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63화
63. 어쩌다 보니 농수산물 전문(2)
꿈뻑.
어두웠던 눈앞이 밝혀진다. 초점이 맞지 않아 뿌연 시야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잡힌다.
검은 머리, 하얀 얼굴…… 누굴까 날 이토록 안타깝게 지켜보는 이 사람은.
“엄마! 정신 차렸어.”
뭔가 애틋하던 기분은 단숨에 날아갔다. 뿌연 시야가 밝혀지고 한심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안주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낮술 먹고 길바닥에서 노숙을 해? 님 제정신?”
그제야 어딘지 알겠다. 이곳은 내방.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으…….”
짜릿한 두통이 후두부를 후려치고 지나간다.
“지금 몇 시냐?”
“열 시다. 밤 열 시.”
“나 어떻게 왔냐?”
“아무것도 몰라? 아주 인사불성이셨구만.”
그때였다.
“얘 괜찮니?”
걱정스러운 표정의 어머니가 들어선다.
“네. 괜찮아요.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미가 중얼거린다.
“김다미? 너네 회사 직원이라며? 그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했더라고.”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서에 있는 날 데려가기 위해 김다미가 내려왔고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안주미도 내려왔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옮겨졌다. 내가 쓰러진 근처에 방치된 차는 김다미가 수습했다.
“누구랑 그렇게 술을 먹은 거야? 그리고 이 추운 날 길바닥에서 잠이 오디?”
“크흠.”
“별일 없으니 됐다. 씻고 밥 먹자.”
“으이그.”
어머니가 주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난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거긴 걱정 가득한 문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괜찮으세요?]
[차는 회사에 가져다 놨어요. 정신 차리면 문자 한번 주세요.]
[여태 주무시나요? 괜찮으신 거죠?]
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녀석이 떠올라 재빨리 핸드폰에 답장을 입력했다.
“대낮부터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니? 회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밤 10시 반에 차려진 밥상. 김을 모락모락 내는 따듯한 북엇국을 입에 넣으며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되려고 이러는 거예요.”
“그래? 그럼 다행인데.”
“참, 보령엔 언제 내려가세요?”
가족 카페 계획은 나 빼고 착착 진행 중이다. 허리 구실을 해야 할 아들이 계획에서 빠졌지만 계획이 취소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낮엔 커피 뽑고 밤엔 웹툰 그리고. 너무 멋질 거 같지 않아?’
안주미가 결국 웹툰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오래전부터 그림 소질이 남달랐던 녀석이다.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하더니 결국 대학 4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그 길을 간다니 조금 기가 막힐 따름.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마마가 잠시 할 말을 고르신다.
“다음 주에 내려가야 돼.”
“그렇게 빨리?”
“계약도 해야 하고 계속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럼 이 집은?”
“팔았지. 오늘 매매 계약서 썼어.”
난 놀란 눈을 키웠다.
“아쉽지만 우리 아들, 그만 독립해야겠다.”
* * *
변화란 늘 어렵다. 월급쟁이에서 업주가 된 것도 그렇고 어머니 집에 얹혀살다가 독립을 하는 것도 그렇다. 힘들고 하기 싫지만 결국 닥치면 할 수밖에 없다.
주말 내내 발품을 팔아 사무실 근처 원룸을 계약했다. 내 방만 그대로 옮기는 되는 일이라 이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끝났다.
그리고 회사엔 새로운 직원들이 출근을 시작했다.
“사장님, 저 출근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한 사무실. 어제까지는 비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짐을 정리하는 이미래를 향해 난 인상을 찌푸렸다.
“사장 소리 너무 어색한데. 다르게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사장을 사장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으흠.”
난 손가락을 턱에 붙인 채 잠시 고민했다.
“그냥 전처럼 하면 어때요? 이미래 팀장님.”
“그건 안 돼요.”
대답은 다른 데서 들려왔다. 김다미였다.
“아무리 전 직장 동료들이라도 사장은 사장, 직원은 직원이에요.”
“맞는 말이에요.”
이미래도 고개를 끄덕인다.
“호칭이 무너지면 관계도 무너져요. 배려는 고맙지만 사장님은 그냥 사장님 하세요.”
그리고 그날 아침.
“조영찬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완벽한 뉴페이스도 출근을 했다. 김다미가 뽑은 우리 회사의 막내, 풋풋한 얼굴의 녀석이 꾸벅 숙였다.
“잘 부탁해요. 당분간 다미가 교육을 좀 맡아줘.”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김다미와 둘이서 일할 땐 이게 회사인지 개인사업인지 헷갈렸는데 이렇게 네 명이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제법 기획사 분위기가 난다.
그리고 그날 오후.
“그냥 메일 보내면 되지 왜 오라 가라 그래?”
보조석에 올라타며 차혜민이 투덜댄다.
“나중에 지분 받을 거라면서요. 그럼 필요할 땐 출동하셔야죠.”
“고문 때려치울까?”
난 묵묵히 액셀을 밟았다.
“목적지나 알자. 어디 가는데?”
“경기도 오천이요.”
“오천?”
“네. 오천농협 반만년 쌀 광고 시연행사요.”
“……쌀?”
눈매를 좁히는 차혜민.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완성된 광고를 광고주에게 시연하는 날. 오천농협 대강당으로 장소가 잡히고 시간이 확정된 후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행사에 조합장님하고 농민대표분들 참석하십시다. 행사 끝나고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천농협 마케팅 담당자들과의 날카로운 그 날 기억이 떠올랐다. 게다가 광고주들의 대장인 조합장이 참석하는 자리라면 피하기도 어려울 테고.
그래서 생각한 게 차혜민이었다. 그녀를 방패막이로 세우거나, 간다고 하면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몸을 빼낼 수 있을 테니까.
“쌀 광고도 받았어? 저번엔 건어물이더니 동남풍 정체성이 점점 묘해지는 느낌인데?”
차혜민의 목소리에 쓰게 웃으며 술자리에서 날 살려줄 귀인을 모시고 난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현장 분위기는 생각대로였다. 이곳 농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대강당 앞에 진을 치고 담배 연기로 버섯구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 선생님 오셨네요?”
뚱뚱한 남자, 서 계장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러다 내 옆에 차혜민을 보고 우뚝 굳는다.
“누구……?”
“아, 저희 고문이십니다.”
“차혜민이라고 합니다.”
“아…… 아이고, 반갑습니다. 엄청 미인이시네요.”
그가 바지춤에 슥슥 비빈 손을 내민다. 악수가 끝나자 서 계장은 지나치게 깍듯해져 버렸다.
“아 형님! 강당에 연기 들어가요. 저쪽 구석에서 피우시라니까?”
귀찮은 비둘기를 쫓듯 농민들을 쫓아낸 그가 활짝 웃는다.
“자, 들어오세요.”
강당을 향해 걸으며 차혜민이 중얼거렸다.
“왜 데려왔는지 알겠네. 혹시 행사 끝나고 술자리 있니?”
“네. 벌써 한번 죽었어요. 살려주세요.”
“으흠.”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차헤민,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도도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닭의 무리를 좌우로 가르며 전진하는 한 마리 공작새를 연상시켰다.
조합장과 함께 농민대표가 들어섰다. 기립하는 모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주인공들이 지정석에 앉자 강당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회자의 인사와 국민의례가 이어졌다. 마침내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 오천 반만년 쌀 광고 시연 순서가 되었다.
“오천 쌀, 맛있는 쌀의 대명사이자 누구보다 일찍 브랜드화에 성공한 쌀입니다.”
조합장이 웃는다. 리모컨을 누르자 등 뒤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엔 스무 개가 넘게 떠오르는 경쟁 브랜드 쌀들.
“이제 쌀도 출혈 경쟁 시대입니다. 이제 우린 새로운 소비층 공략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세대별 쌀 소비 성향 자료가 떠올랐다. 중장년층과 30대 이하는 쌀 구매 요소에서 결정적 차이가 났다. 맛과 신뢰성을 우선하는 중장년층과 달리 30대 이하는 합리적 가격과 구매 편의성을 우선한다.
“이번 광고를 통해 우린 업계 최초로 젊은 소비층 공략에 도전합니다. 마치.”
잠시의 침묵, 이제 관심은 최고조다.
“오천농협이 최초로 반만년 쌀을 만들었던 것처럼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단상에서 천천히 물러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반만년 쌀의 새 광고를 보시겠습니다.”
* * *
화면이 밝혀지고 20대 초반의 여자가 등장한다.
달그락달그락, 치익.
화면 너머 들려오는 소리는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 잠시 후 주인공의 앞에 밥공기 하나가 놓인다.
모락, 모락.
평범한 밥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지은 지 시간이 지났는지 군데군데 노랗게 색이 변했다는 것.
화면이 줌아웃한다. 이제 식탁을 주변으로 앉아 있는 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주인공의 맞은편 남동생의 앞에.
탁.
또 다른 밥그릇이 놓인다. 그리고 주인공의 미간이 화악 일그러진다.
동생의 밥이 화면에 들어온다.
조금 전 주인공이 받은 밥과는 다른 새하얗기만 한 새 밥.
주인공의 생각이 목소리로 들려온다.
[야. 자식이라고 똑같이 이뻐하는 거 같지? 내리사랑에도 온도 차가 있어. 그걸 어디서 알았냐면.]
그건 친구의 목소리였다.
[맛있는 반찬일수록 예쁜 자식 근처로 간다니까? 무의식적인 거야. 그런 게 증거인 거고.]
그리고 들려오는 주인공의 속마음.
[찾았다…… 증거.]
그녀가 손을 뻗는다. 그리고 동생의 밥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오래된 자기 밥을 동생에게 내민다.
“뭐야.”
어이없는 동생의 표정, 하지만 주인공이 입술 사이로 어금니를 드러내자 동생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짝!
하지만 엄마는 아니다. 주인공의 등짝을 후려치며 밥그릇을 원위치로 돌려놓는다.
탁, 탁.
주인공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아 왜? 왜 나한테 오래된 밥 주는데?”
“시끄러! 너 다 컸고 동생은 한참 성장기잖아.”
“에이씨.”
“으흠.”
따가운 엄마의 목소리, 그리고 신문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불편한 헛기침 소리만 내는 아빠.
“저거 반만년 쌀 아냐? 새로 산 거잖아! 저 밥 맛있단 말야! 바꿔줘 나도.”
“어디서 밥투정이야?”
다시 들려오는 주인공의 속마음.
[멈춰야 했다. 하지만 그 밥은 너무 맛있어 보였다.]
“왜 쟤만 편애하는데? 맛있고 좋은 건 왜 쟤한테만 주고 난 안 주는데? 뭐야, 정말! 나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온 자식 맞아?”
쿠궁!
갑작스러운 효과음, 동시에 조명이 꺼진다. 어두워진 주방, 식탁 조명만 내리꽂힌다.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이곳은 어느새 취조실이 되어버렸다.
땡그랑!
식탁을 등진 엄마가 국그릇을 떨어뜨렸고.
“너…….”
신문을 내려놓는 아빠의 손이 심하게 떨린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알고 있었던 거니?”
주인공의 눈동자가 몇 차례 깜빡인다.
“흑…….”
뒤돌아선 엄마의 소리. 당황한 주인공의 눈빛이 정신없이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간다.
“뭔데? 이러지 마.”
“그래. 너도 이제 다 컸는데 말해줘야겠지.”
아빠의 목소리는 낮고 침통하다. 주인공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젓는다.
“아냐, 말하지 마. 엄마? 나 그냥 밥 먹을게. 먹는다고!”
하지만 늦었다. 고개를 숙인 채 숨겼던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은 쏟아지는 조명 때문에 취조실 죄인처럼 보였다.
“20년 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단다.”
쿠궁!
다시 들려오는 효과음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주인공의 얼굴. 그녀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난다.
바뀐 화면엔 오천 반만년 쌀 한 포대와 맛있게 지은 밥 한 공기가 나타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쌀과 밥공기 위로 떠오르는 헤드카피.
[참을 수 없는 금단의 맛…… 오천 반만년 쌀.]
[올해 추수한 햅쌀로 포장 직전 도정합니다.]
[3㎏, 5㎏ 소용량 출시. 전국 농협마트에서 찾아주세요.]
[오천 반만년 쌀. 금단의 맛 30초 CF.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