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6화
46. 당신을 위해 다시 기본으로(3)
“나 참 기가 막혀서.”
반도 자동차 마케팅 본부. 박 과장이 투덜거렸다. 해병대 스타일로 짧게 잘라 세운 헤어스타일. 어디 하나 얇은 곳이 없는 듬직한 덩치. 그 때문에 박 과장을 처음 보는 사람도 그의 스타일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곤 한다.
“왜 또 그래?”
게다가 목소리 역시 우렁차다. 결국 파티션 너머 팀장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아요. 광인 기획? 음료수 광고 만들던 회사한테 맡긴다는 게 이해가 됩니까?”
“야, 인마. 목소리 낮춰.”
그가 사무실 한편 임원실을 살폈다. 얼마 전 그곳엔 새로운 주인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 새로운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케팅 본부 직원들은 젊은 나이에 이사로 영입된 그의 정체를 무척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안다.
새로운 이사는 회장의 장남, 20년 전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인물이며 부회장인 동생을 도와 3세 경영의 핵심 조력자가 될 김형철이었다.
“제가 못 할 말 했습니까?”
하지만 박 과장은 들으려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유 팀장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박 과장의 말에 그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광고회사 팀장 경력으로 반도의 마케팅 본부를 책임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때문에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직원들은 이번 인사를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낙하산 인사라는 비아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유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박 과장아.”
“아 네네.”
잠시 후 자리한 회의실.
“상황이 그렇잖아요. 주원에서 컨셉 다 잡고 콘티 만들기 시작하는 타이밍이었단 말이에요. 주원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된 거죠.”
박 과장이 투덜댄 이유였다.
반도 자동차는 신모델 출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늘 허리를 맡아줄 라인업이 약하다는 평가를 뒤집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중원 자동차의 벨로프와 경쟁 모델인 2000cc급 소형 SUV, 모델명 트루퍼.
오랜 시간 공들인 만큼 사전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약점으로 거론되던 디자인도 호평을 받았고 성능과 사양 모두 벨로프 대비 우위로 평가되어 이번에야말로 해볼 만하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출시 일정이 확정되었고 임직원 모두가 엄청난 기대감을 키워나갔다. 회장은 신년사에서 [Fighter Model]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건 중원과의 정면 승부를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십 년 동안 열세를 뒤집을 비밀 병기, 반도 전 직원은 출시 일정에 맞춰 모든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마케팅 본부도 마찬가지.
모델 USP 개발과 동시에 광고 사전 준비에 착수했다. 반도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주원 기획을 파트너로 선정하고 신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출시 일정에 맞춘 광고 제작에 시동을 걸고 있던 상황이었다.
“웬만하면 주원 애들도 우리한테 이렇게까지 반발 안 해요. 하다못해 기계 냄새라도 나는 광고를 찍어본 애들이어야 걔들이 납득을 하죠. 근데 광인 기획? 솔직히 자동차 광고 만들 급이 안 되잖아요.”
그건 박 과장만의 불만은 아니었다. 유 팀장 역시 같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처럼 드러내 놓고 투덜대지 않을 뿐 지금 상황이 퍽 유쾌하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근데 뭐 어쩌겠어? 신임 이사님 전 직장이라잖아.”
“하! 진짜.”
열이 뻗치는지 박 과장은 손으로 책상을 탕탕 내려쳤다.
“이사도 낙하산, 외주사도 낙하산! 두고 보세요, 저 이 일 그냥 안 넘어갑니다.”
유 팀장은 생각했다. 우직한 이 녀석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자신의 부하가 선봉장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큰 덩치다운 과격함. 직진밖에 몰라 코뿔소라는 별명을 가진 이 우직한 사내야말로 갑작스러운 이사 부임으로 좌절된 자신의 승진을 복수해 줄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진짜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습니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저렇게 말하고 나서 뒤돌아선 적이 없던 사내였기에 유 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 과장아. 그럼 이렇게 하자.”
조용한 그의 목소리, 박 과장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덕모 왔구나?”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회사. 팀장의 자리에서 날 발견한 강미희 팀장이 반색을 했다.
“잘 쉬었어?”
“네. 푹 쉬고 왔습니다.”
“그래. 좋아 보이네.”
그런데 이상하다. 다섯 개뿐이던 기획 1팀 자리가 조금 더 길어졌다. 책상이 늘고 그 자리에 처음 보는 직원들이 앉아 있다.
“자, 인사부터 하자.”
강미희의 말에 끝자리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선다.
“우리 팀으로 배치된 신입들이야. 어제부터 출근 시작했거든.”
면접 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한 번에 셋이 배정될 줄은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군기 바짝 든 신입들이 고개를 숙였고.
“네.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처음 맞는 후배를 향해 난 얼떨떨한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리님.”
한 녀석의 말에 난 미간을 찌푸렸다.
“네? 대리 아닌데.”
대답은 뒤에 서 있던 강미희가 돌려주었다.
“아니, 대리 맞아.”
“네?”
“어제 대표님이 직접 지시하셨어. 안덕모 너 오늘부터 대리야.”
“아…….”
머리가 멍해지고 남다른 감회가 찾아왔다. 회사를 옮기면서 잃었던 직급, 하지만 고작 1년 만에 되찾은 직급.
“축하해, 안 대리. 이제 같은 대리네?”
뒤늦게 출근한 신용재와 오랜만에 회사 옥상으로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근데 좀 죄송하네요.”
팀의 진급자가 혼자만은 아니었다. 김형철 후임으로 팀장을 맡게 된 강미희도 이번에 과장으로 진급을 했다.
그가 챙겨 온 덤벨을 쭉쭉 들어 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원래 강 팀장님이 나보다 일 년 진급이 빨랐거든. 나는 뭐 내년에 진급하면 되지.”
“그랬군요.”
“나보다 하나가 좀 그렇지.”
이제 보니 그 녀석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출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녀석이 자리에 없던 게 기억난다.
“어제 발표한 거죠?”
“그래. 대표님이 직접 전달하고 가셨어.”
“하나 기분은 좀 어때 보이던가요?”
녀석과 동료로서 처음 인사했던 순간, 그때의 날카로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반가워. 경하나라고 해. 선배라고 불러. 앞으로 잘해보자.
상하가 분명했던 관계. 그러나 지난 일 년, 난 굵직한 광고의 메인을 맡으며 활약했지만 녀석은 그저 보조로 만족해야 했다.
어제 인사 발표, 그건 분명 상하 관계의 반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녀석 입장에선 여러모로 불쾌할 수 있는 상황.
“뭐. 좋진 않았지.”
신용재의 입에서 우려했던 대답이 나왔다. 대답을 듣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뭐 하려고?”
“전화요.”
“하나한테?”
“네.”
지난 일 년 누가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냐고 묻는다면 난 고민 없이 녀석을 꼽을 것이다. 승진으로 인해 우군을 잃게 된다면, 그런 승진은 내겐 의미가 없다.
“그럴 필요 없어.”
핸드폰 액정을 누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신용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였다.
“삐져서 안 나온 거 아냐.”
“네 그럼?”
“어제 일 끝나고 하나랑 술 한잔했거든?”
응? 언제 신 대리랑 하나가 술 한잔하는 사이가 된 거지?
“자기 입으로 그러더만. 네가 잘난 놈인 거지 자기가 못한 건 아니라고. 내 생각도 그렇다고 말해줬어.”
“아.”
“오히려 네가 있어서 자극이 된대. 오늘은 아주식품에 미팅 때문에 그쪽으로 출근한 거야.”
정말일까? 그렇게 속 깊은 놈이었던가?
신용재의 말을 들었지만 의구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신입 시절 뭘 해야 할지 몰라 빈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게 생각나 신입사원들에게 공부할 걸 던져주고 있는데 회의를 마친 경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야. 안덕모.”
날 발견한 녀석이 반갑게 불러준다.
“진급 축하한다? 근데 아직 대리라고 못 불러주겠네. 진급 턱부터 쏴. 그럼 그때부터 불러줄게.”
들려온 건 전과 똑같은 목소리. 그제야 의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진급 턱? 좋지.”
게다가 선선한 반응은 고맙기까지 하다.
“말 나온 김에 오늘 쏠까?”
이런 기분이라면 기둥뿌리를 뽑아 쏘라고 해도 다 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안 돼.”
“왜?”
“오늘 김형철 팀장님, 아니, 이사님이 너랑 나랑 저녁 하자고 하셨거든.”
“우리 둘만?”
“그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없는 동안 한번 왔다 가셨어. 너 돌아오면 같이 저녁 하자 그러셨거든.”
“그랬구나.”
반가운 소리였다. 그가 떠난 지 한 달, 하지만 난 여전히 그의 난 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반도 자동차 광고 건에 대해서도 할 얘기 있으신 거 같더라. 갈 거지?”
“그럼.”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 * *
길지 않았던 하루 일과가 끝났다.
기획 1팀은 선임 직원이 후배들을 하나씩 담당하여 교육시키는 전통이 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기로 했고 내겐 김다미라는 녀석이 할당되었다.
스물다섯. 딱 안주미와 같은 나이. 그래서인지 더 살갑게 대했고 녀석도 시키는 대로 따박따박 움직여 주었다.
하루의 마무리로 강미희 팀장 주재로 팀 회의를 했다. 그리고 회사 사정은 예상대로였다.
“새로 들어온 제작 건은 없어. 지금 담당하는 회사에 최대한 집중해 줘. 용재는 신한, 하나는 아주, 그리고.”
중원이 압력을 행사한 건지, 누구에게 어떤 압력을 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기획 1팀에 추진할만한 새로운 광고 의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건 조심스러운 광고주들의 현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고 또한 이 상황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덕모는 반도 자동차 광고야. 알겠지만 이번 광고 꼭 성사시켜야 돼.”
그래서 강 팀장도 절실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가슴속엔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해답이 반도에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차오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경하나가 말했다.
“자, 가자.”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 식당이었다. 김형철이 팀장이었던 시절, 야근을 위해 가끔 찾았던 바로 그 식당.
저녁 식사를 하긴 조금 이른 시간, 식당은 한산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셨어요?”
난 전처럼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허름한 점퍼 대신 깔끔한 정장, 늘 덥수룩하던 수염은 깔끔하게 잘라냈다. 게다가 머리에 뭘 발랐어?
“와. 보기 좋네요. 딴사람 같아요.”
“누구, 나?”
“네, 팀장님. 진작 그렇게 하고 다니시지.”
그가 피식 웃는다. 귀찮다는 듯 벗은 양복 외투를 의자 한쪽에 던져 놓으며 중얼거린다.
“팀장은 얼어 죽을, 나 니들 광고주거든? 까불지 마라.”
장난스러운 그의 대답. 난 예전처럼 그를 향해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