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64화
64. 어쩌다 보니 농수산물 전문(3)
“으흠.”
광고 시연이 끝나고 시작된 회식. 조합장 옆 농민대표의 표정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젊은 취향이라곤 해도 이번 광고, 너무 이상한 거 아닙니까?”
농민대표가 마침내 작심했던 속마음을 터뜨렸다.
“대표님 말씀 이해합니다.”
조합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광고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숙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맞은편의 서 계장, 그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또 시작이다. 시대의 흐름도 모르고 변화할 줄 모르는 꼰대들의 저 고지식함.
“서 계장, 이번 광고는 내부 재검토를 거쳐야 할 거야. 광고가 부적합하다고 결론 나면 예산 낭비가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이번 일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을걸세.”
“……네.”
대답을 마친 서 계장이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 광고 시연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와.”
광고가 끝나고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동남풍 애드 솔루션은 정말 멋진 광고를 만들어왔다.
TV든 온라인이든 내보내기만 하면 반응은 폭발적일 거다. 쌀 광고만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한방에 뒤엎어버릴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광고에 감탄한 건 자신과 후배, 그리고 젊은 농민들뿐이었다.
“무슨 광고가 저래?”
“저게 광고야, 드라마야?”
“믿고 맡겨놨더니 이상한 걸 만들어놨네.”
나이 든 조합 간부와 농민들의 평가는 박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시연이 끝난 후 분위기는 찬물을 한 바가지 들이부은 듯했다.
서 계장도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래도 머리가 트인 인물이었다. 소방공무원이 SNS 스타가 되고 군청 홍보담당이 너튜브 채널을 성공시켜 지역 명물로 자리 잡은 사례들을 그는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제 변해야 살아남는다.’
그가 전설의 두족류 광고를 눈여겨본 이유였고 독단으로 동남풍 애드 솔루션에 이번 광고를 맡긴 이유였다.
‘제길…….’
하지만 틀렸다. 깨인 자에겐 보석이지만 앞뒤 꽉 막힌 저자들에 은 이 좋은 광고를 돌덩이만큼도 귀하게 보지 못한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길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조합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온통 남자들뿐이어서 땀 냄새 가득한 이곳과 동떨어진, 그래서 듣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고개를 휘익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
“……아 네.”
조합장이 마지못해 승낙했고 서 계장이 재빨리 자리를 넓혀 그녀가 앉을 자리를 확보해 주었다.
차혜민, 기획사 고문이라던 여자. 서 계장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조합장님, 대표님 오늘 광고가 별로였지요?”
하지만 그 고개는 이내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놀란 두 눈은 빠질 듯 커졌다.
“으흠.”
농민대표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고.
“뭐 맘에 든다고는 못하겠습니다. 근데 그게 기획사 잘못이겠습니까? 사인을 잘못 준 저희 잘못이지요.”
서 계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생 고생해서 만든 광고를 저렇게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실례고 상처 주는 말인지 아는 까닭이었다.
“네. 그러실 거 같았어요.”
그런데 이상하다. 차혜민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선한 까닭이었다.
“이쪽 광고 업계엔 이런 말이 있어요.”
그녀가 조합장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때론 불편함도 관심을 끄는 좋은 전략이다.”
그녀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마법이었다. 그녀는 말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기는 말뿐이 아니었다.
“자, 한 잔씩 더할까요?”
술자리에 걸맞게 중간중간 술을 돌리는 걸 잊지 않는다.
“아이고, 고문님. 주량이 상당하십니다?”
“하하. 방심하면 큰코다치겠는데요?”
제아무리 저명한 전문가 앞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던 조합장은 어느새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그건 농민대표도 마찬가지. 그는 너무 웃어서 하회탈이 된 채로 그녀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두 분, 이 광고 보신 적 있으세요?”
차혜민이 핸드폰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 그건 얼마 전 미국에서 반도 자동차의 위상을 한방에 바꿔놓았던 프린시플의 광고였다.
“아! 알죠. 뉴스에 나온 광고이지 않습니까?”
“저도 압니다. 반도 자동차 미국 광고.”
서 계장은 놓치지 않았다. 차혜민의 입술 끝에 회심의 미소가 걸리는 것을.
“이거 만든 게 저 친구예요.”
“예?”
“저 친구가요?”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향한다. 거긴 술에 취해 테이블 위에 쓰러진 이번 광고의 제작자, 동남풍 애드 솔루션의 안덕모가 있었다.
“네. 국내 대기업 광고만 골라 찍던 친구예요. 미국 가서 이 광고 찍은 것도 고작 삼 개월 전이죠.”
놀란 두 남자의 입이 떡 벌어진다.
“얼마 전에 독립해서 회사 차렸어요, 이번 오천 쌀 광고, 저 친구 회사 차리고 두 번째로 찍은 광고예요.”
서 계장은 알 수 있었다.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차혜민의 그들에게 선명한 사실 하나를 심어주었다.
이번 광고를 만든 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카피라이터가 만들었고, 게다가 그 카피라이터는 얼마 전 국가적 자존심을 고취시켰던 광고를 만든 거물.
게다가 이 자리엔 술까지 있다.
“아…… 그렇군요.”
“이게 다 고도의 전략이었던 거군요.”
이제 저 두 인간은 차혜민이 팥으로 커피를 내린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죄송해요. 미리 설명 드리고 시연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몹시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이고, 아닙니다.”
“미안한 건 저희 쪽이죠. 까막눈들이 대작을 몰라보고…….”
“우리 안 대표가 많이 취한 것 같네요. 챙겨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네.”
“서 계장. 직원 두어 명 붙여서 좀 도와드리게.”
일련의 과정을 모두 관찰한 서 계장.
“아, 예.”
그의 입에선 얼떨떨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 * *
“무슨 조화를 부린 겁니까?”
다음 날 아침 난 메일함에 도착한 메일 한 통을 보며 물었다.
[조화는 무슨, 잘되라고 기름칠 좀 해준 거지.]
전화기 너머에선 덤덤한 차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 모니터 화면에 서 계장이 보내온 메일이 도착해 있었고, 거긴.
[조합장님과 농민대표님 사인받았습니다. 이번 주말 공중파 광고 그리고 농협 공식 너튜브 계정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광고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시연이 끝나고 이번 광고의 의미에 대해 열심히 강조해 봤지만 조합장의 얼굴은 썩었고 농민대표는 자리를 떠난 후 한참 동안 보이지 않다가 회식 장소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카피라이터 생활을 하면서 이런 반응은 오래전 신한 제약 소화제 광고 이후 처음. 그래서 암울했고 낙심했으며 그 결과 또 과음을 하게 되었다.
‘광고는 좋았어, 문제는 여기 분위기에 안 맞다는 거지.’
씁쓸한 마음을 술로 풀고 있는데 차혜민은 그렇게 말했다.
‘고문 역할을 좀 해야겠네.’
소용없다고 말리는 내게 차혜민은 뜻 모를 웃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조합장이 있는 자리로 떠났고 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손님, 도착했어요.’
대리운전기사. 차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전화기를 확인하니 자신은 집에 잘 갔으니 걱정 말고 쉬라는 차혜민의 문자 한 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침 서 계장의 메일을 받은 것.
“무슨 기름칠을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광고가 엎어질 뻔한 상황은 다시 정상궤도를 순항 중이다. 난 차오르는 고마움을 그녀에게 전했다.
“감사합니다. 고문님.”
[회사나 빨리 키워. 그래야 지분을 받든가 하지.]
쿨한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이로써 쌀 광고는 마무리.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이후 동남풍 애드 솔루션은 한 발 한 발 성장의 계단을 밟아나갔다.
영상 광고는 나와 김다미가 움직였다. 이미지 위주의 광고는 김다미와 조영찬이 짝을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경력이 짧다 보니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미 녀석의 능력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어떻게 광고주를 구워삶는지 매일같이 작은 광고를 물어왔고 덕분에 월급 받으며 쉬고 싶다는 이미래의 소망은 출근 삼일 만에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고, 우린 추가 직원 채용을 고민하게 되었다.
“사장님! 이것 좀 봐요.”
이미래의 목소리,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모니터에 떠오른 기사를 가리켰다.
“결국 대박 났네요.”
“뭐가요?”
“오천 쌀 광고요.”
“아…….”
정신없이 살다 보니 광고가 방송을 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화면엔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기사의 내용을 압축한 한 줄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오천 반만년 쌀. 신선한 광고로 2030을 사로잡다.]
기사를 속독했다. 이번 광고, 금단의 맛은 공중파와 온라인 양 채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광고와 동시 출시한 소규격 제품들은 젊은 부부와 솔로족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기사를 읽어나가던 시선은 한 문장에서 멈추었다.
[갓 지은 밥을 나눠 먹으며 친구나 연인끼리 비밀을 털어놓는 새로운 문화가 급속히 확산 중.]
“세상에, 우리 사장님이 없던 문화를 만드셨어요.”
이미래의 목소리에 직원들이 하나둘 동조를 보내온다.
“이야! 문화 대통령, 문화 아이돌.”
“존경합니다. 사장님.”
직원들이 날 비행기에 태워 달나라로 날려버릴 기세다.
“아이고. 됐네요.”
그때였다.
띵동띵동.
사무실 초인종이 울렸다.
“네, 누구십니까?”
조영찬이 문을 열어주었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덕모 선생님을 뵙고 싶은데 자리에 계신가요?”
나이 든 남자 목소리. 분명 들어본 목소린데 누군지 떠오르진 않는다. 선약 없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상황이 이상하기도 하고.
들어온 건 늦은 중년의 두 남자였다. 그중 앞장선 남자를 본 순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합장님?”
“아…… 마침 계셨네요.”
그가 반갑게 손을 내민다. 오천농협 조합장, 60세가 훌쩍 넘은 옛날 사람이자 거대한 오천농협을 책임지는 수장이다. 약속 없이 사무실을 찾아온 게 이해가 간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영찬 씨 손님 차 좀 부탁해요.”
“네.”
조합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초면의 남자. 두 사람이 손님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먼저 감사 인사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차 고문님 말씀처럼 과연 치밀한 전략이더군요. 요즘 우리 쌀 팔리는 것만 봐도 제가 배가 부릅니다.”
조합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생님께 정말 큰 신세 졌습니다.”
“아, 네.”
그의 말 중 한 단어를 되뇌었다.
‘치밀한 전략.’
차혜민이 어떤 기름칠을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
“이쪽은 저희 농협하고 자매결연 맺은 수협 조합장이신데…….”
“아, 네.”
소개를 받은 그가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낸다. 하얀 명함, 금박 테두리, 한글 없이 오직 한문으로만 써진 관계로 바로 알아볼 수 없는 명함.
난 그것을 받아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천 조합장이 설명을 계속했다.
“이번에 우리 광고 보고 소개해달라고 하도 생떼를 부려서, 실례인 줄 알면서 이렇게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소개받은 남자가 내 쪽으로 상체를 내민다. 그리고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미국에서 반도 차 광고 만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촌놈이 영광스럽게도 이렇게 굉장한 분을 다 뵙네요.”
극찬이다. 너무 극찬이라 쥐구멍을 찾게 만들 만큼.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새벽차 타고 완도에서 올라왔습니다. 저희 지역 특산품 광고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이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동남풍의 직원 모두의 고개가 일시에 내 쪽으로 향하는 걸.
오천농협, 자매결연, 완도, 특산품.
네 개의 단어가 조합되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광고로 찍을 거라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칠흑같이 검은 그것.
“……혹시.”
그래서 광고 제품을 확인하는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수협 조합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김입니다.”
“김……이요?”
벌어진 내 입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고.
쿠당탕.
이미래의 자리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완도 김 광고를 만들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