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43화 (4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3화

43. 불공정의 중심에서 중지를 세워라(6)

“아쉽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갔네요.”

양떼목장 사인방 중 조성환의 눈빛이 활활 불타올랐다.

“이제 저희는 그쪽과 한배에 탈 수 없습니다.”

사인방 모두 수준급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특히 저 녀석, 조성환의 연기는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사실 사인방 중 조성환은 가장 주목받지 못하던 지망생이었다. 외모와 피지컬은 허윤태에게 밀렸고 친화력도 쾌활한 성격도 보여주지 못했던 녀석이다.

하지만 존재감 없이 조용하던 녀석이 연기만 시작하면 촬영장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녀석과 연기하는 사람은 이상한 영향을 받는다.

“하아…… 너 설마 지금 이것도 다 기록하고 있는 거야?”

서지수의 대사. 그날 양떼목장에서 눈 덮인 촬영장으로 달려들어 가던 하얀 패딩은 어느새 완벽한 연기자로 변해 있었다.

서지수는 네 사람 중 가장 연기가 서툴렀던 녀석이다. 자기 연기력이 서투르다는 걸 알았기에 평면적인 인물만 연기하길 원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를 통해 서지수는 어느새 인물의 심리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입체적인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바로 조성환의 마력이다. 동료를 자극하고 내면 연기로 끌어들이는 특이한 영향력.

돌아간 카메라가 한 사람에게 향했다. 그리하여 앵글에 들어온 얼굴. 우리 드라마를 화제작에 올려놓은 일등공신 허윤태. 회가 거듭될 때마다 팬이 두 배로 늘어나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 K.

“아니요.”

윤태의 입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간다.

“드라마 시나리오 쓰는데요?”

“컷! 오케이!”

NG 한번 없이 씬이 끝났다. 표정을 풀고 대기석으로 돌아오는 배우들을 보며 판타지아 촬영감독이 기분 좋게 웃는다.

“진짜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요.”

“허윤태요?”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윤태도 대단하긴 하죠. 이번 작품 끝나면 단숨에 유명인 될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매니저에게 들었다. 벌써 여기저기서 모델 제의가 들어온다고.

“크게 될 떡잎이죠. 근데 이쪽 일 하다 보면 윤태 같은 애는 종종 보는 봐요. 제가 물건이라 한 애는 쟤예요.”

그가 손가락을 들었다.

“이일 20년 만에 저런 놈 처음 봐요. 제가 웬만해선 놀란 적이 없는데 저놈 대사 칠 땐 진짜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거긴 대본을 들여다보며 대사를 중얼대는 조성환이 있었다.

“저놈 엄청난 거목이 될 겁니다.”

녀석을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대본에서 시선을 떼어내는 녀석. 눈이 마주쳤고 놀란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전부터 형님 형님 하며 따르던 놈들이었다. 이번 작품에 캐스팅된 후로 녀석들은 이제 나만 보면 저렇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신호로 휘휘 손을 저었다. 그때였다.

“야! 안덕모.”

고개를 돌렸다. 경하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오는 중.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다섯 통이나 찍혀 있는 경하나의 부재 전화.

“촬영 방해될까 봐 무음으로 해놨네.”

난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근데 왜?”

“팀장님이 빨리 들어오래.”

“둘 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웅.

회사로 향하는 차 안.

난 운전대를 잡은 경하나에게 물었다.

“넌 알았냐?”

“뭘?”

“우리 팀장님.”

“알았겠냐?”

녀석이 익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강 대리님이랑 신 대리님도 몰랐대. 분위기 보니까 이 팀장님은 알고 계셨던 것 같더라.”

“회사 직원들 가족 때문에 여러 번 놀라네. 참 이상한 회사야.”

“……솔직히 난 아직도 못 믿겠어.”

그건 나도 동감이다.

“어떻게 팀장님이 김석만 회장 장남일 수가 있냐고.”

차혜민 본부장의 사촌 동생 서이준. 그래 그거야 그럴 수 있다. 본부장님도 빼어난 미인이고 서이준 또한 그러니 가족으로 묶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김형철 팀장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때 인상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면도를 안 해 삐죽삐죽 튀어나온 수염. 꼬질꼬질 먼지 묻은 점퍼에 빨아는 입는 건가 싶었던 물 빠진 청바지. 주머니 위로 살짝 삐져나왔던 담뱃갑까지.

그의 첫인상은 완벽했다.

처음엔 기획사 직원이라고 생각도 못 했고 그냥 다른 일 때문에 사무실 들른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김형철이 재벌가의 장남이라니.

“거 상황 한번 묘하게 흘러가네.”

중원 자동차 광고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의도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라마 대박, 반도 자동차의 등장, 게다가 숨겨진 재벌의 자식까지.

경하나가 피식 웃었다.

“완전 막장 드라마지?”

“그래. 동감이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미래한테 얘기는 다 들었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기획 1팀. 김형철은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벼웠다.

“많이 놀랐냐?”

“좀 많이요.”

강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철이 들어오기 전 이미래 팀장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제야 우린 그가 재벌가의 자제이면서 작은 광고회사의 팀장으로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버겁다. 그의 평소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진짜 팀장님이 재벌?”

“그래. 맞아.”

김형철이 씩 웃었다.

그는 김석만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막대한 부를 지켜온 집안이었고 진정한 금수저로 태어난 그는 재벌 3세로 반도 자동차를 이어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부친 김석만의 욕심은 대단했다. 반도 자동차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대에 세계적인 회사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형철에게 막중한 책임이 지워졌고 그래서 그의 유년기는 모질고도 험난했다.

눈뜨자마자 끝없는 교육이 이어졌다.

인문, 회계, 공학, 경영.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도 높은 교육에 김형철은 감정이 배제된 기계처럼 살아야 했다.

억눌리고 말라비틀어진 어린 시절. 결정적 분기점은 대학생이 된 후 찾아왔다.

또래 동기들은 자유로웠고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일구고 있었으며 그래서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내 삶의 주인은 나.’

범인에겐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이 김형철에겐 거대한 충격이었다.

엇나감, 저항, 그리고 도피.

김형철은 저항했다. 경영자의 삶이 아닌, 대를 이어온 가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도망치고 비서들에게 끌려오는 연속이었다. 하지만 며칠도 되지 않아 그는 도피했고 잠적했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제주도 끝자락 민박집에서 찾아내 끌려온 자식을 바라보던 김석만도 결국 생각을 고쳐먹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한 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기간을 정해. 5년이면 되겠니?”

“아니요.”

어리고 철없다고 생각했던 김형철의 눈은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20년입니다.”

기계로 살아온 지난 세월. 그의 머릿속에 20년이라는 기간이 떠오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20년, 후계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 공백. 하지만 그 역시 아버지였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김형철은 재벌과 경영자의 자리를 훌훌 내던지고 범인의 삶을 찾았다. 오직 자신의 힘과 의지로 살아가기 위해 내디딘 첫 번째 걸음이었다.

“근데 올해로 딱 20년이 지났거든.”

장남이 자리를 비우자 차남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20년간 자유의 대가로 아버지가 요구한 건 하나.

‘반드시 회사로 돌아오라. 돌아와서 동생을 도우라.’

“김형준 멍청한 자식. 회장 자리 앉을 놈이 형제 같은 건 쳐내는 게 상식 아냐? 역사 공부도 안 했나? 그 주변 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인지.”

김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김형철은 생각했다. 20년 후 동생이 자신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아버지가 찾더라도 김형준이 막을 것이며 김형준이 찾더라도 녀석의 심복들이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왕이 등장하면 가장 먼저 있어왔던 것이 그의 형제들을 제거하는 것.

기업의 세계 역시 그러할 거라고 김형철은 생각했다. 하지만 동생인 김형준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팀장님.”

끼어든 신용재. 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럼 설마?”

“맞아. 이제 돌아가야 해. 그래서 나 회사 그만둬.”

“…….”

무거워진 분위기. 김형철이 애써 웃어 보였다.

“뭐? 왜 이 자식들아! 축하해 줘야지. 코딱지만 한 광고 회사에서 대기업 임원으로 가는 거야! 연봉도 억이 넘는데.”

목소리는 밝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고개 숙인 팀원들을 한 번씩 바라본 김형철이 창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기랄…….”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차기 팀장은 미희야. 자리 잡을 수 있게 니들이 많이 도와줘. 그리고 인원 충원하기로 했어. 안 그래도 사람 없어서 고생했잖아. 한 세 명 정도 충원될 거야.”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반도에서 우리한테 광고 맡길 생각이더라. 하긴 그럴 만해. 우리 때문에 지들 원수인 중원 대차게 까이고 있으니까. 잘됐어. 안 그래도 우리한테 광고 맡길 곳도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고맙지. 형준이가 그러는데 메인은 덕모가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덕모가 메인 잡고 너희들이 좀 도와줘. 나 빠지면 자리 좀 정리된 후에 계약하자고 했으니까 한 달 정도 시간 있을 거야. 이번 주에 웹드라마 정리되지? 다들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갔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씩 다녀와. 참 혹시 나 따라서 반도 가고 싶은 사람 있어? 있으면 조용히 말해. 백 퍼센트 된다고는 못해도 알아봐 줄 수는 있으니까. 물론 가서 광고 찍는 일은 못 하겠지. 마케팅이나 홍보 쪽 자리로.”

“팀장님!”

경하나의 외침. 감정을 쏟아내듯 와다다다 이어지던 김형철의 말은 그제야 끊어졌다.

“안 가시면…… 안돼요?”

뒤돌아선 김형철. 그의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 * *

모든 상황은 순조로웠다. 광고회사 K 이야기의 최종편인 10화가 업로드된 그 날.

[공정거래위원회, 중원 자동차 불공정 거래 조사 시작.]

[JW애드 수상한 자금흐름 포착. 내부 거래 통한 비자금 조성 의혹.]

[긴급 진화 나선 중원 자동차. 관련 내부자 징벌적 인사 조치 및 재발 방지 약속.]

사태의 결말을 알리는 뉴스들이 포탈의 메인을 장식했다.

이틀 후 드라마 쫑파티가 열렸다. 진광인 대표가 직접 커다란 호프집을 빌렸고 우리와 스튜디오 판타지아 스태프들, 양떼목장 사인방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부담 없이 웃고 즐기며 짧지 않았던 여정의 끝을 자축했다.

“하하하! 정말요?”

신용재는 입술이 귀에 걸릴 만큼 웃고 있었다.

“어머나, 미쳤나 봐!”

강미희가 조성환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두 대리는 웃음으로 빈자리를 잊으려 하고 있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아직 경력이 짧아서 그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두 대리가 고개를 돌린다.

“덕모 어디 가?”

“컨디션이 별로라. 먼저 들어가 보려구요.”

“참, 내일부터 휴가지?”

김형철의 부재로 팀장 역할을 맡게 된 강미희.

“네, 팀장님.”

되돌아간 말, 강미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럼 잘 쉬고.”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침을 챙겨 일어섰다. 뒤통수에서는 끈적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차피 여기저기 인사할 분위기는 아니었고 최대한 조용히 걸어 나오는데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야, 같이 가.”

언제 짐 챙겨 나왔는지 뒤따라 나온 경하나.

“집 방향도 다른데 뭘 같이 가?”

“아, 진짜 하나 있는 동기 놈이 더럽게 의리 없네.”

피식.

문득, 지난 며칠 웃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마침 보이는 분식집을 가리켰다.

“배 안 고프냐? 떡볶이 어때?”

“오, 좋지.”

경하나가 밝게 웃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고.

“안덕모 씨, 경하나 씨?”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 맞네요! 어떻게 이런 길에서 딱 마주칠 수가 있을까요?”

고작 그 정도 거짓말도 감당 못 해 벌게진 얼굴을 한 반도 자동차 부회장.

“두 분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 한 잔 어떠세요?”

김형준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