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48화 (48/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8화

48.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5)

“저…… 선배님. 궁금한 게 있는데.”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김다미가 조심스레 묻는다.

“뭔데? 말해봐요.”

“이쪽 일 원래 이렇게 험악해요?”

난 핸들을 잡은 채 피식 웃었다.

“아니. 안 그래요.”

“휴…… 다행이다.”

하긴 사회초년생인 녀석에게 충격이었을 거다. 조금 전 반도 자동차와의 회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멱살 잡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많이 놀랐어요?”

“네. 저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해요.”

김다미가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근데 대리님께서 일부러 도발하는 모양새던데.”

눈치가 쓸 만하다. 그 긴장되고 정신없을 와중에 녀석은 핵심을 정확히 집어냈다.

“잘 봤네. 일부러 그런 거 맞아요.”

“왜 그러신 건지 여쭤봐도 돼요?”

때마침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핸들에서 손을 떼고 김다미를 바라보았다.

“이번 광고 계약 우리 회사한테 엄청 중요한 일이라는 건 들었죠?”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저쪽은 처음부터 우리한테 광고 맡길 생각이 없었거든.”

“네?”

수많은 사람과 차로 북적이는 강남의 도로, 난 전방을 바라본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형철 이사의 얘기는 좋은 힌트였다. 반도 자동차 내에서 이번 계약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힌트. 그걸 통해 이번 광고 계약의 실질 당사자인 실무자들의 속내를 어림짐작해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던 우려는 처음 만났을 때 박철환 과장의 표정을 보는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표정은 공교롭게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KJ식품에서 마케팅 담당자 시절. 정해진 업무만 지켜나가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아주 귀찮은 상황이 생길 때가 있다. 바로 엉뚱한 외주사의 제안을 받아야 할 때였다.

KJ엔 이미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외주사가 즐비한 상태. 하지만 예산을 집행하는 부서에겐 숙명이 하나 있다. 그건 외주사의 서비스를 끊임없이 비교 검증하고 비딩을 통해 경쟁을 붙이는 것. 마케팅 담당자였던 내게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런 이유로 한 달에 두세 번씩 가능성 없는 외주사와 미팅을 해야 했다. KJ라는 대어와의 계약은 엄청난 메리트였기에 그들 대부분은 미팅에 정성을 쏟았고 진심으로 대했다.

하지만 결론이 뒤바뀐 적은 내가 일한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가능성 없는 회사, 그럼에도 검토해야 하는 제안, 그때 난 정확히 박철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박 과장은 속내를 숨기지 않는 스타일.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를 알고 있으니 뻔한 미팅 대신 도발을 선택했던 것.

“안 그랬으면 좋은 말만 듣다 끝났을 거야. 어쨌든 광고를 보여줄 기회는 생겼잖아?”

이야기를 들은 김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섭지 않으셨어요? 그 과장님 너무 무섭던데.”

“무서웠지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량의 대열에 맞춰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

“근데 겁낼 필요 없어요. 계약이 성사되기 전엔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싸움은 안 나요. 그냥 계약을 파기하면 끝나는 거니까.”

“아…….”

녀석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거래가 성사된 이후예요. 그때 문제가 생기면 싸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난 긴장한 녀석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소송이 오갈 수도 있으니까.”

놀란 두 눈이 후욱 커지고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다.

‘너무 겁을 줬나?’

묘한 매력을 가진 녀석이다. 리액션이 풍부하면서도 이질감이 없어 말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오버하게 만드는 그런 류의 매력.

“대단하세요. 선배님.”

바로 이런 류의 맞장구 말이다.

“늘 위험을 무릅쓰고 광고를 만들고 계셨던 거였군요?”

“크흠.”

난 쩝쩝 입맛을 다시며 운전에 집중했다.

* * *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강 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광고주와 마찰이 있었다는 부분에서 놀란 강미희는 데모 광고를 보여줘야 한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팀장이 차혜민 본부장에게 보고를 했고 잠시 후 기획본부 전체회의가 열렸다.

“데모라고 우습게 보면 안 돼. 진짜 광고 만드는 것처럼 기획본부 전체가 협조해 줘.”

본부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명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난 곧바로 광고 기획 구상에 착수했다.

지난 보령에서의 휴가를 통해 머릿속엔 반도 자동차에 걸맞은 이미지가 완성되어 있는 상태. 그걸 통해 최적의 광고 스토리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광고 기획이 완성되었고 기획 1팀 회의를 거처 만장일치로 추진이 결정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기획 2팀이 그래픽 작업에 착수했다. 강미희는 스튜디오 판타지아와 제작 협의를 시작했고 데모 버전에 출연할 주연 배우로 양떼목장 4인방이 확정되었다.

지난 광고회사 K 이야기로 지방생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어엿한 연기자로서 자신들의 스케줄을 소화하던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광고의 카피라이터가 나라는 말에 녀석들은 흔쾌히 출연을 받아들였다.

촬영 장소가 섭외되고 촬영일이 확정되었다. 판타지아는 건네받은 콘티를 참고해 대본과 추가 배우 섭외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데포 촬영 이틀 전. 난 햇병아리 신입사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을이 찾아온 도심을 헤매고 있었다.

“이번엔 누가 할까? 병철이가 할래?”

긴장된 표정으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하병철.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 좋아.”

난 녀석에게 준비된 자료와 비교를 위해 준비한 물건을 담은 가방을 내밀었다.

“명심해. 촬영 전에 무조건 동의부터 구해야 해. 정중하고 친절하게. 알겠지?”

가방을 든 하병철, 마운트에 장착된 촬영용 카메라를 받아 든 민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출동.”

다짐을 하듯 크게 한숨을 내쉰 두 녀석이 쭈뼛쭈뼛 상대에게 다가간다.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던 30대로 보이는 여성. 오늘의 타깃이다. 찌푸린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남자를 바라보는데 하병철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희는 광인 기획이라는 광고회사에서 나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긴장으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상대의 시간을 빼앗는 일인데 저런 목소리여선 틀렸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타깃의 여성이 빙긋 웃는다.

“광고요?”

의외로 선선한 반응에 하병철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실렸다.

“네. 어디 내보내고 그런 건 아니고, 본 촬영 전에 데모 버전 찍고 있거든요.”

“아하.”

그녀가 호기심을 보인다. 때를 놓치지 않고 민광준이 끼어들었다.

“작지만 출연비랑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겠어요?”

“재미있겠네. 여기서 하나요?”

“네. 그러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두 녀석이 열심히 고개를 숙인다. 하병철이 자료를 준비하고 민광준이 카메라를 켜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성공인가 보다.”

내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쉰 김다미가 중얼거렸다.

“으이그, 모질이들. 긴장하지 말라니까.”

인터뷰 현장에선 하병철이 서류를 흘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는 엉망으로 흩어졌고 그걸 보던 타깃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뭐, 저게 나름 통하나 본데?”

“운도 좋네.”

우린 아침부터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인터뷰를 따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다미가 인터뷰를 맡아 진행했다.

일하는 걸 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김다미 녀석 제법이다. 낯선 상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또박또박 정해진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때때로 의도치 않았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녀석이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간 동기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카피라이터니까 매일 사무실에 앉아서 카피나 만들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엄청 스펙타클하네요. 광고주랑 막 기 싸움하고 모르는 사람한테 카메라 들이대고. 참, 모레 촬영도 엄청 기대돼요. 데모지만 처음 찍는 광고라 밤에 잠도 잘 안 오더라고요.”

그러며 빙긋 웃는다.

“사실 회사 지원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거든요. 부모님께서 중소기업 가는 거 아니라고…… 어머. 죄송해요.”

난 휘휘 손을 저었다. 어린 자식이 처음으로 가는 직장. 규모 같은걸 따지지 않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김다미의 부모님처럼 우리 마마도 그 문제로 많이 반발하셨으니까.

“괜찮아. 나도 그랬는걸, 뭐.”

“아……. 아무튼 저 이 일 천직 같아요.”

“흠. 천직이라.”

한 번에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장장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았고 뒤늦게 천직을 찾아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

“잘됐다 정말.”

“그렇죠?”

이제 고작 스물다섯. 웃으며 한 방에 천직을 찾았다고 말하는 이 녀석의 미래가 문득 굉장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참, 다미야.”

“네, 선배님.”

아직은 더위가 남아 있는 9월 말. 오랫동안 밖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제법 힘이 들었다. 목도 많이 타고.

“마실 것 좀 사 올래?”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쉽게 구경하지 못하는 카드를 본 녀석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와. 이거 팀장님 카드 아니에요?”

“맞아.”

“비싼 걸로 사도 돼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네, 알겠습니다.”

어설픈 거수경례와 함께 녀석이 멀어진다.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인터뷰가 한창인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 진짜?”

앳된 사회초년생들의 풋풋함에 매료된 오늘의 타깃. 난 팔짱을 낀 채 현장을 주시했다.

* * *

주말도 반납한 채 활활 불태웠던 2주의 시간이 지났다. 그 결과 우린 원했던 결과물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편집을 마친 이미래 팀장은 말했다.

‘이거 이대로 내보내도 되겠는데?’

빈말이 아니었다. 회사가 위기라는 인식은 광인 기획 직원 모두에게 공유된 것이었고 그 결과 모두가 한 몸처럼 필사적인 협조를 해주었다.

스튜디오 판타지아와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 판타지아는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영상보다 완성도 높은 영상을 담아냈고 어느새 4인방의 에이스 자리를 꿰차게 된 조성환은 말 그대로 대배우의 숨겨진 포텐셜을 터뜨렸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반도 자동차 대회의실은 긴장감으로 손대면 툭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부회장님 들어오십니다.”

한직원의 안내에 대회의실 모두가 자리에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걸어 들어온다.

김형준,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김형철. 날 향한 시선을 느꼈지만 마주 보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후 광고가 시작된 화면만을 응시한 채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그럼 신모델 트루퍼에 대한 광인 기획 데모 버전 시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이 선언했고,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단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파앗.

회의실 조명이 꺼지고 프로젝터 화면이 떠올랐다. 이어지던 걸음은 단상 앞에서 멈추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한 대회의실, 내 목소리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쏟아지는 조명덕에 참석자들이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가 물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광고회사, 미천한 경력의 카피라이터가 뭘 보여줄 수 있겠냐고.”

박철환 과장이 있는 곳을 똑바로 주시했다. 고요함 속에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제겐 반도가 시장에 보여줘야 할,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특별한 가치가 너무도 생생하게 보입니다.”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얀색으로만 가득했던 화면엔.

10, 9 ,8…….

시연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광인 기획의 대답을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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