
“그러니까 카페 망할까 봐 걱정이시라는 거잖아요.”
공시생의 말에 단골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러면 어때요? 우리가 카페를 돕는 거예요.”
“네?”
허윤태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쌍방 목표는 명확해요. 저희는 이 카페를 계속 쓰고 싶어요. 저만해도 여기 아니면 아예 집중을 못 하거든요?”
단골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사장님은 카페 안 망하고 잘되면 되는 거잖아요.”
이번엔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답 나온 거죠.”
안주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럼 역할을 정해볼게요. 유나 언니는 친구 많으니까 전화만 하지 말고 그 사람들 카페로 불러요. 그러니까 영업 담당.”
싸우다 정든다고 어느새 친해진 단골들. 그녀의 시선이 커플에게 향한다.
“거기 둘은 사이좋게 홀 매니저 하세요. 오빠는 청소 위주로 언니는 정리 위주로.”
“그럼 넌?”
서지수의 물음에 안주미가 안경을 벗는다.
치렁치렁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질끈 묶고 입술을 연다.
“전 매니저요. 사장님 커피 만드는 동안 설거지하고 계산할게요.”
“잠깐만, 잠깐만.”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허윤태가 황급히 손을 들어 올린다.
“난 알바 필요하다고 한 적 없거든요? 장사 안돼서 알바비 줄 돈도 없어요.”
“그건 걱정 마세요. 알바비는 나중에 잘되면 받는 걸로 하고 일단 여기 머물게만 해주세요.”
어이없는 얼굴로 단골들을 바라보던 주인공이 마침내 참았던 질문을 던진다.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네.”
“그러세요.”
잠시 망설이던 입술은 천천히 열렸다.
“대체 왜 이 카페에 집착하는 겁니까? 여기 말고도 카페 널렸는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기 있으려는 이유가 뭐냐구요.”
“그건…….”
안주미가 고개를 돌린다. 바라본 곳은 큼직한 카페 유리창, 그 너머 하늘엔 빨간 노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노을빛을 받아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
“사장님 그거 알아요?”
“네?”
“이 카페 노을만큼 완벽한 건 없어요.”
조금 몽환적인 목소리였다.
“저 시험 벌써 네 번이나 떨어졌어요. 부모님도 저도 잘 알아요. 백날 힘들게 공부해봐야 가능성 없다는 거. 근데요…….”
창밖을 바라보며 안주미가 쓰게 웃는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저 노을 보는 게 유일하게 행복한 순간이에요. 힘들건 피곤하건 저것만 보면 다시 공부할 용기가 생긴 달까요?”
손님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뭔가 위안받는 느낌?”
“바닷가도 가보고 높은데 올라도 가봤는데 이 느낌이 안 나더라고요.”
“어머. 다들 나랑 똑같구나?”
허윤태는 알 수 있었다. 그간 어떤 노력을 해도 단골들을 내쫓을 수 없었던 이유. 마침내 주인공의 얼굴로 창밖 노을로 향한다.
“에…… 뭐 그렇게 합시다.”
짙어진 노을, 하나같이 붉게 물든 얼굴들.
“그럼 내일부터 함께하는 걸로?”
얼굴들이 끄덕인다. 카메라가 그들 하나하나를 비춘다. 그때 화면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컷, 쉬었다 갑시다.”
* * *
대단한 고민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대박 드라마의 주·조연을 통해 필요했던 영상을 만들어보는 실험정신 가득한 이번 일은 결과적으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지막 생방이 종료될 즈음 시청자는 무려 10만을 넘겼다.
어마어마한 시청자 수를 기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 편집된 영상이 아닌 배우들의 날것의 모습을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본을 외우기 위해 고생하고 실수하는 모습, 연기가 끝나 체력도 감정도 바닥난 상태에서만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 쉬는 시간 허물없이 웃고 떠드는 모습.
시청자들은 그 모두를 무척 신선해했다.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부터 편집이 끝난 영상이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웰컴 투 대환장 카페]
서로 싸우고 다투던 출연자들이 다양한 일을 겪으며 화해를 하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모습, 노력이 성과를 냈을 때 함께 기뻐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이틀간의 준비, 삼 일간의 촬영, 그리고 다시 삼 일간의 편집과 업로드가 모두 끝나고 촬영장으로 변했던 카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생한 배우들에겐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내내 편히 쉬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휴식을 끝내고 다시 밴에 오르는 녀석들은 전보다 한결 활기 넘쳐 보였다.
모든 영상이 업로드되고 10편의 영상이 나란히 백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한 그 날.
“사장님, 20만 넘겼습니다. 구독자가 두 배 됐다구요!”
오랜만에 돌아온 사무실.
조영찬에게서 이번 영상이 만들어낸 성과를 전해 들었다. 늘 조용하던 녀석의 목소리는 제법 흥분되어 있었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사장님, 왜 이리 오래 걸렸어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긴 반은 화가 나고 반은 반가워서 무슨 표정인지 알아보기 힘든 김다미가 있었다.
“사장님이 위로 좀 해줘요. 다미 많이 울었단 말이에요.”
이미래의 말처럼 사장이 열흘이나 자리를 비운 덕에 김다미가 무거운 짐을 홀로 져야 했다.
“고생 많았다.”
난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슥슥 헝클어뜨렸다. 이러면 언제나 버럭 하던 녀석이었지만.
“……너무해 정말.”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가만히 손길을 참아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안주미.
“어, 주미야.”
[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짜고짜 들려온 소리.
“왜?”
[지금 난리 났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잠시 후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그건 더 이상 망해가던 블랙 타이드가 아니었다. 바글바글 홀을 채운 손님들, 자리가 없어 삼삼오오 문 앞에 긴 줄을 이룬 손님들의 줄.
[아까는 에이전트에서 명함 주고 갔어. 진지하게 연기해 볼 생각 없냐고.]
머리털 나고 이런 일을 처음이라는 이야기에 커피를 재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영상의 대미를 장식했던 카페 안에서의 석양을 감상하기 위해 달려올 사람들,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준 안주미에 대한 관심들.
[나 이제 어떻게 하지?]
“그건 스스로 결정해.”
남은 건 각자의 길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뿐이다. 운명이 뒤바뀐 가족의 카페도, 새로운 길을 앞에 둔 안주미도.
“참, 보령시에서 광고 의뢰했다면서요? 그건 언제 촬영해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김다미가 묻는다.
“아 참.”
난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뭐예요, 이건?”
“찍어왔어.”
“뭘요?”
“뭐긴 뭐야.”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광고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녀석이 멍한 눈을 깜빡인다. 난 녀석의 손에 올려진 USB를 내 책상 컴퓨터에 연결했다. 영상파일을 찾아 재생하려는데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찍었다구요?”
“그래 찍었지. 물론 편집해서 광고주 컨펌받아야 하지만.”
딸칵.
파일을 클릭했다. 어느새 내 뒤에 모인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직원들이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 * *
“그러니까 왜 보령이냐고.”
바닷가의 횟집. 창문 너머 넘실대는 파도를 배경으로 조성환이 물었다.
“모처럼 시간 맞춰서 놀러 가는데 강원도도 아니고 제주도도 아니고 보령이 뭐야, 보령이.”
정유나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투덜댄다.
“난 이럴 줄 알았다. 얘 허구한 날 보령 타령했잖아.”
서지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허윤태.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이상하지? 고향도 아니고 몇 번 와본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보령이 끌려.”
그가 아련한 눈빛으로 친구의 어깨너머 바다로 시선을 던진다.
“다른 바다랑은 달라. 난 보령 바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진다니까?”
“그거 병이야 병,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는 병.”
“전생에 보령 귀족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 맞다.”
허윤태가 짝 박수를 친다. 눈살을 찌푸린 친구들이 그를 바라본다.
“나 그거 해봤잖아. 전생 체험, 최면 걸어서 하는 거.”
“헐.”
“……그걸 진짜 해봤다고?”
“그래. 무슨 일이 있었냐면…….”
화면이 전환된다. 이곳은 최면실. 검은 공간을 기묘한 조명으로 밝힌 공간에 허윤태가 안락의자에 몸을 눕힌 채.
턱수염을 기른 최면술사, 허윤태의 눈앞에 흔들던 추를 갈무리한 그가 묻는다.
“뭐가 보이나요?”
“……바다예요. 바다가 보여요.”
“바다 위인가요?”
“아뇨. 바닷속이요. 저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고 있어요.”
“이제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뭐가 보이나요?”
“저 손에…… 구슬이 있어요. 하얀 구슬인데, 많아요. 아주 많아요.”
“주변에 또 뭐가 보입니까?”
“물고기도 보이고, 미역 같은 것도 보이고 아!”
누워 있던 허윤태의 몸이 꿈틀 움직인다.
“제 몸이 떠오르고 있어요. 누군가 물속에서 꺼내려 하나 봐요.”
“계속 말해보세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뜨거워요! 온몸이 쓰리고 뜨거워요. 어?”
“왜 그러죠?”
“아가씨예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입술을! 아…….”
허윤태의 입술이 쭈욱 내밀어진다.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최면술사가 딱 손가락을 튕긴다.
“그랬다니까? 근데 그 바다 무조건 여기 보령 바다야. 느낌이 그렇다니까.”
“다이버 같은 거였나?”
“보령에 살던 어부일지도 모르지.”
“구슬은 뭐야?”
“아가씨는 또 뭐고.”
“몰라. 그걸 믿을 수나 있냐?”
“하긴.”
최면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침 알맞게 익은 안주, 서지수가 젓가락으로 안주 한 조각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잠깐!”
“음?”
서지수가 그대로 굳는다. 조성환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윤태 너 바다에 있었다고 했지?”
“어.”
“물 위로 올라오고 뜨겁다가 아가씨가 뽀뽀를 했고?”
“맞아.”
허윤태가 짝 박수를 친다.
“저거였네.”
“뭐?”
조성환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한다. 거긴 서지수, 정확히는 그녀가 입에 넣기 직전인 한 조각의 안주가 있었다.
빨간 양념을 맛있게 뒤집어쓴 채 알맞게 잘 익은, 짧은 다리에 셀 수 없이 많은 빨판을 달고 있는 한 마리의 주꾸미.
“주꾸미!”
줌인되는 화면 속 허윤태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흔들리는 동공 아래 떠오르는 헤드카피.
[보령, 봄 주꾸미 축제 대오픈!]
자막 아래에서 허윤태의 입술이 꼬물댄다.
“……내가 주…….”
[지금 충남 보령에서 알 꽉 찬 제철 주꾸미를 만나보세요!]
“……꾸미?”
[보령 주꾸미 축제, 60초 온라인 CF,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