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7화
47.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4)
“얘기 들었다. 진급 축하해.”
술잔을 들어 올리며 김형철이 말했다.
“하나한텐 좀 미안하게 됐네. 내가 신경을 못 썼어. 팀장으로 있을 때 좀 더 배려해 줬어야 하는 건데.”
“아이고, 됐네요.”
녀석이 휘휘 손을 저었다.
“얘가 특출난 거죠. 제가 못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린다.
“이사님 얘기나 좀 들려주세요. 거긴 좀 어때요?”
“나?”
“네. 돌아간 탕아잖아요. 많이들 반겨주시던가요?”
그가 말없이 술잔을 내민다. 공중에서 잔들이 부딪치고 단숨에 잔을 비워내는 김형철.
“아니, 전혀.”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들 많이 벙 쪘나 보더라. 저 인간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가 생각하는 것 같고 또 나 때문에 진급 밀린 놈들도 있어서 불편해하는 거 같아.”
“으음.”
의외였다. 그래도 회장 장남인데 속으로는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반가운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 반대라니.
“차기 회장 벌써 결정 났잖아. 그 옆자리가 치열한데 나 때문에 한자리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의 우울한 표정이 눈에 밟힌다.
“처음이라 그렇겠죠. 일하다 보면 직원들 생각도 바뀔 겁니다.”
피식.
그가 쓰게 웃는다.
“야. 솔직히 말해서 나 능력 있는 사람 아냐. 광인에서 팀장 달았던 것도 회사 성장기에 입사해서 그런 거지, 미희나 용재 너희 같은 애들하고 같이 회사생활 시작했으면 언감생심 팀장은 꿈도 못 꿨어.”
“그건 아닌데요.”
난 칼같이 그의 자조를 잘라냈다. 조금 놀란 듯 그가 날 바라본다.
“팀장님 특출나지 않은 건 맞아요. 근데 실무자로서의 능력하고 리더로서의 능력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일 년간 그와 생활하면서 느꼈던 부분, 이제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팀장님은 좋은 리더세요. 두 대리님 싸움 봉합한 것도 팀장님이었고 저랑 얘도…….”
경하나를 바라보았다. 계속하라는 듯 녀석이 휘휘 손을 젓는다.
“안 좋았던 거 풀고 이렇게 지내게 된 것도 팀장님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자조로 휩싸였던 그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진다. 그리하여 다시 장난기를 되찾은 얼굴.
“에라 이놈아. 뭔 꿈보다 해석이 좋잖아. 난 개꿈 꿨는데 이놈이 용꿈이라고 하네?”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빈 잔에 술이 채워지고 주거니 받거니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었다.
* * *
“참. 덕모야.”
“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술을 제법 마셨다. 하나는 몇 잔 먹고 옆에 잠들었고 나 역시 얼큰하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중. 김형철 역시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광고 준비는 잘하고 있냐?”
“한창 공부하고 있어요. 차에 대해 잘 모르니까 이것저것 알아야겠다 싶어서.”
“그래. 그래야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실무회의 잡힐 거야. 거기서 컨셉 잡고 일정 얘기하고 그럴 거거든? 근데 너 진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와야 된다?”
“네?”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맥락 없는 경고.
“우리 애들 중에 광인 기획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놈들이 많은가 보더라. 이번 광고 형준이가 밀어붙인 건데 아무래도 나 때문에 그쪽으로 갔다고 오해하는 모양이야.”
“분위기 별로겠네요.”
“아마 많이 안 좋을 거야.”
올라오던 취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특히 이번 광고 컨펌 낼 놈들이 특히 불만이 많아. 그리고 실무자 중에 코뿔소라는 놈이 있거든?”
“코뿔소요?”
“그래, 걔 별명이 그래.”
“…….”
별명이 코뿔소라.
“걔가 많이 삐딱하게 굴 거야. 부회장 지시고 내가 임원이고 간에 실무자가 컨펌 안 내면 억지로 밀기 힘들거든?”
그를 만난 적 없지만 보지 않아도 어떤 캐릭터인지 짐작이 갔다.
“한마디로 걔 설득 못 하면 이번 광고 어려워. 그러니까…….”
조금 꼬인 발음. 들어 올린 손으로 장난스럽게 내 한쪽 볼을 톡톡 두드린다.
“준비 많이 하고 이상한 상황 터져도 당황하지 말고, 너답게 해 안덕모답게.”
볼에 닿는 손이 참 따듯하다. 일 년이나 그와 함께했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 그때 잠들었던 경하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안덕모? 그래 이 나쁜 시키. 혼자 대리 다니까 좋냐? 그래도 난 말 놓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가 동기 먹자고 그랬으니까 안 물러줄 거야.”
횡설수설 튀어나오는 목소리. 그 안에 드러난 속마음에 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허, 얘 취했다. 그만 일어나자.”
“네. 그래야겠네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형철이 외투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이사님.”
“응?”
비틀비틀 걸어가던 그가 뒤돌아보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김형철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다음 날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와 김다미가 한 팀을 이루었고 중원 자동차 때 메인 경험을 가진 강미희 팀장이 붙어주었다.
덕분에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고, 마침내 첫 실무 미팅 날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유승국입니다.”
“박철환입니다.”
반도 자동차 마케팅본부 한편의 회의실에서 우린 처음 광고주와 인사를 나누었다. 첫인상만으로도 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군.’
김형철이 말한 코뿔소. 과연 그는 여차하면 폭발할 것처럼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난 그를 보며 모종의 각오를 굳혔다. 자기 부하직원을 힐끔거리던 유승국이 말했다.
“들으셨겠지만 트루퍼라는 모델입니다. 다음 달 출시 예정이고 2, 30대의 젊은 층을 타깃으로한 소형 SUV입니다. 차량에 대한 정보는 자료를 참고해 주십시오.”
마케팅 1팀장 유승국, 코뿔소와 달리 그는 시종일관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회장님께서는 트루퍼를 파이터 모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원 자동차뿐만 아니라 동급의 수입 차종과도 충분히 경쟁할 만한 스펙과 가격대죠. 광고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만 있다면 소형 SUV 시장을 단숨에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 만한 놈입니다.”
“USP는 나왔습니까?”
유승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 마지막 장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자료를 넘겼다. 거기 트루퍼의 특장점이 세 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안에 담긴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젊음, 가성비,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
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KBF(Key buying factor)을 디자인과 가성비로 잡으셨는데 혹시 트루퍼가 기존 반도 자동차와 달라진 게 있을까요?”
튀어나온 마케팅 용어, 유승국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 마침내 코뿔소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알기론 반도 자동차도 다양한 모델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플랫폼을 쓰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0cc급 SUV라면 중형 세단인 프록시마와 제우스와 같은 2세대 플랫폼을 쓰는 건가요?”
박철환의 몇 차례 눈을 깜빡인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맞습니다. 2세대 플랫폼을 사용합니다.”
“그럼 두 모델과 많은 부품을 공유하겠군요?”
옆자리의 김다미가 불안한 눈으로 나와 박철환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지요.”
박철환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철환이 유승국을 바라본다. 유승국이 고개를 끄덕였고 박철환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해보세요.”
“귀사의 USP에 한 가지 추가했으면 합니다.”
난 반도에서 나누어준 자료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빈칸에 짧은 문장 하나를 적어 넣었다.
[충실한 기본.]
“기본?”
글자를 확인한 박철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맞습니다. USP란 경쟁사 또는 경쟁 모델에 대항할 수 있는 트루퍼만의 무기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자료에 쓰여 있던 기존의 것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젊음은 추상적인 개념이라 경쟁력과 우위를 판단하기 어려워요. 두 번째 가성비는 나름 괜찮습니다. 기본이라는 단어와 함께 강조해서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박철환의 입매가 실시간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지적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디자인, 이 부분은 사실 트루퍼의 USP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있어서 시장은 이미 중원 자동차의 손을 들어준 상태죠. 물론 트루퍼의 디자인이 기존보다 좋아진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드러낼 포인트는 아닙니다.”
설명을 하는 동안 난 펜으로 오와 엑스를 표시하고 있었다. 젊음엔 엑스, 가성비엔 동그라미, 그리고 디자인엔 큼지막한 엑스.
“이번 광고를 준비하면서 반도 자동차에 대한 인식을 살펴봤습니다. 대부분이 충실한 기본기, 그리고 그로 인한 운전자 안전을 장점으로 꼽았더군요.”
어느새 낙서로 지저분해진 자료. 난 그 위에 우선순위를 표시해 나갔다.
“트루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할 건.”
1번은 ‘기본에 충실.’
2번은 ‘가성비.’
나머지 두 개엔 다시 한번 엑스 표시를 더했다.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박철환의 입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런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봐요. 광인 기획 안덕모 씨?”
“네, 과장님.”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그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 그 자체였다. 미안하지만 난 활화산이 잠잠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소리와 함께 그의 상체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이봐요.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USP를 만들었을까? 바퀴 달린 제품 광고라곤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광인 기획도 아는 걸 우리가 놓쳤겠냐는 말이야.”
이제 그의 말은 존대와 반말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정신없이 양측을 바라보던 김다미가 내 팔목을 붙잡는다.
“……대리님!”
난 녀석의 팔을 떼어놓으며 살짝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박철환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아셨겠죠. 그간 수 없는 광고에서 그 점을 어필하려 노력도 하셨을 겁니다. 근데 잘 안됐겠죠.”
“……이봐요. 안 대리님.”
참다못한 유승국 팀장도 끼어들었다.
“실례가 될 거라고 했으니 하던 얘기만 마저 하겠습니다.”
오직 박철환만을 바라본 채 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걸 살리는 게 카피라이터의 능력입니다. 제가 한번 살려보겠습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코뿔소의 얼굴.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 터졌다.
“푸하하하.”
코뿔소가 폭소를 터뜨린 것. 눈물까지 훔쳐내며 웃던 그의 입술은 잠시 후 열렸다.
“보면 볼수록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좋아요. 그쪽이 먼저 실례를 했으니까 우리도 실례 한번 합시다.”
정작 그때의 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낸 후였다.
“2주의 시간을 드리죠. 그때 기획안 말고 데모(Demo) 버전을 보여주세요. 물론 제작비는 저희 쪽에서 부담합니다.”
진짜 광고는 아니지만 모델이 출연해 진짜로 촬영할 광고를 그대로 담아내는 데모 버전.
“그 자리에서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신 그놈의 USP를 어떤 식으로 살리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걱정 마세요. 평가는 공정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에 안덕모 씨가 말만 앞선 허풍쟁이라면.”
그의 입술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
“광인 기획, 광고에서 손 떼는 걸로 합시다?”
어느샌가 내 팔을 부여잡은 김다미의 손.
“좋습니다.”
돌아간 대답에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