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41화 (41/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1화

41. 불공정의 중심에서 중지를 세워라(4)

“이거…….”

영상이 끝난 화면. 강미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제 얘기네요?”

“그래.”

진심이 담긴 김형철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선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너한테는 트라우마일 수도 있어.”

그제야 하나둘 강미희에게 향하는 시선들.

“하지만 이번 일, 그냥 넘길 생각 없어. 그래서 고민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했어. 이게 그 결과물이야.”

멍해 있던 강미희의 얼굴. 그 표정이 조금 뒤틀렸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중원과 벌어질 일, 이렇게 하나씩 영상으로 만들 거야.”

“만들어서 어쩌시게요?”

“알려야지.”

주저 없이 돌아오는 대답.

“조금 전에 온라인하고 회의도 마쳤어. 우리 너튜브 채널 알지? 거기에 올릴 거야.”

“좀 전에 비밀 작전이라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예요.”

신용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덕모 지금 영상 올릴 채널 알아보러 갔어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경하나가 쓰게 웃었다.

“누구겠어요.”

“덕모겠지.”

경하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고개를 숙인 강미희.

“그래, 말해봐.”

아닌 척해도 김형철의 목소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선물 맞아요.”

팀장의 말대로 영상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아침보다 훨씬 좋아졌다고는 해도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영상에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했다.

트라우마도 자기혐오도 결국 내 안에서 나오는 거라고.

영상은 그때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었고 강미희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객관적인 판단은 트라우마보다 강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선물 고마워요.”

김형철이 손을 들었다. 들어 올린 채 올릴 곳을 찾던 그의 손은.

슥.

강미희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근데.”

“어?”

지레 놀란 김형철이 재빨리 손을 치웠다.

“저 모델들 낯이 익은데? 가만 어디서 봤더라?”

“기억 안 나세요?”

대답은 경하나가 해주었다.

“지난겨울 눈 왔을 때.”

“아!”

강미희가 짝 박수를 쳤다.

“그 대관령 꼬맹이들?”

경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광인 기획답게 대응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며칠 전 본부장의 방. 영문을 몰라 하는 김형철에게 난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광고를 만드는 겁니다.”

“광고? 무슨 광고?”

이미래 팀장이 물었고.

“이번 일을 알리는 광고죠.”

멍한 표정의 두 팀장, 차혜민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광고로 위장해 실상을 알리자는 거야?”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30초 내외로 만들어 TV에 나가는 것만이 광고가 아니다. 온라인에는 10분이 넘는 광고도 있고 장편의 스토리를 담아낸 광고도 있다.

“지금까지 중원과 있었던 일. 앞으로 일어날 일. 그걸 광고로 만들어 대중에게 알렸으면 합니다.”

본부장의 입에선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 광고는 광고일 뿐 고발도 뉴스도 아니야. 우리가 어떤 광고를 만들든 중원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뒤늦게 의미를 파악한 두 팀장의 눈이 후욱 커졌다.

“안덕모 계속해 봐.”

본부장의 재촉을 들으며 그때 난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곧 대응안이 결정되었다. 본부장은 대표에게 보고했고 진광인 대표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 그리고 대응 예산을 아끼지 말 것.]

대표의 결정이 떨어지자 광인 기획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두 시간 후 스튜디오 판타지아와 긴급 제작 회의가 열렸다. 상황을 전달받은 판타지아는 마치 자기 일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판타지아의 총력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구성된 제작 라인업.

스토리 구상 및 각본은 기획 1팀.

배우 섭외 및 촬영은 스튜디오 판타지아.

영상 편집은 기획 2팀.

온라인 송출 온라인 영업팀.

그리고 총지휘는 차혜민 본부장.

“근데 문제네. 우리 팀 이런 장편 스토리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대응책으로 장편 광고를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제가 할 줄 아니까요.”

안덕모는 영화에 미쳤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대학교 시절 난 열성적으로 영화 동아리를 이끌었고 내 이름으로 제작된 단편 영화도 세 편이나 가지고 있다.

물론 프로에 비할 바 없는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그동안 만들어온 광고를 장편으로 만들 자신은 얼마든지 있다.

“할 줄 안다고?”

김형철이 놀라 물었고.

“믿고 맡겨주십시오.”

임무를 하달받은 조직들이 움직였고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출연진이 결정되고 촬영일이 확정되었다. 우리 팀은 스토리 구상과 각본 작업에 들어갔고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편당 10분짜리 3편의 대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출력된 대본은 배우들에게 전달되었고 바로 그날 오후.

“하이! 큐!”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당일 완성된 촬영본은 기획 2팀으로 넘어갔다. 이미래가 이끈 기획 2팀은 반나절 만에 첫 편 편집을 끝내는 신기를 펼쳤다.

그리하여 강미희 대리가 출근하겠다고 문자를 보내온 그 날. 우린 완성된 영상이 든 USB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웹드라마를 올려 달라는 거예요?”

다시 돌아온 현실. 안주미와 시선을 주고받던 박선영이 물었다.

“그래. 안 될까?”

“안 되긴요.”

녀석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크리에이터는 늘 컨텐츠에 목말라요. 게다가 이건 퀄리티도 제법이잖아요.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긴 한데…….”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그래서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얼마든지.”

“이거 시리즈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

“주기는요?”

“대략 3, 4일에 하나 정도 나올 것 같네.”

“우와. 그게 가능해요?”

놀랄 만도 하다. 박선영의 말처럼 웹드라마로 제작된 이번 영상은 아마추어 냄새 풀풀 풍기는 그렇고 그런 영상이 아니다. 프로들이 붙고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어낸 완성도 높은 결과물.

먼저 촬영은 TV CF 수준의 영상제작에 도가 튼 스튜디오 판타지아가 맡았다. 영상에 등장하는 모델 역시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대배우는 아니라도 오랜 시간 판타지아와 손발을 맞춰온 전문 배우들.

“업로드 채널은요? 이거 혹시 저한테만 독점 주는 거예요?”

녀석이 은근히 눈을 빛낸다. 어떤 욕심인지는 알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니, 그건 안 돼.”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차 업로드는 우리 너튜브 채널이고 아쉽지만 넌 2차 업로드.”

녀석이 쩝쩝 입맛을 다신다.

“그럼 2차 업로드는 저한테 독점 주세요.”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독점 주시면 회사에 얘기해 볼게요. 회사 크리에이터들 전체 구독자 합하면 천만 명 넘어요. 영상 띄우실 생각이면 이만한 제안 없을 거예요.”

“그건 너희 회사랑 얘기되는 거 봐서.”

“알았어요. 마지막으로 이걸 물어봐야 하는데.”

할 말을 고민하던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거 왜 만든 거예요?”

“흠.”

“보아하니 영상에서 돈 냄새가 풀풀 나던데요? 게다가 시리즈라면서요. 이거 너튜브에 올려봐야 제작비도 못 건지는 거 아시잖아요.”

제법 날카로운 질문.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영상으로 단 한 푼의 수익도 낼 생각이 없어. 너나 너희 회사에도 무상으로 제공할 생각이야.”

“네?”

박선영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주미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돈 들여서 만든 영상을 왜 무료로 풀어?”

“드라마 속 얘기. 진짜 우리 회사 얘기거든.”

난 두 녀석에게 오늘 미팅의 진짜 목적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야.”

* * *

[당신의 출발. 그 아름다운 첫걸음을 위하여, 벨로프. 중원 자동차.]

회의실의 불이 켜졌다. 화면에 떠 있는 기획안의 마지막. JW가 준비해 온 CF 기획안의 헤드카피를 보며 조동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장님 고생하셨어요. 헤드카피 기가 막히게 뽑혔네.”

조동혁의 상사인 전 팀장.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팀장님 덕분이죠.”

“또 그러신다. JW에서 잘 만든 거지 우리가 뭐 한 게 있다고요.”

“하하하.”

광인 기획과 함께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

“참 어디더라? 광인인가 거긴 걱정 안 해도 되는 거겠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들이 먼저 손들고 떠났으니까.”

조동혁은 생각했다. 전주미 팀장도 JW도 참기 힘들 만큼 역겹다고. 지난 한 달, 광인 기획과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첫 번째 피티. 광인 기획의 차석이라던 젊은 대리는 전주미의 융단폭격을 맨몸으로 맞아야 했다. 훌륭한 기획안을 발표하고도 마치 쓰레기를 본 듯한 동료들의 질타에 조동혁은 얼굴조차 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의도는 통했다. 전주미는 2주의 시간을 더 준다고 했지만 광인 기획은 다음 광고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광인 기획 기획 1팀 직원들과 며칠에 한 번씩 미팅을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결과물은 없었고 그들은 그저 준비 중이라는 답변만을 들려주었다.

‘내버려 둬. 겁나서 두 번은 못 하는 거겠지.”

조동혁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발표 결과 역시 첫 번째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신차 벨로프의 출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JW는 기획안을 제출했고 오늘 발표를 했다. 예상했듯 그들이 가져온 광고는 광인 기획의 광고를 따라 한 것.

표절 논란을 피하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 꼬아놨지만 두 광고를 모두 본 조동혁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니들이 하는 짓이 뻔하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오늘 너무들 고생하셨는데. 설마 그냥 돌아가실 건 아니죠?”

전주미가 물었고.

“당연한 말씀을 이렇게 다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좋은 안주에 좋은 술로 회포 한번 풀어야지요.”

“자, 그럼 출발하시죠. 동혁아 너도 가야지?”

팀장의 물음, 조동혁은 손에 든 핸드폰을 슬그머니 감추었다.

“네. 그래야죠.”

“팀장님!”

회의실로 들이닥친 사람이 있었다. 중원 자동차 마케팅팀 직원.

“최연미 뭐야?”

성공적인 기획안 발표, 언제나 기대했던 대로의 광고주의 호평. 이후의 뒤풀이까지 한참 달아오르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래서 전주미는 달려왔는지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팀장님, 오늘 회사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는데…….”

그녀가 팀장에게 출력된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낚아채듯 서류를 받아 든 전주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들려오는 최연미의 목소리.

“비슷한 내용이 계속 게시판에 올라와요. 좀 전엔 기자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이상한 걸 물어보던데.”

바쁘게 서류를 읽어나가던 전주미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어떤 단어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여기 맞구만. 그 ‘갑질’ 자동차 회사.]

[드라마 보고 갑질 성지 순례 왔습니다.]

[힘없는 회사에 갑질하시느라 여념 없으시다던데. 자회사랑 짬짬이는 재미 좋으신지?]

[대원, 이 개XX들아! 참 여기 중원이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갑질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간 본 적 없던 욕설들.

“……이게 다 뭐야?”

전주미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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