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55화
55.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반도(5)
“차가 상당히 멋지더군요. 광장에 딱 세워놓고 신나는 음악 깔고 모델들 춤추게 하면 멋진 그림 나올 거 같은데요?”
현지 파트너, 반도 자동차의 광고를 기획하고 영상으로 만들어 줄 광고대행사. 제퍼슨 AD 카피라이터가 환하게 웃었다.
반도 차 마케팅 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거 같은데요? 젊고 신선하고 자유분방하고, 그 장면하고 드라이빙 장면을 멋지게 이어 붙이면 눈길 확 사로잡을 수 있겠어요.”
이곳은 전시회가 열리는 코보센터 안 컨퍼런스룸. 늦은 오후 광고 제작을 위한 1차 미팅이 한창이었다.
제작사와 반도 차 담당자의 이야기는 경하나의 입을 통해 통역되어 안덕모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네, 느낌이 좋아요. 이 바닥에서 20년간 구르며 깨달은 사실인데 첫 회의 때 이렇게 느낌 오면 결과가 늘 좋았어요.”
이번 광고는 반도 자동차 미국지사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이벤트. 그 중요한 광고를 만들어야 할 기획사는 서류 한 장 없이 말로 광고를 제안하고 마케팅 담당자는 또 거기 동조한다.
“그래요? 뭔가 확 당기는 느낌이네요. 요즘 애플 광고가 그런 스타일이잖아요? 우리도 그런 스타일로 한번 맞춰봐요. 영상 색감도 좀 강하게 넣고 중독성 있는 비트 깔고.”
“차는 빨간색이면 좋겠네요. 춤추는 모델들은 강렬한 색상 옷 입히고.”
“그렇죠. 키 작은 흑발 모델이 차위에 올라가 있으면 멋질 것 같아요.”
즐거운 표정으로 광고 이야기를 늘어놓던 반도 자동차 마케팅 담당자, 갈색 생머리와 유독 밝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미국인 캐서린이 눈매를 슥슥 비비며 경하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두 분은 너무 조용하시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경하나가 팔꿈치로 안덕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음?”
“뭐 해? 회의에 집중 안 하고.”
캐서린과 제퍼슨 AD의 카피라이터가 한참 동안 떠드는 동안 안덕모는 핸드폰에 시선을 못 박은 채였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모른 척했던 경하나였다. 그제야 안덕모가 고개를 들었고 캐서린과 눈이 맞춘다.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그녀가 말했다.
“이번 광고 어드바이스 해주라고 한국 본사에서 특별 초빙하셨다고 들었는데 듣고만 계시지 말고 한 말씀 해보세요.”
얼핏 들으면 거슬리는 부분은 없다. 하지만 경하나는 알 수 있었다. 한국어든 영어든 중국어든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있다.
오랜 시간 여러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통 그런 류의 뉘앙스는 만국 공통이다.
방금 캐서린의 뉘앙스는 문맥 그리고 상황과 만나 그녀의 의중을 알려온다. 지금 그녀의 말에서 느껴진 건.
비아냥, 그리고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던 그것. 오래전 경하나가 호주로 어학연수 갔을 때 몇 차례 느끼곤 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음.”
안덕모는 모를 거다. 하지만 목소리에선 묘한 불쾌함이 묻어났다.
“굳이 우리 의견이 필요하세요?”
캐서린의 긴 갈색 눈썹에 파장이 일어난다. 그리고 경하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늘 이런 식으로 광고를 만들어왔나요?”
“네?”
당황한 제퍼슨 AD의 카피라이터 리처드, 안덕모는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제퍼슨의 광고 기획서는 어디 있죠? 스토리보드는? 콘티는 나왔나요?”
“…….”
잠깐이지만 똑똑히 보았다. 리처드의 입술이 그려낸 소리 없는 욕설. 하지만 안덕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캐서린에게 고개를 돌린다.
“USP는 있습니까? 이번 광고를 통해 알리고 싶은 메시지가 뭐죠? 설마 광장에 세워두고 춤추기 좋다 그런 건가요?”
혹자는 말한다. 미국이야말로 광고의 천국이라고. 그리고 오랜 시간 광고를 만들어온 경하나는 누구보다 그 말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TV가 생활의 중심인 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과가 끝나면 TV 앞에 앉는다. 스포츠, 토크쇼, 드라마 등. 관심 매체가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바뀐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시청하는 문화를 간직한 나라다.
덕분에 TV 광고의 효과는 엄청나다. 이유 없이 슈퍼볼 광고 초당 계약단가가 2억 원을 호가하는 게 아니다.
미국이 광고의 천국인 이유는 또 있다. 자유의 나라답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 타국에서 불쾌함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도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게 보편적 정서.
그래서 안덕모가 목소리는 더욱 날 서 있었다.
“실망스럽습니다. 이곳이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광고 기획사와 광고주 간 실무 미팅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군요.”
안덕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망한 시선들이 그에게 따라붙는다.
“남은 미팅은 두 분이서 하시면 되겠습니다. 불청객은 여기서 빠지도록 하죠.”
컨퍼런스룸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뒤를 따라 나온 경하나.
“야!”
걸어가던 안덕모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기분 상한 거야? 너답지 않게 갑자기 왜 그래?”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갑자기 왜 급발진인 건데?”
그때 안덕모는 분명 웃고 있었다.
“기분 안 상했어. 그리고 급발진도 아니야. 작정하고 액셀 밟은 거니까…….”
“뭐?”
그가 컨퍼런스룸을 바라보았다.
“이 판에선 아무것도 못 해. 판을 좀 뒤집어엎어야 할 것 같네.”
당혹한 두 사람이 앉아 있을 컨퍼런스룸. 안덕모를 따라 그곳을 바라보던 경하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저게 뭘 잘못 먹었나?’
경하나는 생각했다. 오늘 안덕모는 평소에 알던 그가 아니었다. 회의를 박차고 뛰쳐나간다는 건 전 직장에서 자신감 충만했던 그녀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영어에 능통해 캐서린의 속마음을 일찍 꿰뚫었고 그가 화를 낸 이유 역시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근데 그래서 뭘 어쩌려고?’
안덕모와 그녀는 이번 광고의 주체가 아니다. 광고는 미국지사와 제퍼슨 AD가 만들고 두 사람은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가지고 미국에 건너왔다.
두 사람을 빼고 광고가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면 곤란해지는 건 두 사람이다. 반도 자동차 돈으로 미국에 왔고 호사까지 누렸는데 한 일이 없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저 녀석 너무 태연하다.
컨퍼런스룸을 빠져나온 안덕모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지사로 향했다.
정수경 지사장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미팅을 하고 있어야 할 두 사람. 지사장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걱정스러운 지사장의 물음.
“캐서린 말입니다.”
“우리 직원 말인가요?”
“이번 광고에서 빼주세요.”
맥락 없이 날아간 요구, 경하나는 생각했다.
‘잘못 먹은 게 아니라 먹지 말아야 할 걸 먹은 건가?’
“잠깐만요, 안덕모 씨.”
지사장의 당황은 당연한 것이었다.
“캐서린은 지사 설립 때부터 마케팅을 책임져 온 인재예요. 근데 광고에서 빼라니…… 이유가 뭔가요?”
평소의 안덕모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분위기, 집무실을 냉장고로 만들어버릴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 반도 차 광고 만들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정수경이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캐서린, 그 사람…….”
그때 경하나의 머릿속엔 설마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인종 차별주의자예요.”
집무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 * *
처음엔 몰랐다. 살면서 백인과 함께해 본 기억도 없었고 인종차별 같은 걸 당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엔 가본 적도 없었다.
시작은 참석자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아무 준비 없이 미팅에 나온 카피라이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마케팅 담당자. 그동안 두 사람이 어떤 광고를 만들어왔는지 궁금해졌고 그래서 핸드폰에서 예전 광고를 찾아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특별한 감상은 없었다. 동서양의 다양한 모델이 광고에 등장했고 전반적으로 강렬한 비주얼과 색감을 강조한 빠른 템포의 광고구나 정도.
그때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흑발인 모델이 차위에 올라가 있어도 멋질 거 같아요.”
어떤 종류의 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차 위에 올려놓기 위해 조금 작아야 하고, 빨간색 차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흑발이었으면 좋겠다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냥 넘어갔을 말이었다.
하지만 두 단어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고 그래서 보았던 광고를 다시 한번 살폈다.
“보이십니까? 여기 모델, 그리고 벽화, 그리고 저기 전광판.”
지사장과 경하나에게 내가 보았던 광고를 다시 보여주었다. 광고 장면 구석구석엔 그녀가 꼭꼭 숨겨둔 악의적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이스터 에그처럼, 쉽게 보이지 않지만 찾아내면 선명한 의도를 가진 장면들.
키 작은 동양인, 짧은 흑단발과 낮은 코, 화장으로 연출한 튀어나온 광대뼈.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캐서린의 정체를 알려준 결정적인 증거가 그 안에 있었다.
“슬랜트 아이. 이거 전형적인 동양인 비하예요.”
모델, 벽화, 전광판, 심지어 빠르게 지나가는 TV에 등장하는 사람까지. 동양인 비하의 상징들. 그중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비하의 상징, 슬랜트 아이(Slant eye, 찢어진 눈). 그 얼굴은 도처에 있었다.
“세상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정수경의 손가락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경하나가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좀 느꼈어. 그 여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거.”
“어떤 거였는데?”
“좀 비꼬는 뉘앙스라 설마설마했거든. 근데 아까 그 여자가 나 쳐다볼 때 눈 비비는 척하면서 찢어진 눈 만들더라.”
이제 확실해졌다.
캐서린은 광고를 통해 비하의 상징을 넣었고 그 과정에서 제퍼슨 AD의 리처드도 가세했을 거다.
“그동안 재미있었겠네. 통쾌하고.”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 그 회사에 다니며 그 회사 광고비를 써서 그 회사의 구성원을 비하하는 광고를 만든다.
누군가는 멋지다며 박수 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잘했다며 칭찬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녀가 느꼈을 감정, 아마 마약적인 희열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어떻게 캐서린이…….”
10년이나 함께한 동료의 배신이 누군가에게 크나큰 충격과 배신이겠지만.
“지사장님.”
하지만 지금 해야 할 건 절망이 아니다. 우린 이 상황을 신속하게 극복하고 반전의 카드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일은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내일하는 지사다. 믿었던 동료가 주는 충격을 모두가 맛볼 필요는 없다. 난 가방을 열어 출력해 둔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저희가 만들어 본 광고 기획입니다. 급하게 만든 거라 이미지도 없고 부족해요.”
여전히 당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수경, 그녀가 반사적으로 서류를 받아 든다.
“기획이 마음에 드신다면 이 광고 저희가 맡았으면 합니다.”
기획서를 넘기는 지사장의 떨리는 손, 집무실엔 한동안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