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53화
53.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반도(3)
객실은 넓고 쾌적했고 호텔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오가며 마주치는 직원들은 자신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편의시설들은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었다.
그래서 경하나는 생각했다. 이곳은 천국이라고.
“하아.”
그녀가 테이크아웃 해온 커피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객실 창 너머 디트로이트의 전경과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후륵.
하는 일이라곤 그저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 그럼에도 지금 경하나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밖에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평선에 가까워진 해는 점점 붉은빛을 띠었고 그에 맞춰 떠다니던 조각구름들도 미술 작품처럼 채색되기 시작했다. 석양이 짙어지는 디트로이트,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한 사람.
‘하늘을 이렇게 오래 바라본 게 얼마 만일까?’
머릿속에 지나간 그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부 욕심 많았던 학생,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난 인재라는 평가를 받고 첫 직장에 출근했고 의욕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직장의 모습은 기대 이하였다.
선배와 동기들은 실력은 엉망이었다. 덕분에 경하나는 단숨에 주목받는 신입의 자리를 꿰찼고 누구보다 빨리 메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동료들은 축하를 건네면서도 자신을 조직에 맞추라 요구했다. 하지만 경하나에게 그건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을 밟고 일어서기를 선택했다.
잡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동료와의 마찰도 광고주와의 대립도 피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경영진은 자신을 능력을 선택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고주들이 너랑 일하는 걸 꺼린다더군. 팀 평판도 바닥이고. 미안하지만 이제 메인에서 손 떼게.’
믿었던 돌다리가 무너졌다. 그녀는 고민 없이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옮겼다.
거기서 그놈을 만났다. 계약직으로 들어온 인턴 주제에 힘겹게 손에 넣은 메인을 자신에게 넘기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광인 기획 규모의 회사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광고, 자동차 광고를 맡아 성공시킨 놈.
늘 어설프고 둥글둥글한 놈의 어디에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는지 그 녀석은 경하나가 알고 있는 어떤 카피라이터보다 빠르게 성공가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전 반도 부회장 김형준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을 알고 나니 형의 일이 다시 보이더군요. 천재를 부하로 둔 형이 좀 부럽기도 했고.’
‘천재’.
누군가에게 함부로 붙이기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
김형준이 녀석을 그렇게 불렀을 때 경하나는 깨달았다.
천재라는 단어를 듣고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자신을.
문득 떠오르는 그의 얼굴. 어떤 상황에도 유들유들 웃어서, 딱히 멋지지도 않은 주제에 아닌 척 자신을 배려하곤 했던 것이 꼴사나워서. 괜히 삐딱하게 대하게 만드는 그 녀석.
‘안덕모.’
조용한 되뇜과 함께 녀석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다 마셨네?”
큼직한 벤티 사이즈 커피가 어느새 바닥나 있었다.
경하나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반듯하던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뭐야, 이 자식? 왜 아직도 안 와?”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던 손길이 멈춘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똑똑.
“예스?”
벨도 아닌 노크 소리. 난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십니…… 어?”
열린 출입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얼굴에 덕지덕지 심술이 붙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고 그리하여 다시 닫히는 문.
턱.
하지만 닫히던 문은 경하나의 발에 막혔다. 그제야 녀석이 찾아온 이유, 찾아와서 벨 대신 문을 두드리고 심술 가득한 얼굴이 된 이유가 떠올랐다.
“하하, 쏘리.”
“쏘리는 개뿔.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여섯 시에 나오라고 했냐, 안 했냐?”
녀석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너 잤지?”
“아니.”
“그럼 뭐 했는데?”
난 슥슥 뒤통수를 긁으며 객실 한구석에 있는 업무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긴 출력된 자료와 함께 조사 중인 자료들이 화면에 가득 떠 있었다.
“일한 거야?”
“뭐 일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까.”
호텔에서의 이틀째였다. 정수경 지사장은 이틀간은 부담 없이 쉬라고 했지만 그저 생각 없이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영장에 몸을 담글 때도, 피트니스 클럽에서 러닝을 할 때도 반도 자동차 미국지사가 처한 현 상황이 떠올랐고 남은 기간 꼭 만들어내야 할 그들의 마지막 신호탄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노트북을 켠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 여섯 시에 녀석의 짐을 옮겨준 대가로 밥을 얻어먹을 계획이었다. 지난 이틀 호텔에서 식사를 했으니 모처럼 디트로이트 시내로 나가 법인카드가 아닌 녀석의 사비로 얻어먹는 저녁.
하지만 일이란 참 묘하다.
궁금함이 궁금함을 불러오고, 조사된 자료를 까먹기 싫어 기록하고 출력하다 보니 점심 먹고 앉았는데 어느새 일곱 시.
“어휴. 어지간히 일 중독이야 너도.”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난 놓치지 않았다. 배고프다며 펄쩍펄쩍 뛸 줄 알았던 녀석의 입꼬리가 조금 말려 올라가는 것을.
“가자. 배고프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는 녀석을 보며 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더니 고작 이거냐?”
불만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빅맥이 뭐 어때서?”
좋은 식사라면 호텔에서 충분히 먹었다. 그리고 그깟 카트 좀 밀어준 게 뭐 대수라고.
“미국에 왔으면 빅맥이지. 전부터 본토의 맛을 느껴보고 싶었거든.”
예쁘게 포장을 벗겨 한입 깨물었다.
“으음?”
입안에 들어온 빵과 패티, 그리고 채소와 소스가 만나 전달되는 풍미.
“……한국이랑 똑같네?”
녀석이 피식 웃는다. 마찬가지로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문 녀석이 묻는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뭐가 좀 보이든?”
“음.”
난 입안에 남아 있던 음식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차 미국 시장에서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아.”
6시간의 조사. 처음 미국 시장의 수입 자동차 동향이 궁금해서 시작된 자료조사였다. 연도별 수입차 판매 동향을 분석하고 시기에 맞춰 마켓셰어 증가 요인을 분석한 기사를 체크하고.
부정확한 한국의 기사 대신 원어로 된 미국 기사 위주로 읽어나갔다.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영어 실력에 전문용어 가득한 보고서를 읽으려다 보니 머리는 깨질 듯 아팠지만 덕분에 난 확실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브랜드들은 나름의 포지션 전략이 확실하더라.”
“그거야 미국만 유독 그런 건 아니잖아. 포지션은 마케팅의 기본 아냐?”
“그렇지 근데 미국은 좀 독특해. 정확하게 말하자면 좀 감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감성이라.”
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인들 여전히 차에 대한 자부심이 생각보다 강해. 그래서 감성적인 구매 이유가 있는 브랜드는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브랜드는 정착하지 못한 것 같아.”
감자를 입에 넣던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건 좀 이해가 안 가는데? 미국 시장 점유율 1위는 독일 차랑 일본 차 아니야? 두 나라 다 2차 대전 적국이었잖아.”
날카로운 지적,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두 나라 모두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포지션을 잡았더라고.”
난 햄버거를 내려놓고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독일과 일본 차의 포지션 전략은 달랐다. 독일 차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오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상류층을 타깃으로 한 공격적인 전략을 펼쳤다.
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 건 영화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국내에서도 활발한 미디어 PPL을 통해 성공한 주인공이 타는 차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무의식중에 심어둔 이미지가 힘을 발휘했고 그 결과는 실적으로 나타났다.
“하긴 그렇네. 아이언맨 영화 내내 아우디가 나왔으니까.”
“그렇지.”
반면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중산층을 타깃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가성비를 내세웠다. 미국 진출 초기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고용을 창출했다. 미국 성장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그들만의 무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키워드를 보면 전략이 보이거든. 합리적 소비, 스마트함, 가족. 일본 차는 세 가지 키워드를 내세워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어.”
“흐음.”
“게다가 시기도 좋았지. 미국에 있어 지금 일본은 최고의 우방국이니까.”
현재 일본은 동아시아 최우방, 2차 대선 서로에게 총을 겨누던 적국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동맹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반면 한국 차는 좀 애매해.”
애매한 포지션의 중원 자동차가 그나마 미국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교포들의 지지와 눈물겨운 할인 경쟁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더라. 자동차 메이커별 인식조사던데 결과가 재미있어. 한번 들어볼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 차 하면 가장 크게 떠오르는 이미지로 성공을 꼽았어. 반면 일본 차는 가족이었지. 근데 한국 차는 뭔 줄 알아?”
“글쎄?”
“붐 가이.”
“붐 가이?”
“그래.”
조사 결과는 미국 일반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머나먼 타 대륙의 이름 없는 나라. 붐 가이란 북한의 김씨 일가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남한과 북한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심각하네.”
“미국에서 한국 차는 철저한 언더독이야. 수십 년 노력했지만 포지션도 못 잡았고 이미지도 없어. 구매를 해야 할 감성적 이유가 없으니 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미국 소비자가 사줄 리가 없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녀석. 잠시 후 조금 어두워진 표정이 올라온다.
“신호탄이 어지간히 큰 게 아니면 안 되겠네.”
“맞아.”
디트로이트 시내의 커다란 맥도널드 매장. 찾는 이가 없어 한적한 매장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디트로이트 모터쇼, 다른 말로는 북미 국제 오토쇼. 고장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거대한 코보센터는 전시장으로 향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와 엄청나네요.”
놀랐다.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지금껏 봐온 디트로이트는 한적했기에 더 그랬다.
한국에서도 모터쇼의 인기는 상당하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길이 정체로 꽉 막힐 지경.
하지만 거대한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 전 세계 모든 인종을 모아 둔 것 같은 코보센터의 모습은 감상의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앞장서 걸어가던 고장원, 그가 방긋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요. 괜히 세계 3대 모터쇼가 아니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으리으리한 전시 부스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라이슬러, 포드, 제너럴 모터스 같은 미국 자동차 회사는 물론 벤츠, BMW 같은 글로벌 기업들까지.
거대한 전시장을 가로지르던 고장원의 발걸음이 마침내 멈추었다. 거기 눈에 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휴식은 편안하셨나요?”
“네. 덕분에 너무 잘 쉬었습니다.”
정수경 지사장,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게 우리 부스예요.”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거긴 수십 대의 차량과 체험행사로 북적거리는 타 부스와 달리 고작 차량 두 대, 지사 직원 말고는 찾는 이 없는 반도의 부스가 있었다.
지난 10년, 반도 자동차의 미국 진출의 결과물처럼 한산한 부스.
“좀 처참하죠?”
지사장이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