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40화
40. 불공정의 중심에서 중지를 세워라(3)
번아웃 증후군.
일에 과하게 몰두하다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여 발생하는 질병. 심한 불안감과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이 대표적 증상이다.
강미희는 생각했다.
번아웃 같은 건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라고. 그녀는 자존감이 강했고 늘 자기 몫을 해내는 에이스였다.
하지만 중원 자동차 PT를 통해 번아웃이 왔다. PT 직후 그녀는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무력했다. 돌아온 집에서도 어둠 속에서 차갑게 미소 짓던 전주미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녀의 꿈에 나타난 PT 장면에서 강미희는 떨었고 더듬댔으며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하나 답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흘렸던 눈물,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깨달았다. 실제 자신이 베개를 적실만큼 울었다는 사실을.
‘하나 말을 듣고도 왜 그랬을까.’
자신이 천하의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 감정은 결국 자기혐오로 번졌다.
4일이라는 짧지 않은 휴가. 그녀는 집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잠을 자지 못했고 TV를 틀어놔도 머리는 반복된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객관화하여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심각했다. 그래서 강미희는 4일째 되는 날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출근할게요.]
띵동.
기다린 것처럼 문자가 돌아왔다. 핸드폰에 떠오른 글자를 확인한 강미희.
[빨리 와. 선물 준비해 놨어.]
핸드폰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몇 번 깜빡였다.
늦은 출근길. 모든 게 전 같지 않았다. 지하철의 인파, 마주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걸로 느껴졌다.
자꾸 그날 발표 장면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비웃음의 시선들.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들.
‘그냥 돌아갈까?’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이불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출근해도 전처럼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할 리 없었다. 다시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선물 준비해 놨어.’
김형철의 문자가 아니었다면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갈등을 이겨내고 도착한 회사. 기획 1팀의 자리에 남은 건 신용재뿐.
주저주저 1팀을 향해 다가가는 강미희를 발견한 신용재.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그가 중얼거렸다.
“대리님 오셨어요?”
무심한 말투. 강미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만약 그렇게 물어왔다면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팀장님하고 하나는 온라인 영업팀하고 회의 중이구요. 덕모는, 음…….”
그가 말끝을 흐렸다.
팬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돌아온 대답.
“비밀 작전 중?”
“작전?”
그때였다.
“어. 미희 왔네?”
“대리님 오셨어요?”
회의를 마치고 팀장과 하나가 돌아왔다. 그들의 반응은 신용재와 같았다. 잠깐 외근 다녀온 것처럼 스스럼없는 말투.
강미희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속 깊은 배려라는 걸.
“네, 좀 늦었네요.”
그래서 그녀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울과 자기혐오로 가득 찼던 가슴에 이전의 감각이 조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참 내가 선물 있다고 했지? 이리 와서 확인해 봐.”
경하나가 손을 놀렸다. USB를 컴퓨터에 꽂고 마우스를 조작한다. 강미희는 문뜩 깨달았다. 자신의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뭔데요?”
예전과 같아진 목소리.
“어! 그거 나도 못 봤는데?”
신용재도 따라붙었다. 경하나의 자리에 모인 네 사람.
“선물 아니기만 해봐.”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온전한 강미희로 돌아와 있었다.
* * *
“선영이 안녕?”
“아…… 오빠 안녕하세요.”
주미 학교 근처 카페. 귀찮은 부탁을 들어준 안주미의 표정이 참으로 못마땅해 보인다.
“너 맨정신일 때 보는 거 처음인가?”
“그…… 그런가요?”
녀석이 민망한 듯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친구 옆에 앉은 주미가 투덜댔다.
“왜 그런 말을 해? 애 민망하게.”
그랬나?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아 그런가? 미안.”
“괜찮아요. 호호…… 호.”
대학생인 안주미의 절친인 박선영. 둘이 절친이 된 건 고3 때라 들었다. 학기 초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렸고 이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더 좋은 대학 갈 실력이 됨에도 주미와 같은 대학, 같은 학부를 지원한 건 선영이가 주미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돈독한 관계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가끔 우리 집을 찾을 때 선영이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
굴러오거나 기어 오거나 가끔은 업혀 오거나.
둘은 술로 우정을 쌓아나가고 있었고 그 결과물은 앞서 말한 대로였다. 물론 그럴 때마다 주미 등짝엔 어마마마의 스매싱 자국이 남았지만.
“그래. 활동은 잘되고?”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20만 넘긴 후부터 정체 중이긴 해요.”
그녀는 별스타그램으로 20만 팔로워, 얼마 전 진출한 너튜브에서 10만의 구독자를 보유한 인플루언서.
내숭 떠는 친구를 하찮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안주미가 끼어들었다.
“웃기고 있네. 얘 스카웃 제의받았어.”
“스카웃?”
“그래 저쪽에서 꽤 잘나가는 회사 있거든? 요즘 거기 매니저가 얘 쫓아다니잖아. 자기네 회사 들어오라고.”
“오호.”
취했을 땐 미모고 뭐고 눈에 안 들어왔는데 이제 보니 20만 팔로워, 10만 구독자의 잠재력이 눈에 들어온다.
‘디스플레이에 최적화된 스타일.’
화장으로 감추기 힘든 선명한 이목구비, 잡티 없이 밝은 톤의 피부색. 작고 라인이 고운 얼굴선까지. 광고 촬영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런 스타일은 약간의 조명만 더해지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선영이 곧 유명인 되겠네?”
“아유…… 그러지 마세요, 오빠.”
녀석이 휘휘 손을 내젓는다.
“허얼. 얘 내숭 좀 봐라?”
안주미가 혀를 내두른다. 오케이 잡담은 여기까지. 지금은 업무시간이고 난 부탁할 게 있어 선영이를 불렀다.
얼굴에 지었던 웃음기를 지워내고 박선영을 바라보았다.
“선영아.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요?”
영문을 모르는 녀석의 두 눈이 몇 차례 깜빡였다.
“오빠 무슨 일 하는지 알지?”
“그럼요, 알죠. 광고 기획사 다니잖아요. 참, 겸업으로 CF 모델도 하시고.”
“크흠.”
안주미를 향해 눈총을 쏘아 보냈다. 자기 죄를 아는 녀석이 황급히 시선을 회피한다. 지난번 달콤 광고의 엔딩씬. 그 모습을 선영이에게 알리겠다는 녀석의 입을 분명히 돈으로 막았다. 하지만 애당초 안주미를 놈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파격의 엔딩씬은 결국 선영이의 SNS를 탔다. 인플루언서의 첫걸음은 제이 제삼의 여파를 가져왔다. 인터넷엔 엔딩씬의 남녀를 소재로 한 짤들이 돌았고 다양한 경로로 내 모습을 알아본 지인들의 연락에 한 달이나 시달렸다.
그때 경하나가 사건의 진원지로 한 인플루언서를 지목했고 덕분에 나도 알게 되었다. 안주미 자식이 내 돈을 홀랑 먹고 배신을 했다는 걸.
“나 겸업 안 해. 그냥 광고 기획사 카피라이터로 있어.”
“우왕 멋지다.”
박선영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본다.
“얼마 전에 우리 회사에서 영상을 좀 만들었거든? 이걸 네 SNS에 올려줬으면 해.”
“광고예요? 그럼 매니저랑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광고 아니야.”
“그럼요?”
“음…….”
잠시 적당한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어렵다.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일종의 캠페인이라고 하자.”
“캠페인?”
선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일단 보고 판단해야 할 거 같아요. 한번 볼 수 있어요?”
“그래. 그래야겠지.”
한편으로 치워두었던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박선영과 함께 볼 수 있도록 돌려놓았다.
달칵.
준비해둔 영상 파일을 실행시켰다. 지난 나흘. 강미희가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 기간 동안 준비했던 우리만의 무기가 화면에 떠올랐다.
* * *
[광고회사 K 이야기]
준비된 인트로와 함께 제목이 올라왔다. 제목 아래 작게 표시된 주의사항.
[이 이야기는 완벽한 창작의 산물입니다. 실제 회사 및 인물과는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화면이 밝혀지고 익숙한 사무실의 풍경이 펼쳐진다. 복사된 용지를 한가득 안고 등장하는 주인공.
주미와 선영이의 눈이 반짝 빛난다. 그만큼 주인공의 얼굴은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을 가졌다. 화면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몸매. 그가 각자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직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바쁘게 자료를 돌린다.
화면 너머 주인공의 독백이 들려왔다.
[나는 광고회사의 막내 카피라이터다. 입사한 지 반년, 회사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해도 하나는 안다. 오늘은 우리 회사에게 무척 중요한 날이라는 것.]
“자! 준비 다 끝났지?”
팀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슬슬 출발하자구.”
“어머, 벌써 시간이?”
“이야. 드디어 결전이네요.”
기대와 흥분이 가득한 팀원들.
[오늘 우린 CF 기획안을 발표한다. 광고주는 무려 대원 자동차.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겐 둘도 없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K. 뭐 하고 있어? 넌 안 가?”
“저요?”
“당연하지. 넌 우리 팀 아냐?”
주인공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바뀐 화면의 배경은 어느 회의실. 조명이 꺼진 회의실엔 프로젝터 화면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벽에 나타난 자료 옆에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발표를 하는 주인공의 선배가 화면에 잡힌다.
“새 출발을 하는 초년생의 설렘을 새 차에 처음 오르는 설렘에 투영해 봤습니다. 새로움에 대한 감상이라는 키워드를 타깃 소비층에 어필할 생각입니다.”
선배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참석자를 둘러본다.
“이상, 기획안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발표의 마지막까지 드러나는 선배의 자신감. 불이 켜지고 어둠 속 참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없었다.
주인공의 속마음이 나레이션으로 들려왔다.
[이게 무슨 분위기지? 분명 발표는 완벽했는데.]
광고주들 중 가장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 팔짱을 낀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준비하시느라 고생은 하셨는데…… 솔직히 기대만큼은 아니군요.”
주인공의 고개가 휘익 돌아갔다.
“설마 준비한 건 이게 전부인가요?”
선배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하지만 혹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보다 모델이 부각된 것 같은데.”
“임팩트가 부족해요. 이래서야 원…….”
“초반 연출이…….”
“키워드가 조금 진부…….”
선배를 향해 쏟아지는 칼날들.
“어…… 그러니까 그건…….”
당황한 선배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기획은 훌륭했다. 발표는 리허설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완벽했다. 하지만 광고주의 반응은 상식 밖이었다.]
가장 처음 선배에게 비수를 꽂았던 여자.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대원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원해요. 더 날카롭고 더 신선하고 센세이션한 그런 거요.”
선배는 이미 탈진한 상태.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진 그녀의 평가는 그로기 상태의 복서에게 떨어지는 소나기 펀치였다.
“2주의 시간을 더 드리죠. 다음 발표는 실망스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허울 좋은 미끼일 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고개 숙인 선배의 옆모습. 검은색 긴 머리가 얼굴을 가렸고 그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볼 위로.
주륵.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주인공의 눈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미끼를 물어 포획된 짐승처럼, 선배는 거대한 불공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화면에 줌인 되는 주인공의 얼굴.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단단하게 다물어지는 어금니.
화면이 전환되고.
[to be continue.]
짧은 영상이 끝났다.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던 선영이가 고개를 들었다.
“뭐예요? 캠페인이라더니 이거 웹드라마잖아요.”
“웹드라마?”
그건 영상의 정체를 규정하는 제일 적절한 단어였다.
“그래. 그걸로 하자.”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