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9화
49.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6)
“누군가 물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광고회사, 미천한 경력의 카피라이터가 뭘 보여줄 수 있겠냐고.”
단상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마케팅팀장 유승국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첫 회의 때 박철환을 대놓고 도발했던 그놈이었다.
‘어이가 없네, 정말.’
그놈이 아니었다면 반도 자동차 부회장까지 참석해 데모 버전을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좋은 말로 기획안을 부탁하고 미안하지만 부족하다는 말로 돌려보내면 그만.
하지만 놈의 도발에 코뿔소가 반응한 게 문제였다.
‘2주 후 데모 버전을 보여주세요.’
박철환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고 덕분에 조용히 마무리될 일이 커져 버렸다.
새로 부임한 광인 기획 출신 이사 때문에 진급 누락의 고배를 마신 그로서는 반가운 상황일 리 없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났을 때 유승국은 박철환을 불렀다.
“야. 너 왜 그랬어?”
“네? 뭘요?”
녀석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무데뽀 성격 덕에 여전히 과장 직급에 머물러 있는 녀석, 하지만 나름 장점이 분명하기에 군말 없이 핵심 실무를 맡겼던 녀석.
함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팀장의 마음 정도는 알아주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역시나 산산이 부서졌다.
“뭐하러 데모 같은걸 만들어 오라고 했냐고. 적당히 기획서 받고 컨펌 안 내주면 끝날걸.”
그때 박철환의 눈빛을 유승국은 똑똑히 기억한다.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표정.
하긴 박철환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언제나 정의로운 척, 깨끗한 척, 공평한 척.
“아니다. 됐다.”
그래서 유승국은 이 모든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 무식한 부하 놈을 멋지게 도발해 이 상황을 만든 저놈은 더더욱.
“그럼 지금부터 광인 기획의 대답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단상에선 안덕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둠에 쌓인 대 회의실에서 데모 버전 상영이 시작되었다.
* * *
[나는 원칙주의자다.]
독백과 함께 화면에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조성환이다. 웹드라마 출연 이후 TV 드라마에 연기파 배우로 주목받고 있는 신인.
[어릴 적부터 난 생각했다. 세상엔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이 있다고.]
화면이 바뀌고 짧은 단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누구보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충실했고.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뒤로한 채 학교 일진에 맞섰으며.
행인의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를 끝까지 쫓아 경찰에 넘기고 모범 시민상을 받았다.
빈 박스가 가득 담긴 할머니의 수레를 밀어준 일은 그에겐 대단한 선행도 아니었다.
단상이 끝나고 주인공의 얼굴에서 시작된 화면은 천천히 멀어진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양옆으로 앉은 주인공의 친구들이 화면에 잡힌다. 이곳은 카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다시 주인공의 독백이 들려온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알게 되었다. 기본을 지키는 게 때론 바보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주인공이 고개를 돌린다. 거기 한 친구가 눈에 들어온다. 온몸에 치렁치렁 장신구를 단 여자다.
[그림 실력 없는 화가.]
그녀가 맞은편 친구에게 호들갑을 떤다.
“진짜 기분 나는 대로 대충 칠해서 넘긴 거거든? 근데 글쎄 그게 너무 심오하다는 거야.”
주인공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거긴 또 다른 친구가 보인다.
[요리 못하는 요리사.]
“사실은 다 본사 공장에서 만들어서 보내주는 거야. 난 데워서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된다니까?”
고개를 돌린다. 또 다른 친구다.
[노력 없이 손에 넣은 부.]
“야. 그러니까 그때 샀어야지. 그랬으면 지금 몇 배인 줄 알아? 으이그 평생 월급 모아봐라.”
주인공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침묵하는 주인공과 달리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친구들, 주인공과 친구들이 극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대화 속 목소리 하나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야 차가 별거야? 차는 패션하고 똑같아. 내가 보기에 예쁘고 끌고 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라고.”
침묵하던 주인공의 관자놀이에 힘줄 하나가 솟아오른다.
“딱 이것만 기억해. 예쁘고, 큼직하고, 어디 세워놔도 꿀리지 않으면 된다고.”
참고 있던 주인공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아니야.”
웃고 떠들던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주인공에게 쏠린다.
“뭐라고?”
“차는…….”
주인공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차는 패션이 아니야. 중요한 건 운전자의 안전이고 그다음이 성능이야.”
멍하니 주인공을 바라보는 친구들.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비웃음이 걸린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이고, 저 고집불통.”
“넌 아직도 그러냐?”
[기본을 지키는 게 바보가 되는 세상이지만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건 있다.]
말을 해봐야 통하지 않는 상황. 주인공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친구들의 고개가 주인공을 따라 움직인다.
“난 그만 간다.”
짧은 인사와 함께 친구들을 뒤로한 채 걸어간다. 멀어지는 주인공의 등 뒤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쟤 무슨 일 한다고 했지?”
“뭐 판다고 한 거 같은데.”
“구멍가게 같은 거겠지.”
“하긴 앞뒤 꽉 막힌 원칙주의자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어.”
“하하.”
쏟아지는 비웃음과 뒷담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주인공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출입문에 닿았을 때였다. 주인공이 손대지 않았지만 문은 스스로 열렸다.
“모실까요?”
“아니, 내가 운전하지.”
정장 차림의 수행비서가 문을 열어준 것.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잠시 후 카페 창밖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서고 운전석에서 내린 또 다른 비서가 주인공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비서에게서 차 키를 받아 드는 주인공. 그가 자동차 너머로 시선을 보내온다.
카페 안 친구들은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보는 중. 다시 독백이 들려온다.
[난 원칙주의자다.]
[세상엔 지켜야 할 기본이 있고 바보가 돼도 그걸 지키는 것만이 정답임을 스스로 증명해왔다.]
[난 매일 시속 100㎞로 달리는 자동차를 탄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안전만이 자동차의 기본이다.]
주인공의 차가 떠났다. 뒤이어 차에 오른 정장의 비서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어느덧 조용해진 카페의 창문 너머, 떠오르는 헤드카피.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 반도 자동차.]
반도 자동차 트루퍼 Demo CF 45초 버전, END.
광고가 끝났다. 여전히 어두운 회의실, 예상했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와. 잘 만들었네.”
“근데 이건 트루퍼 광고가 아닌데?”
“그러네. 트루퍼의 티도 안 나온 거 아냐?”
“……데모라서 그런 건가?”
난 타이밍에 맞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 이번 광고의 헤드카피이자 앞으로 반도 자동차가 추진해야 할 캠페인 모토입니다.”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또 다른 영상이 올라왔다.
“지난 2주의 시간 동안 우린 ‘자동차의 기본’에 대한 다양한 대중의 인식과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변화를 겪는지 확인했습니다.”
영상이 재생되고 화면엔 모델이 아닌 일반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 아래 자막이 떠오른다.
[32세 직장인, 중원 스페로 운전자.]
“이거랑 이거 한번 비교해 보시겠어요?”
인터뷰어가 내민 두 개의 부품, 그건 보령에서 이모부가 내게 보여주었던 부품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좌우 바퀴의 균형을 맞춰주는 등속조인트라는 부품이에요.”
양손에 부품을 들고 살펴보던 여성이 안쪽을 들어 올린다.
“이쪽이 가벼운데요?”
“그쪽이 중원 자동차에서 쓰고 있는 부품입니다.”
인터뷰어가 몇 가지 부품을 건네고 그녀가 들어보고 만져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가볍거나 부실하다고 대답한 것들이 중원 자동차의 것임을 알게 되었고 흥미로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몰랐죠. 근데 알고 나니까 좀 화나네요. 하나라도 망가지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화면이 바뀌고 자동차 수리센터의 직원이 등장한다. 화면 너머 인터뷰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중원과 반도를 비교해 주신다면?”
“이런 거 말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그가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반도는 확실히 고장이 적어요. 사실 예전엔 중원이나 반도나 고장은 비슷했거든요. 근데 몇 년 전부터 우리 센터에 중원 차들 많이 들어와요. 저 처음 일 시작할 땐 고장으로 교체해 본 적이 거의 없던 부품이 고장 나서 들어온단 말이죠.”
말을 멈춘 그가 슬며시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제는 방지턱 넘다가 뒷유리가 펑 터진 차가 한 대 들어왔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글쎄요?”
“프레임 자체가 휜다는 말이에요. 방지턱 넘을 때 엿가락처럼 이렇게.”
그가 양손에 펜을 잡고 휘는 시늉을 한다.
“저희는 좋죠. 수리가 많아지니까. 근데 제 가족이나 아는 사람한테는 중원 차 말려요. 걔들은 기본이 안 됐어, 기본이.”
영상이 끝났다. 조명이 밝혀진 곳에 내게 집중한 수많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기본으로. 아쉽지만 모토도 캠페인이라는 방식도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긴 어려운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번 캠페인을 통해 우리가 알리려는 메시지는 ‘신제품 트루퍼를 사라’가 아닙니다.”
난 화면이 꺼진 단상에 다시 올랐다.
“우린 자동차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을 알리고 그 결과 모든 메이커가 그 점을 새기고 차를 만들도록 하는 데 주력할 겁니다.”
박철환을 바라보았다. 잔뜩 찌푸린 미간, 굳어진 얼굴이어서 속내를 짐작할 순 없었다.
“제가 보는 반도 자동차는 기본에 충실했던 회사입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소비자는 그 점을 모르죠.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확산되면 모두가 반도 자동차의 가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감정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난 조용한 목소리로 시연의 끝을 고했다.
“이상으로 저희가 준비한 데모 시연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용한 마지막 인사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질문 하나 합시다.”
목소리의 주인은 박철환.
“네. 좋습니다.”
“발표 내용을 들어보니 광고에서 상업성을 배제하고 공익 캠페인으로 유도해 당사의 가치를 부각한다는 내용으로 들리는데.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똑똑한 접근법이네요. 브랜드 담당자로서 평가를 해보겠습니다.”
굳어 있던 김철환의 얼굴. 그 얼굴이 스르르 풀어진다.
“만족스럽습니다. 대리님이 왜 유에스피와 키바잉펙터 수정을 얘기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실무자의 평가가 나왔다. 그제야 난 남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아울러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제안?
난 풀었던 긴장을 다시 부여잡으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 듣겠습니다.”
“아니요. 그쪽 말고.”
“네?”
“부회장님. 공식적으로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철환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승낙을 얻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브랜드명을 교체했으면 합니다. 트루퍼, 공격대 또는 침략자라는 뜻이지요. 광인 기획의 CF와 캠페인을 살리기 위해 최종 검토 때 탈락했던 후보, 모델명 프린시플(Principle) 재검토를 부탁드립니다.”
“뭐?”
“재검토?”
“이제 와서? 그게 가능해?”
그의 말이 끝나고 대회의실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출시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지금 브랜드명을 바꾸자는 제안은 그만큼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아이고.”
긴 탄식과 함께 김형준이 이마를 짚었다.
“우리 코뿔소께서 또 급발진하시네.”
웅성거림 따윈 상관없다는 듯 자리에 우뚝 선 박철환과 김형준, 그리고 그 옆에서 똥 씹은 얼굴을 한 유승국을 보며 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