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51화
51.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반도(1)
서울 모처의 호텔 커피숍. 한산한 그곳의 가장 구석진 곳, 거기 한 남자가 있었다.
“제길.”
그가 불편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엔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해명과 사과에도 계속되는 KJ 불매운동, 장기화 수순 밟나.]
남자는 KJ식품 마케팅 이사 출신이자 현 성수 기획의 대표 황재평, 그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했다.
“지금 모셔왔습니다.”
조용히 다가온 한 남자의 목소리, 과거 한 회사에서 동고동락한 후배이자 이번 만남을 주선해 준 삼광식품 김창국 부장이었다.
황재평이 후다닥 핸드폰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을 살피며 다가선 남자, 황재평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수 기획 황재평이라고 합니다.”
상대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중원 자동차 서규원입니다.”
두 사람이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인사가 오가고 중요치 않은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두 사람의 만남을 중재해 준 김창국 덕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황재평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런 말씀 죄송스럽습니다만 지금 한창 곤욕을 치르고 계시는 걸로 압니다.”
씁쓸한 표정의 서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욕 정도가 아니라 창사 이후 최대 위기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죠.”
두 달 전 반도 자동차가 시작한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 캠페인, 그들은 TV CF를 필두로 온·오프라인 채널을 풀가동해 벌인 대대적인 캠페인 활동을 벌였다.
자동차의 안전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프레임, 빔, 필러, 엔진 관련 부품은 물론 에어백과 강판의 두께까지. 수년간 조심스럽게 중원에서 진행했던 원가 절감의 흔적들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조금 시끄럽다가 끝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문가와 인플루언서들이 가세하면서 분위기는 더 활활 불타올랐다.
매일 새롭게 추가되는 이슈들을 라이브로 지켜본 대중들은 중원 자동차에 비난의 화살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고 그동안 탄탄한 내수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중원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거부터 암암리에 지속돼온 중원과 JW애드의 내부거래,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작은 광고회사들을 방패막이로 써먹은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
공정거래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했고 수상한 자금 흐름이 포착되면서 검찰이 가세했다. 중원 자동차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꼴이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수면 위에 불바다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활로를 찾으려 전주미 팀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즉시 해고하고 사과에 나섰다. 하지만 불붙기 시작한 여론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원 마케팅 본부가 쑥대밭이 된 현 상황에 이사인 서규원이 여태 남아 있는 건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모든 게 그놈들 때문이지 않습니까.”
황재평의 은근한 목소리,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서규원의 얼굴에도 분노가 일었다.
“그렇습니다. 광인 기획, 특히 그 안 뭐라는 놈 때문이지요.”
황재평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KJ 식품과 성수 기획도 귀사와 똑같습니다. 그 안덕모 때문에 KJ식품은 불매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그놈이 발굴한 윤도식이라는 모델 때문에 저희도 지금 회사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창국이 의견을 보탰다.
“광고로 경쟁사를 공격하고 대중을 꼬드겨 불매운동을 조장하는 치졸한 수법입니다. 자유경쟁이 기본인 대한민국 기업계에 있어서는 안 될 선동이자 폭력인 셈이죠.”
격앙된 목소리,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보냈다. 주변을 살핀 황재평이 목소리를 죽였다.
“그대로 두면 되겠습니까? 그 회사, 그리고 안덕모라는 놈이 카피라이터 짓을 계속하는 한 앞으로도 번번이 발목을 잡아댈 겁니다.”
“으흠.”
서규원이 불편한 침음을 흘렸다.
‘앞으로 번번이 발목을 잡는다.’
그것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내 완성차 업계를 주도하는 중원과 반도다 보니 상대 회사의 정보는 생각보다 빠르게 입수되는 편이었다.
얼마 전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반도 자동차의 마케팅 실무자가 완전히 광인 기획의 편으로 돌아선 것도 모자라 다른 광고회사에 맡겼던 다른 차종 광고도 차근차근 광인으로 넘기려 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고작 모델 한 대 출시하면서 펼친 캠페인으로 이 정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제2, 제3의 공격이 이어진다면?
서규원은 머리를 휘저어 자꾸만 떠오르려는 암울한 미래를 지워버렸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중원 회장님께서도 황 대표님과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황재평이 짝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서규원과 김창국을 번갈아 보았다.
“우린 한편인 겁니다.”
* * *
그 시각 광인 기획.
난 방금 전 전달된 차혜민 본부장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채였다.
“네? 한 달 반이나요?”
“그래.”
들었던 말이 재확인되었다. 경하나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우와…… 미국, 아메리카, 기회의 땅…….”
마치 꿈을 꾸듯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말, 난 잘못한 부분을 바로잡았다.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냐? 미국 기회의 땅 아니야. 자동차 메이커들이 피 터지게 경쟁하는 곳이라고.”
꿈에서 강제로 현실로 끌려 나온 사람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그런 나와 경하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차혜민.
“듣자 하니 김형준 부회장이 너희 둘한테 약속한 게 있었다면서?”
“아…….”
그제야 기억났다. 광고회사 K 이야기 쫑파티가 끝나고 나오는 길 나와 경하나를 찾아와 그가 했던 말.
‘만약 이번에 광고 잘 나오면 말입니다. 두 분께 마땅한 보상을 드리도록 하죠.’
광고 계약이 성사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던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린 성공적으로 반도의 신모델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김형준은 약속을 지켰다.
“나 지금 너무 설레요. 미국 여행이라니.”
하지만 김형준은 보상만 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난 다시 한번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았다.
“정확히는 디트로이트 모터쇼 참관이야. 그리고 여행 아니야. 거기 가면 반도 자동차 미국지사 가서 또 광고 만들어야 돼.”
찌릿.
난 싸울 뜻이 없다는 표시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김형준은 나와 경하나를 반도 자동차 미국지사로 파견해 줄 것을 청해왔다. 당연하지만 일체의 경비는 반도에서 부담, 그곳에서 우린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참석할 것이고 현지의 상황을 파악해 반도 자동차 미국지사와 함께 현지에 내보낼 광고를 만드는 데 조력해야 한다.
나 역시 설레지만 문제는 시간. 팀에서 핵심 실무를 맡았던 둘이 한 달 반이나 회사를 비워야 한다.
“팀장님.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
강미희가 걱정 말라는 듯 밝게 웃는다.
“용재도 있고 신입사원 삼인방도 있으니까.”
고개를 돌렸다. 입사한 지 이제 한 달 넘었지만 실전 경험을 하며 조금 든든해진 햇병아리 셋이 신뢰의 시선을 보내온다.
“한 달 반, 길긴 해도 우리 회사로서도 기회야. 앞으로 반도 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하고 손잡으려면 우리 카피라이터들도 해외 경험 쌓는 게 좋아.”
차혜민이 들어 올린 손으로 나와 경하나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니까 회사 걱정 말고 잘 다녀와.”
* * *
“뭐? 한 달 반?”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식사자리. 안주미가 놀란 눈을 크게 키운다.
“진짜야?”
“그럼 진짜지.”
난 보란 듯 가슴을 활짝 폈다. 봐라 이 오라버니께서 미국 땅까지 진출하신단 말이다.
“누구랑 같이 가니? 아니면 혼자 가는 거야?”
마마께선 자식이 걱정인 모양.
“걱정 마세요. 회사 직원하고 둘이 가요. 그리고 놀러 가는 거 아니고 미국 가서도 한국 사람들하고 같이 일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다만.”
“회사 직원 누구?”
“뭐 말하면 네가 다 아냐?”
“오호. 이것 봐라?”
저 저 날카로운 놈. 밥상머리에서 통찰력 발휘하지 말라고.
“내 알기론 그 팀에 팀장 빼고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별걸 다 아네.”
“하나 언니구나?”
“크흠.”
그런데 이상하다. 오누이의 대화를 듣던 어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하나 씨가 누구야?”
“있어. 그 이쁘고 저번에 오빠랑 영화 보…… 읍!”
난 녀석의 입을 막은 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냥 같이 일하는 직원이에요. 그리고 결혼했어요. 애도 셋인가 있고.”
“어디서 구라를…… 읍!”
“아무튼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들도 노총각인데, 걱정할 일 좀 생겨봤으면 좋겠구나.”
의미심장한 마마의 눈빛,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간 일 때문에 소홀했던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가졌다. 한편 회사에선 꼼꼼하게 인수인계 작업을 했다. 하고 있던 일을 김다미를 비롯한 팀원들에게 넘기고 앞으로 챙겨야 할 부분들을 알려주고.
물론 해야 할 것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미국인데 말도 제대로 못 하면 안 되지.’
오래전 접었던 영어공부도 시작했다. 벼락치기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출국 수속이 완료되고 빠짐없이 짐도 챙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
[신용재 : 잘 다녀와. 우리 걱정 말고.]
[강미희 : 돌아올 때 선물 필히 지참. 100달러 이하는 받지 않겠음.]
[김다미 :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선배님 파이팅.]
난 줄줄이 도착한 팀원들의 송별사를 보며 공항으로 들어섰다.
하나와 만나기로 한 곳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있자니 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전부터 공항만 오면 이랬다. 설레고 기대되고 조금 걱정되고. 여행의 클라이맥스는 출발하기 전 공항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아 참. 이거 여행 아니었지.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경하나가 보였다. 녀석이 카트 실어온 짐을 본 순간 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많기는? 줄이고 줄여서 이 정도인데.”
자기 몸만 한 캐리어를 두 개나 들고 왔다. 저걸 다 어떻게 옮기려고?
“뭐, 알아서 해라.”
그런데 이상하다. 캐리어에 가려 못 봤는데 한 남자가 카트를 밀고 있었던 것. 오빠인가 싶어 살펴보니 중년이다. 난 재빨리 하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버님?”
“그래.”
작게 돌아온 대답. 난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다.
“그래. 자네가 하나랑 같이 미국 가는 동료인가 보구만.”
“네, 맞습니다.”
“허허…….”
‘인상이 참 좋은 사람이다. 하나랑은 성격이 영 딴판이네. 키도 크시고.’
생각하는데 그가 내 팔을 잡아끈다.
“어? 아버님?”
“하나야 잠깐 짐 좀 지키고 있어. 이 친구한테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아 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경하나와 조금 떨어진 곳. 그가 한쪽 팔을 들어 내 어깨를 감는다.
“결혼했나?”
“아니요.”
“여자 친구는?”
“없습니다.”
“으흠.”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골동품을 감별하듯 날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금은 절대 손대지 마. 미국 있는 동안 하나한테 뭔 일 생기면…….”
그가 명함 하나를 쥐여준다. 난 떨리는 눈으로 명함에 적힌 내용을 읽어나갔다.
‘SH상사…… 본부장?’
“미국에 우리 애들 많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