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2화
42. 불공정의 중심에서 중지를 세워라(5)
“팀장님! 팀장님!”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기획 2팀장 이미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회의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손짓하는 자신의 팀원들을.
“니들 거기서 뭐 하냐?”
“쉬잇.”
오현미 과장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그란 안경 너머 이미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왔어요. 왔어.”
“누가?”
오 과장이 회의실 안을 가리켰다. 동시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하게 속삭였다.
“중원 자동차요.”
“뭐?”
“전주미 팀장하고 그쪽 이사인 거 같더라고요.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지금 기획 1팀하고 이 안에 있어요.”
“아…….”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중원의 대응은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분위기는 좀 어때?”
이미래는 어느새 팀원들과 똑같이 문에 바짝 붙어 있었다.
“뭐 삭막하죠.”
오현미 과장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렇겠지.”
문에 귀를 붙이며 이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고개를 돌린 서규원 이사 쪽을 힐끔대던 전주미. 역시나 침묵을 깬 건 그녀였다.
“내리세요. 싹 다.”
김형철이 히죽 웃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형철은 상대방 속을 뒤집어 놓는 미소를 퍽 잘 그려내는 재주를 가졌다.
“싫은데요.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아니.”
전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쪽이 대놓고 우리 엿 먹였잖아요! 대원 자동차? 하…… 중원에서 앞글자만 바꿔놓으면 다른 회사가 돼요?”
결국 터졌다. 하긴 지금까지 안 터진 게 장하긴 했다.
타탁.
난 노트북을 두드려 이 상황을 빠르게 기록해 나갔다.
“기업 간 협의는 비밀유지가 생명이에요. 근데 그걸 영상으로 만들어서 퍼뜨려? 당신들 진짜 다 깜빵 가고 싶어?”
전주미가 소리쳤다.
덜그럭.
문밖에서 일어난 작은 소음. 소음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기에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우린 작전대로 광고회사 K 이야기라는 영상을 만들어 너튜브에 배포했다. 유명 배우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만든 드라마도 아니었지만 조회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간 센세이션한 광고를 너튜브에 올려왔던 광인 기획 공식 채널의 구독자는 대략 5만 명. 배포 채널이 그곳뿐이었다면 절대 이만한 파급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인플루언서 박선영. 선영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며 계약 조율 중이던 회사에 이번 일을 알렸다. 회사는 영상을 검토했고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회사 소속 크리에이터들을 움직여 주겠다고 약속한 것.
광고회사 K 이야기는 3화부터 인기 동영상 말석에 이름을 올렸다. 6화가 올라간 오늘은 6편 모두가 나란히 상위권을 차지한 상태.
영상의 인기가 활활 불타오르자 사람들은 영상의 정체를 속속 파악해 내기 시작했다. 누구나 중원을 떠올릴 수 있는 대원이라는 이름.
영상 곳곳에 숨겨놓은 여러 장치들까지.
대중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6화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그중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들을 보며 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중원 자동차 불공정 고발한 거네. 대원 = 중원, TW=JW, 선광 기획=광인 기획. 오케이?]
[지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근데 거기다가 힘없는 회사를 희생자로 세웠어? 더러운 것들.]
[그래 중원 원가 후려치기할 때부터 알아봤다. 아 판사님 저 영상 보고 말한 거 아닙니다.]
영상의 정체를 알아본 대중들은 성난 파도처럼 중원에 들이쳤다. 게시판은 폭발했고 인터넷엔 중원에 대한 비토가 이어졌으며 냄새를 맡은 언론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중원 역시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온라인 대응팀과 법무팀이 움직였고 언론사를 압박하며 사태 진화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불붙은 여론은 꺾일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마케팅 이사와 팀장이 우리 회사를 찾은 것만 봐도 지금 중원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싹 다 불법이에요. 지금 당장 영상 내리고 사과문 올리세요. 안 그러면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 훼손으로 고발할 겁니다.”
“허…….”
김형철이 팔짱을 끼었다.
“하나씩 따져봅시다. 일단 허위사실.”
역시나 새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팀장, 사람 속 긁는 재주도 제법이다.
“우리가 만든 건 웹드라마예요. 드라마는 사실이 아니에요. 허구를 기반으로 한 창작의 산물일 뿐입니다. 거기 어떤 내용을 넣건 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팀장의 말에 강미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영상마다 빠짐없이 넣어놨잖아요. 특정 회사와 무관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신용재가 끼어들었다.
“말하자면 허위사실 유포는 맞네요. 드라마가 허위지 진실은 아니니까.”
벌겋게 달아오르는 전주미의 얼굴. 떨리는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마땅한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타닥.
난 회의실에 오가는 대사와 저들의 반응을 빠르게 기록해 나갔다. 그때 김형철이 말을 이었다.
“드라마가 허위라고 고소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상황이 참 재미있겠다, 그렇죠?”
“……당신들 지금 사람 놀려?”
마침내 전 팀장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리다니요? 정확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뿐이죠. 그리고 계속 따져봅시다.”
김형철의 무심한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명예 훼손. 구체적으로 어떤 명예가 어떻게 훼손됐다는 말씀이신지?”
“우리하고 JW…….”
흘러나오던 단어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긴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거다.
영상에 담아냈던 던 자회사와의 불공정한 일감 몰아주기에 했던 내용이었으니까.
자회사와 붙어먹은 게 사실이라면 명예가 될 수 없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애초에 그들이 우리에게 찾아와 소리를 지를 이유 자체가 없다.
말문이 막힌 전주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김형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좋습니다. 팀장님 말대로 우리가 만든 영상이 진짜 있었던 일을 담은 거라 칩시다.”
슥.
김형철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긴 사진 한 장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의 출발, 그 아름다운 첫걸음을 위하여, 벨로프. 중원 자동차.]
그건 JW애드에서 발표한 광고 기획안이었다. 사진의 정체를 알아본 전주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우리 헤드 카피하고 너무 닮은 것 같던데.”
“이…… 이걸 어떻게?”
영문을 모르는 전주미의 눈동자가 떨렸고.
“이런 짓거리를 해놓고 괜찮을 줄 알았습니까? 우리처럼 작은 회사는 당해도 마냥 침묵할 줄 알았냐구요.”
“당신들 미쳤어? 회사 문 닫고 싶어? 우리 중원이야. 우리가 움직이면 앞으로 당신들 두 번 다시 광고 못 찍게 되는 수가 있어.”
“그래보시든지.”
이제 더 이상 이성적인 대화는 불가능해졌다. 줄곧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서규원 이사.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 팀장, 그만 진정하지.”
“네, 이사님.”
이사의 명에 전주미가 고개를 숙였다.
“김형철 팀장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저희 잘못 인정합니다.”
“…….”
그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우리 전 팀장이 좀 흥분을 했는데. 이렇게 온 건 잘잘못을 따지려던 게 아닙니다. 가능하면 슬기롭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군요. 먼저.”
그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김형철이 조심스레 그걸 받아 들었다.
“이번 광고 귀사에 의뢰하겠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JW애드보다 후한 조건입니다. 물론 추가 조율도 가능하죠.”
팀장의 눈이 후욱 커진다.
“이번 광고가 끝이 아닙니다. 벨로프는 소형 SUV 시장 주력 모델이에요. 해외 광고도 따로 찍을 생각이고 가을과 겨울에 몇 차례 추가 광고도 예정되어 있어요.”
이 모든 일의 시초. 강미희가 열정을 불태웠던 바로 그 광고. 서류는 그 광고에 대한 계약서였다.
“대신 영상 내려주시고 적절한 해명문 올려주세요. 저희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참 대단하시네요.”
계약서를 살피던 김형철이 말했고.
“…….”
분위기를 파악한 서규원이 입을 다물었다.
“협력을 제안하시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와서 광고 계약하자고 하시면 네 좋습니다 할 줄 알았습니까?”
이번 사건에 대한 대표와 차혜민 본부장의 원칙은 확고했다. 부러질지언정 협상은 없다. 그건 광인 직원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번복의 여지는 없다.
“버스 지나갔습니다. 저희는 그쪽과 한배에 탈 생각이 없구요.”
슥.
되돌아온 계약서. 서규원이 침통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았다.
“하아. 정말이지.”
한숨과 함께 전주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내게 향하고 있었다.
“안덕모, 당신…….”
타닥.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설마…… 지금 이것도 다 기록하고 있는 거야?”
“아니요.”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드라마 7편 시나리오 쓰는데요?”
“하하.”
전주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옆의 서규원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 *
“우와.”
중원 자동차는 패퇴했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길 이미래 팀장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형…… 카리스마 쩔던데?”
“나 원래 좀 쩔거든?”
“아니지. 쩔었던 건 담배 냄새고.”
“크흠.”
이미래가 내게 다가온다.
“야, 안덕모. 너도 멋졌어. 시나리오 쓰는데요? 키야!”
그녀가 내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승리를 즐기는 즐거운 분위기 속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가 큰일이네요.”
목소리의 주인은 강미희.
“당한 만큼 갚아주긴 했는데. 이제 저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음…….”
김형철이 까칠한 턱을 슥슥 매만졌다.
“아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 할 거예요. 법적 대응은 어렵겠지만 문제는 방송국이에요. 걔들 보이콧 시작하면 앞으로 진짜 힘들어질 텐데.”
승패를 떠나 현실은 현실이다. 우린 힘없는 기획사고 저쪽은 재계를 움직이는 거물.
광인 기획이 광고주를 엿 먹였다는 소문은 이미 빠르게 퍼지는 중이다. 그걸 알고도 광고를 맡길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을 거다. 시작할 때부터 예견된 씁쓸한 결과물.
“뭐 어쩌겠어? 안 되면 식당 광고라도 만들어야지.”
그래서 김형철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일단의 무리가 사무실로 들어선 건 그때였다. 낯선 이들을 발견한 오현미 과장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안녕하십니까.”
정장 차림의 세 남자. 그중 리더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반도 자동차에서 왔습니다.”
“네? 반도?”
반도 자동차. 중원의 뒤를 이어 국내 2위 완성차 메이커이자 중원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
그리고 오현미는 상대의 정체를 이내 눈치챘다.
“아…… 김형준 부회장?”
“하하. 네.”
“혹시 찾으시는 분이 있으신 건가요?”
김형준. 현 반도 자동차 총수인 김석만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차기 총수로 지목된 김형준 부회장.
어쩔 수 없이 오현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저…… 김형철 팀장님을. 어? 형!”
무리 속에서 김형철을 찾아낸 김형준이 손을 들었고.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김형철의 입에선 너무도 스스럼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상황을 모른 채 사람들의 눈동자만이 정신없이 둘을 오갔고.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될 것 같더라.”
오직 혼자만이 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이미래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