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56화 (56/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56화

56.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반도(6)

“후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뻑뻑해진 눈을 슥슥 문지르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선다.

“커피 마실래?”

다가온 사람은 경하나.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을 뒤져 찾아온 커피를 내게 내민다.

“땡큐.”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녀석이 묻는다.

“좀 어때?”

뜨거운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좋네. 기대 이상이야.”

“먹힐까?”

대답은 곧바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륵.

따듯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긴 지난 한 달간 미국에서 이뤄낸 성과, 미국 방송에 내보낼 반도 자동차의 새로운 광고가 떠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선수를 친다.

“미국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진짜. 가만 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일하면 맨날 이런 거 같아. 야근에 철야에, 어째 미국까지 와서도 변한 게 없냐?”

“하하.”

녀석을 바라보았다. 광고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호텔은 누릴 수 없는 호사가 되었다.

힘들었다는 말로도, 재미있었다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지난 한 달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제야 대답이 나온다.

“먹힐 거야. 분명히.”

녀석이 피식 웃었다.

“딴소리는.”

지난 한 달. 그건 전쟁이면서도 투쟁이었고 동시에 생소함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날, 지사장과 캐서린의 정체를 확인한 것이 이번 여정의 시작이었다. 지사장은 즉시 캐서린과 면담을 했고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짐을 챙겨 그 길로 회사를 떠났다.

조용히 처리하자는 카드는 애초에 지사장이 선택할 수 없는 카드였다. 그날 직원들이 모두 모은 자리에서 새로운 광고를 나와 경하나에게 맡길 것임을 발표했고 지사의 모든 역량을 모아 우릴 도울 것을 지시했다.

캐서린과 고약한 짓에 손발을 맞춰온 제퍼슨 AD와 함께 일할 수 없었다. 제작사 섭외가 시작되었고 그날부터 광고 기획을 멋진 영상으로 만들어줄 최적의 업체를 찾기 위한 끝없는 미팅이 이어졌다.

실력 없는 회사, CF가 아닌 B급 영화를 만들어온 회사, 겉만 번지르르한 회사, 자기가 무슨 일 때문에 온 건지 회의가 진행되고 나서야 알게 된 회사.

각양각색이었다. 그중 필모가 뚜렷하고 실력 있는 회사도 있었지만 선뜻 오케이 사인을 보내진 못했다.

“……이번 광고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회사였으면 좋겠다 싶어서.”

실력 좋은 회사를 왜 선택하지 않았냐는 경하나의 지적에 그렇게 대꾸했다. 다시 미팅이 이어졌고 마침내 찾아냈다. LA에서 디트로이트까지 먼 길을 달려온 사람.

“스튜디오 유앤박의 데이빗 윤이라고 합니다.”

그를 보자마자 난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이시죠?”

“네 하하.”

그가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윤덕배라고 합니다. 저희 직원들은 한국인이거나 한국 교포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번 광고의 정서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동포들로 구성된 제작사.

“좋습니다. 회사 소개 자료부터 살펴볼까요?”

그날 우린 결국 스튜디오 윤앤박을 제작사로 선정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완성된 콘티로 제작회의를 하고 모델을 섭외하고 발로 뛰며 촬영장을 살피고. 대부분의 일이 LA에서 진행되었다.

미대륙의 양쪽 끝, 디트로이트에서 LA까지 비행기로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기에 제작회의가 진행되면서부터 우린 줄곧 LA에 머물러야 했다.

촬영장이 결정되고 모델 섭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인물보다 다양한 장면이 중심인 광고였기에 열흘 동안 진행된 촬영은 고난 그 자체였다.

촬영지가 협조가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고 섭외된 엑스트라는 촬영일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여한 장비는 갑자기 고장이 났고 광고의 첫 장면에 등장해야 할 광고 모델 프린시플은 탁송 중 사고로 인해 범퍼가 박살 난 채 촬영장에 도착했다.

“미치겠네, 진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경하나는 죄 없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겪는 문제는 더 큰 좌절과 암담함을 불러왔다. 하지만 실력 있는 제작사들 대신 한국인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를 선택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윤앤박은 이번 광고의 내용과 의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대표가 직접 움직여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덕분에 수 없는 문제의 순간들을 우린 결국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열흘간의 촬영이 끝났다. 이후 일주일간 스튜디오 윤앤박에서 편집을 했고 그래픽 전문가를 불러 작업을 했으며 더빙을 입혔다. 그 결과 얻어낸 몇 개의 버전을 손에 쥐고 다시 디트로이트로 날아왔다.

남은 건 선택과 시연.

중요한 광고인 만큼 선택은 중요했고 오늘 오후 디트로이트에 도착해 반도 자동차 회의실 하나를 잡아놓고 하루 종일 수백 번씩 광고를 돌려보는 중.

시간은 어느덧 밤 12시.

“으흠. 유 가이스 여기서 슬립?”

빼꼼 열린 회의실 문, 고개를 들이민 건물 관리인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물어왔다.

“아. 30분만 있다 갈게요.”

“그래, 아윌 택시 드라이버 콜.”

주문한 피자를 나눠 먹었던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

“감사합니다.”

“하하.”

문틈으로 들이민 고개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코리안들 미쳤어. 뭔 일을 자정까지 하고 있어? 미친 게 분명해.”

유창한 영어. 나와 경하나는 서로를 보며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슬슬 결정하자.”

시연은 내일 아침, 이제는 결정의 순간이다.

“오케이.”

“동시에 말하는 걸로?”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시에?”

“그래.”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 달이나 녀석과 부대꼈다. 서로 가까워지고 그린라이트가 터지는 그런 류의 관계 변화는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하고 있다.

그녀와 내 컨센서스는 같다. 디트로이트에서 LA로 다시 디트로이트로 이어진 한 달간의 강행군 내내 확인했고 그래서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선택 대상은 무려 7종, 나와 경하나의 선택은 일치할 것인가.

“뭐, 그러든지.”

“그럼 하나, 둘, 셋.”

“삼 번!”

“삼 번.”

“허얼. 이게 웬일이야?”

혹시나 했던 배팅은 성공. 우린 동시에 세 번째 버전을 골랐고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럼 삼 번으로 결정.”

난 세 번째 광고가 담긴 USB를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가? 불 꺼야 하는데.”

“응? 아 그래.”

뭔 생각을 하는지 멍해 있던 녀석이 후다닥 따라붙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마침내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지난 한 달간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는 정수경 지사장.

그래서였을까? 시연에 앞서 간단히 취지를 설명한 후 자리를 비켜주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 따뜻했다.

단상에 올랐다. 스무 명 정도 자리한 반도 자동차 미주지사 직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전 광고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광고를 봤고 또 많은 광고를 만들어 봤습니다.”

집중되는 시선들. 늘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어야 하는데 지금 난 그렇지 않다.

“근데 이번 광고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낯선 땅에 영어도 잘 못하니까 그런 것 같더군요. 사실 한국에서 광고 만드는 것보다 한 열 배쯤 힘들었어요.”

그래서 농담도 할 수 있다.

“겪어보니 여러분의 노고가 더욱 와닿습니다. 다들 타지에서 고생 많으십니다.”

긴장 넘치던 직원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경하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등 뒤 화면이 떠오르고 준비했던 멘트를 시작했다.

“우린 반도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고의 시작을 알리는 자막이 떠오르고 난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반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 광고를 통해 그들이 기억하는 반도와 반도 자동차를 연결해 봤습니다.”

마침내 지난 한 달의 결과물, 먼 미국 땅에서 만들어낸 광인 기획의 첫 광고가 떠올랐다.

화면은 어느 주차장.

반도 자동차 프린시플 한대가 화면 앞에 천천히 멈춰 선다.

[여기 한 자동차 한 대가 있습니다.]

어두운 채색의 화면 위로 세련된 하얀 글씨.

[흔한 새 차가 또 나왔구나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우린 조금 색다른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차가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한다. 고속 카메라로 촬영된 부드러운 움직임, 하지만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제야 알게 된다.

화면이 거꾸로 되감기고 있다는 걸.

후진을 거듭하던 차가 매장으로 들어선다. 자동차를 판매하고 계약하는 매장. 공터에 여러 대의 프린시플이 서 있고 되감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리하여 초 단위로 낮과 밤이 바뀌기 시작한다. 트덕 한 대가 매장에 멈추고 주차된 프린시플들이 거꾸로 트럭에 오른다.

앵글은 트럭을 쫓는다. 움직이던 트럭이 해안에 도착하다. 트럭에서 내린 차량이 거대한 컨테이너선에 오른다. 앵글은 배를 쫓는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의 모습 위로 다시 자막이 떠오른다.

[그렇습니다. 이 차는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배가 선착장에 멈춘다. 차가 배에서 내리고 트럭을 타고 어느 공장으로 향한다. 화면이 바뀌고 공장 내부가 비친다. 완성된 차가 로봇 팔과 작업자들이 기다리는 라인으로 들어선다. 로봇 팔이 스파크를 튀기고 작업자들이 움직여 차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분해된 엔진이 리프트로 들어 올려지고 화면은 공중에 떠 있는 엔진을 줌인한다.

줌인하는 화면 너머 배경으로 보이는 자동차 회사의 엠블럼과 태극기.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죠.]

엔진을 중심으로 멀어지는 화면. 이제 엔진이 있는 곳은 공장이 아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엔진을 중심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달라붙는다. 거꾸로 돌아가는 화면 속 엔진은 분해되어 조각조각 흩어진다. 어느새 화면엔 엔진이 아닌 엔진의 설계도가 있다. 펼쳐진 설계도를 갈무리한 직원이 그것을 검은색 가방에 넣고 문워크를 하며 연구소를 빠져나간다.

화면은 그를 쫓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서울, 반도 자동차의 본사가 있는 곳.

사무실에 도착해 가방에서 설계도를 꺼내놓자 직원들이 문워크를 하며 설계도가 있는 곳으로 몰려든다.

창밖으로 앵글이 멀어지고 다시 낮과 밤이 정신없이 바뀌기 시작한다.

[당신은 한국을 잘 모를 겁니다. 그럼 좀 더 빠르게 가볼까요?]

멀어지는 앵글은 서울을 비춘다. 빨라지는 리와인드 속도는 이제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정도에서 초 단위로 계절이 바뀌고 연도가 바뀌는 속도. 스카이라인을 가리던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빌딩과 아파트가 사라지고 길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있던 곳에 숲이 생겨나고, 한강을 가로지르던 다리도 하나둘 사라진다. 그리하여 나타난 1950년대의 서울.

파랗던 하늘은 오간 데 없다. 연기로 가득한 하늘은 잿빛이었고 그 아래 펼쳐진 땅은 폐허를 이룬다.

쿠궁. 콰광.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놀란 사람들이 달아난다.

그렇다. 이곳은 전장. 낮은 고도에서 촬영된 화면에 소총을 들고 전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화면이 이동하고 화면에 잡히는 병사들.

부대 마크가 선명한 미군과 그들과 어깨를 견주며 달려가는 한국군.

[이 나라는 당신과 함께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 동북아의 혈맹이었습니다.]

피잉! 퍽.

도탄 된 총탄에 미군 병사 하나가 쓰러진다.

“메에디익!”

병사들이 쓰러진 그에게 몰려든다. 공포로 가득한 미군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힌다. 더욱 줌인하는 화면, 그리하여 화면을 가득 채운 병사의 눈동자에 하늘 위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하는 전투기가 반사된다.

자막이 빠르게 올라온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렸고 한국은 그렇게 지켜낸 폐허 위에 공장을 짓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눈동자를 비추던 화면이 줌 아웃한다. 젊은 병사는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전쟁 이후 70년, 이제 당신이 지켜낸 폐허에서 피워낸 꽃을 조심스럽게 선보입니다.]

첫 화면처럼 주차장에 멈춘 프린시플, 그것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 화면이 암전된다.

[한국,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반도로부터…….]

[프린시플]

반도 자동차 미국 프린시플 CF, 65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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