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65화
65. 어쩌다 보니 농수산물 전문(4)
-완도 김 광고를 만들어주세요.
그건 동남풍 애드에게 떨어진 하나의 거대한 난제였다.
“사장님, 어쩌시게요? 진짜 받으시게요?”
김다미의 물음.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뭐 농수산물 전문 기획사도 아니고 건어물에 쌀에 김이라뇨?”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다.
“게다가 완도예요. 광고 찍으려면 그 먼 데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으흠.”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 동남풍 애드 이미지가 굳어질지도 몰라요. 그거 아니어도 우리 받아놓은 광고 많아요.”
일리 있는 말이다.
광고 기획사로서는 아킬레스건일 수 있는 이미지의 고착화, 게다가 완도라는 물리적인 거리. 오천농협 조합장이 직접 찾아와 부탁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이번 광고 안 받았을 거다.
“그런데 말이야.”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일 수도 있어요.”
직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향한다. 모니터 너머 큰 안경을 빛내며 팔짱을 낀 이미래가 눈에 들어온다.
“동남풍 고작 직원 네 명짜리 신생회사예요. 건어물 건 잘 나오는 바람에 CF까지 찍고 있지만 사실 우리 아직 그런 거 찍을 만한 규모 아니란 말이죠.”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
“규모 있는 광고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요. 게다가 우리 중원 자동차 눈에 띄면 안 되잖아요.”
조용한 목소리가 핵심을 찔러온다. 그녀의 말처럼 난 중원의 눈을 피해 힘을 기르기 위해 동남풍 애드 솔루션을 만들었다. 규모 있는 광고를 찍고 안덕모가 새로운 회사를 세워 카피라이터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광배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마디로 규모 있는 광고는 찍고 싶어도 못 찍어요. 그치만 농수산물이라면 얘기가 달라요. 경쟁도 적고 광고 성공에 대한 부담도 적고 무엇보다 그쪽 바닥…….”
이미래가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페이가 짭짤하잖아요.”
“흠.”
역시 일리 있는 의견이다. 그리고 상반된 의견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건 내 역할이다.
“좋아요. 그럼.”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합시다, 이번 광고.”
* * *
결정이 떨어졌다.
김다미는 군말 없이 결정에 따랐다. 하지만 김 광고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녀석이 이번 일을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건 수시로 눈에 들어왔다.
“자, 이렇게 합시다.”
퇴근 직전, 난 자리에서 일어나 짝 박수를 쳤다.
“이번 광고 한 사람만 빼고 다 같이 내려갑시다. 그래도 평일에 사무실은 지켜야 하니까. 그건 미안하지만 영찬이가 맡아줘.”
“네. 사장님.”
녀석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광고도 광고지만 완도 볼거리 많은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워크숍을 겸하는 걸로 합시다. 광고 일끝 나면 하루 이틀 시간 내서 좋은 것도 좀 먹고요.”
고작 네 사람인데 뜻이 맞지 않으면 곤란하다. 김다미는 전부터 워크숍 한번 가자고 몇 차례 제안을 했었고 난 이번 기회를 이용해 먹기로 마음먹었다.
“정말요?”
과연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온다. 반색한 저 표정은 가슴속에 담아둔 앙금이 단숨에 날아갔음을 제대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 차 말고 기차 타고 내려가요.”
나름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모양.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그리고 이미래에게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은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다마다요. 그렇지 않아도 겨울 바다 한번 보고 싶었는걸요.”
그러며 책상 위에 올려둔 노트북을 톡톡 두드린다.
“저야 뭐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사무실이니까.”
그러며 싱긋 웃는다.
“다음 주 월요일에 내려가야 하니까. 이쪽 일 마무리 서둘러야겠네요.”
김다미가 외투를 다시 벗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야근 좀 해볼까.”
자발적으로 열의를 불태우는 두 사람을 보며 쓰게 웃었다.
[회사 워크숍 중입니다. 대응이 조금 늦어질 수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회사 홈페이지에 안내 문구가 걸렸다.
“혼자 떼놓고 가서 미안해. 쉬엄쉬엄 일하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 줘.”
“네 걱정 마세요. 내려가 계시는 동안 홈페이지랑 너튜브 정비 좀 해놓고 있을게요.”
선선한 조영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은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네.”
“출발.”
광고 제작 겸 워크숍이건만, 여지없이 여행객 차림을 한두 여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 걸어간다.
필동에서 서울역,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광주, 우린 그곳에서 차를 렌트해 완도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객실 조용하니 좋네.”
“그렇죠. 평일 아침이니까요.”
기차 객실은 한산했다. 예약해둔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씩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좌석이다. 여행 분위기를 살리기도 좋고 무엇보다 내려가면서 이번 광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용이한 배치.
“한자리가 비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쪽이 셋이다 보니 이방인이 한 사람 끼게 되면 좀 난감해진다. 제발 비었기를 바라며 지정석으로 다가갔지만.
“어.”
“에고, 자리 임자가 있네요?”
“그러네.”
“제가 다른 자리로 옮겨줄 수 있는지 한번 여쭤볼게요.”
“아냐 아냐.”
난 앞장서는 녀석을 붙잡았다.
“내가 할게. 남자분이잖아.”
“아…… 네.”
좌석 주인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도 익숙한 생김새의 뒤통수다.
“저기…….”
“으응?”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팀장…… 아니, 이사님이 왜 여기 계세요?”
“왜는?”
하지만 놀란 건 나뿐이었다. 뻔뻔한 그의 눈빛은 분명 내가 나타날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도 완도에 볼일 있어서 내려가거든?”
“반도 자동차 마케팅 임원이 완도엔 무슨 일…… 아니, 그보다 완도까지 같이 간다구요?”
“그래.”
뒤늦게 나타난 이미래.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진짜 왔네? 이 인간이.”
“야. 시커먼 사내놈하고 완도까지 출장 간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있냐? 너 보내 놓고 내가 잠이나 오겠어?”
난 자리에 앉다가 덜컥 굳었다.
“시커먼 사내놈이요?”
“그래. 시커먼 사내놈. 안덕모 너.”
입을 가리고 킥킥대는 김다미,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한숨 쉬는 이미래, 굳이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는 김형철.
[저희 KTX 열차.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기장의 안내와 함께 남쪽 끝으로 향하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반도는 좀 어때요?”
“별. 네가 지금 반도 걱정하게 생겼냐?”
김형철이 피식 웃는다.
“걱정이 아니라 궁금해서.”
“중원이 요즘 작정을 한 모양이야. 그래서 조금 힘들긴 해. 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다. 중원은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고 서비스 폭탄을 안겨주는 등 반전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내수시장 경쟁자인 반도 입장에선 힘겨울 상황.
“이번 기회에 경쟁자를 아예 제거할 모양이군요.”
“그렇지. 선택지가 없어지면 자기네 차 사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야.”
김형철의 서글서글한 눈매에 전의가 감돈다.
“이쪽도 예전 반도가 아니야.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좋네요. 이사님도 전이랑 달라지신 거 같아요.”
“아니거든? 달라지긴 뭘 달라져. 안 그래도 나 일주일 쉰다니까 철환이가 아침부터 아주 지랄 지랄…… 어휴.”
“박철환 과장이요?”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다.
“아 맞다. 안 그래도 요새 박철환 팀장이 네 얘기 많이 해. 기획사 차린 거 알면 당장 달려올 거다 걔.”
“아 팀장 달았어요?”
“그래. 그 위에 유승국 팀장 이번에 좌천돼서 지사 실무자로 내려갔거든. 그래서 박철환이가 팀장 단 거고.”
산적 같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 번 내 속에 들인 사람하고 저 평생 갑니다.’
어울리지 않게 오글대던 멘트도 기억나고.
“그렇군요.”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유승국 같은 사람 밑에 있기에 박철환은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팀장이 되었으니 준비만 된다면 다시 반도 차 광고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래서 안덕모가 기획사 사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겐 비밀이다.
“그나저나 동남풍은 이참에 농수산물 전문으로 가닥을 잡은 거냐?”
“뭐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회사 이름도 동남풍이니까 농수산물하고 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것도 그렇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참. 형준이가 운영자금 부족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래. 걔가 요즘 네 광고 보고 많이 충격받은 모양이더라.”
뭔 충격씩이나?
“광고 보고 그렇게 웃을 줄 몰랐다나 뭐라나.”
주고받는 이야기 속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한마디쯤 끼어들 줄 알았는데 앞의 두 사람이 너무 조용했던 것.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잠들었다는 걸.
쿠우…….
이미래의 작은 코골이가 들려온다. 김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저 봐라, 코 곤다. 나중에 데리고 살면 고생 좀 하겠지?”
“하하…….”
코골이 하면 생각나는 얼굴, 익숙해진 코골이를 가졌던 얼굴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약했던 렌터카에 옮겨 타고 완도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우와. 바다다.”
한참을 달려가니 나타나는 바다. 그제야 잠에서 깬 두 여자가 창밖을 보며 호들갑을 떤다. 일하러 내려가는 일이지만 여행 가는 기분이 좀 살아난다.
“저기 멋진 것 같은데 사진 한 장 찍고 갈까요?”
“좋지요.”
“그러자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달리고 사진 찍고 먹고 마시고 그렇게 두 시간여를 달려 우린 완도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완도 수협 직원들이 들어서는 차를 맞이한다.
“차에서 기다리실래요?”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김형철에게 물었다. 뒤통수를 긁던 그가 날 돌아본다.
“아니, 같이 가자. 회의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간만에 광고 만드는 거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네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수협 조합장의 방에 앉았다. 누가 완도 아니랄까 봐 커피와 함께 김으로 만든 스낵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드셔 보세요. 요즘 밀고 있는 김 스낵입니다.”
먹어본 적 없던 스낵이었지만 그 맛은 놀라웠다. 특유의 바삭함에 김과 김 사이에 넣어둔 아몬드와 메일은 고소함을 배가시켜준다.
“맛있네요.”
“그렇지요?”
조합장이 빙긋 웃는다. 그의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조합장님께서 서울까지 가서 어렵게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이번 광고의 실무를 맡은 사람이다. 강 과장이라고 했던가.
“굳이 먼 길을 내려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떤 광고 만들지 메일로 보내고 촬영할 때나 와보시면 될 것을…….”
깐깐해 보이는 외모, 왜인지 모르지만 말끝에 묘한 불편함이 묻어난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의 그가 시선을 회피한다.
“저희가 김을 모릅니다.”
“네?”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김을 왜 몰라요? 흔하디흔해 빠진 게 김인데.”
“아뇨.”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충 만들 생각이었으면 이번 광고, 받지도 않았을 겁니다.”
도발적인 말투, 옆얼굴에 직원들의 놀란 시선들이 느껴진다.
“이번 광고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광고 제품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광고 마케팅의 원론, 하지만 이 일을 하다 보면 제일 잃어버리기 쉬운 기본. 입 밖으로 흘러나간 다짐과 요청에 조합장의 입술에 미소가 그려진다.
“김, 완도 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십시오.”
찌푸린 미간을 여전히 풀지 못한 강 과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