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38화
38. 불공정의 중심에서 중지를 세워라(1)
“벨로프라고 들어보셨나요?”
회의실. 자리에 앉자마자 날아온 중원 자동차 마케팅팀장의 물음. 고개를 들었다.
40대의 여성. 짧게 잘라낸 단발, 과하지 않지만 무엇하나 놓치지 않은 신경 쓴 화장.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
그녀는 기획 1팀 직원들 중 오직 내게만 시선을 맞춰 왔다.
“아니요.”
난 고개를 저었다.
“광고를 만드시려면 정보 정도는 파악하고 오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건 시비조 아닌가? 광고주 앞이지만 고개를 숙이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저희는 아직 어떤 차를 광고하는지 모릅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뒤틀린다.
“아…… 제가 좀 경솔했네요. 여러분을 부른 이유부터 설명 드리도록 하죠.”
지나치게 정제되어 차갑게 느껴지는 말투로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중원 자동차는 명실공히 국내 1위의 자동차 메이커. 압도적인 국내 점유율을 바탕으로 글로벌 그룹으로 도약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기업 중 하나다.
중원쯤 되는 기업은 광인 같은 외주 광고 기획사를 쓰지 않는다. 한해 수십 개의 광고를 집행하며 거기에 더해 수많은 마케팅, 홍보 활동과 이벤트를 벌인다. 늘 안정적인 일감이 확보되어 있기에 광고 제작을 전담하는 내부 부서나 자회사를 가지고 있다.
중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JW애드라는 자회사를 가졌다. 비대해진 내부 조직을 분리시켜 만든 오직 중원만을 위한 광고회사.
“저희 이사님께서 그쪽 회사 광고를 보셨나 보더라고요. 부대찌개 광고도 봤고 달콤 광고도 봤고 얼마 전 제로 스웨트도 보셨대요. 그래서 우리도 그 방향으로 한번 가보면 어떻겠냐는 말씀이 있었어요.”
자동차 회사의 광고란 뻔하다. 2000년대까진 주로 성능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았고 이후 다양한 시도를 거쳐 오늘날의 자동차 광고는 두 가지 포인트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모델과 메시지.
완성된 모델의 이미지를 자동차에 투영하고 메시지를 통해 이미지를 확립한다.
성공의 상징, 질투의 대상, 현명한 선택 같은 이미지들.
흐름은 10년 전에 완성되었고 그 결과 업계인으로서 바라보는 오늘날의 자동차 광고는 진부하다. 그럼에도 진부한 광고가 지속되는 이유는 하나.
‘진부해도 상관없으니까.’
자동차는 현대인의 가장 핫한 상품 중 하나다. 개발 초기부터 대중에게 정보가 공유되며 위장막을 두르고 시험 주행하는 사진만 가지고도 정체를 밝혀내는 게 오늘날의 자동차 소비자다.
사양, 스펙, 특장점. 보통의 제품들이 광고를 통해 알려야 할 거의 모든 게 소비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시장.
그렇기에 자동차 광고 역할, 광고를 통해 알려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기다리셨던 차량이 판매를 개시합니다.”
그거면 족하다. 변화는 필요 없다.
“저희도 최근엔 이미지 광고에 주력하는 편이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개별 자동차 광고가 큰 의미가 없으니 몇 년 전부터 나타난 흐름.
“장기적으론 유효하지만 비용 대비 효과는 수치화할 수 없죠. 저희 이사님 생각도 그러셨구요.”
마케팅팀장 전주미. 그녀의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그래서 부른 겁니다. 논란만 아니라면 어떤 광고든 상관없어요. 광인 기획 스타일로 만든 신선한 광고를 제안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아득한 위화감을 느꼈다.
짧았던 미팅은 끝났다.
기획 1팀은 중원 자동차 앞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대신 챙겨 온 단백질 셰이크를 홀짝거리며 신용재가 말했다.
“덕모가 범인 맞네.”
“그렇다니까.”
김형철이 맞장구를 쳤다.
“하긴 덕모 광고가 임팩트가 크긴 컸죠. 만들기만 하면 들썩들썩했으니까.”
강미희가 날 바라본다.
“이건 뭐 대놓고 덕모한테 만들어달라는 거던데?”
커피와 함께 나온 과자를 오물거리던 경하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나. 우리 회사가 중원 자동차 광고를 찍게 될 줄이야.”
팀장의 말처럼 이번 일은 충격이었다.
중원의 광고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방송되는 글로벌 버전. 광고가 임팩트를 준다면 광고 기획사는 물론 카피라이터 역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문제는 누가 메인을 맡느냐인데.”
그가 팀원들을 둘러본다.
“난 덕모가 했으면 좋겠어. 너희들 생각은 어때?”
“전 찬성이요.”
강미희가 말했고.
“저도 이견 없어요. 저쪽도 덕모 원하는 눈치던데.”
“오케이. 하나 생각은.”
“뭐 저도 좋아요. 광고주에게 맞춰주는 게 우리 역할이니까.”
긍정의 대답이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그래서 난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녀석.
그때 팀장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덕모 네 생각은 어때?”
“마다할 상황은 아니죠. 마침 제로 스웨트 건도 끝나서 지금 당장은 진행하고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럼 덕모가 메인을 맡아. 물론 혼자서 못 할 거야. 당분간 다른 일보다 중원 건에 집중하게 될 테니까 다들 우선적으로 돕는 걸로 하자.”
이 사람들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은 초짜에게 메인을 달아주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내겐 엄청난 기회다. 중원 자동차 광고를 필모로 삼는다는 건 카피라이터에겐 영광 그 자체.
“우리 광고 잘하면 슈퍼볼에도 나가게 되는 거 아냐?”
“오…… 슈퍼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중원 자동차는 실제 슈퍼볼에 심심치 않게 광고를 내보내는 회사. 초당 수억 원짜리 슈퍼볼 광고권을 부담 없이 사들일 만큼 중원 자동차는 규모 있는 회사이며 천문학적인 마케팅 예산을 집행하는 공룡 광고주다.
“중원 자동차 미국에서 많이 팔린다더라. 이거 잘하면 모터쇼 같은데 초청받아서 미국 가는 거 야냐?”
“우와! 미국. 공짜 항공권.”
두 대리가 주거니 받거니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조용하던 경하나의 입이 열린 건 그즈음이었다.
“만만하게 볼 일 아닌 거 같아요.”
“응?”
“어?”
기대에 부풀었던 두 대리가 물었고.
“기획안 통과. 아마 만만치 않을 거예요.”
무겁게 돌아온 대답, 김형철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야?”
“중원 자동차…… 비슷한 일을 했던 전과가 있거든요.”
들떠 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조용해진 기획 1팀 네 사람.
경하나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 *
“중원 같은 회사가 왜 그런 짓을?”
경하나의 이야기가 끝났다. 팀장의 물음은 모두를 대변한 것이었다.
“명분 쌓기죠.”
“명분 쌓기?”
“대기업은 늘 감시를 받아요. 특히 내부 거래, 일감 몰아주기 같은 이슈는 활활 잘 타는 재료죠.”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경제기사나 사회적 이슈로 등장해 공정위를 통해 다뤄지면 대기업을 궁지로 몰아넣곤 하는 바로 그 이슈.
“뭐야, 그럼?”
경하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입장에선 손해 볼 일 없는 카드죠. 우리 쪽에서 매력적인 기획을 제안하면 받아들이면 되고 그게 아니라도 JW애드에 일감을 몰아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경하나의 이전 회사. 제삼 기획도 중원 자동차에게서 광고 제작 제안을 받았다. 광인 기획보다 훨씬 규모가 큰 회사였지만 제삼 역시 우리처럼 들떴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기획안을 만들어냈다.
회심의 기획안에 대해 돌아온 건 정중한 거부와 작은 희망.
제삼 기획은 희망을 끈을 놓치지 않았고 장장 4개월에 걸쳐 기획안을 만들고 제안을 거듭했다. 하지만 반년여가 지났을 때 제삼 기획 직원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JW애드에서 만든 광고를 보아야 했고 결국 4개월간의 노력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난 아까 느꼈던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케팅팀장 전주미,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하나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숨겨진 그녀의 속내를 일부나마 느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중원 입장에선 JW를 압박하는 좋은 카드로도 써먹을 수 있겠네.”
“그렇지. 말 잘 듣는 자회사란 없는 법이니까.”
대략의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김빠진 얼굴로 신형철이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광고 못 찍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꼭 그렇지는 않아요.”
경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제삼 기획 일 벌써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때 마케팅 담당자도 지금 담당하고 다르구요. 광고 업계에 소문 안 퍼진 걸로 봐선 지금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오케이, 알겠어. 이제 정리를 해보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형철이 말했다.
“하나 얘기도 일리가 있어. 그렇지 않아도 중원 같은 회사가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 광고를 준다는 게 조금 이상했던 참이었거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쉽지만 덕모는 메인에서 빠지자 물도 안 나오는 우물 파는 짓이 될 수 있고 자칫하다가 아주식품 대응도 놓칠 수 있으니까.”
김형철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판할 가능성도 있어. 이번 광고 대표님이 직접 대응 지시한 일이야. 수상하다고 해서 우리 맘대로 게을리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메인은 미희가 맡는 걸로 하자. 우리 팀 최선임이니까 이쪽 명분은 충분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팀장. 듣는 이 없음에도 그는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상황을 보자고. 저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말이야. 알겠지, 다들?”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팀장의 근처로 가까이 모인 네 사람.
끄덕.
그들의 고개가 약속된 것처럼 동시에 끄덕였다.
* * *
강미희가 벨로프라는 신차의 메인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중원의 파트너는 전주미 팀장. 강 대리의 말에 따르면 마음에 안 드는 눈치라 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메인을 맡은 강미희는 열정을 불태웠다. 비록 상대의 속내를 짐작할 순 없지만 중원 자동차의 메인 자리는 그만한 동기를 부여해 주는 마력이 있었다.
짧은 시간 강미희는 제법 많은 수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팀장의 주도하에 신차 광고 안 검토 회의가 열렸다. 차혜민 본부장까지 배석한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최종안이 채택되었다.
강미희는 자타공인 팀의 에이스. 그리고 에이스가 열정을 불태운 결과물은 놀라웠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콘티만 봐도 머릿속에 좋은 장면이 계속 떠오를 만큼 그녀의 광고는 날카롭고 신선했으며 중원이 원하는 목표 타깃을 정확하게 조준한 걸작이었다.
마침내 준비된 기획을 발표하는 자리.
중원에선 이사와 직원 십여 명이 배석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광인 기획 역시 차혜민을 비롯한 우리 팀 전원이 배석한 상태.
대형 화면엔 그래픽으로 처리된 콘티가 떠 있었다. 어둠 속 힘 있는 강미희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우린 이 장면을 통해 첫걸음을 내딛는 사회 초년생의 설렘과 새 차에 처음 오르는 설렘을 연결하여 표현했습니다. 이 장면으로 설렘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고 타깃 소비층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겁니다.”
어둠 속 강미희가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확신이 퍼져나갔다. 그만큼 좋은 기획이었고 훌륭한 발표였다.
회의실 불이 켜지고, 강 대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상 벨로프 광고 기획안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박수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광고주 측은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준비하시느라 고생은 하셨는데.”
이질적인 고요함 속에서 입을 연 건 전주미 팀장.
“솔직히 기대만큼은 아니군요.”
유독 냉랭한 목소리.
“광인이 준비한 건 이게 전부인가요?”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당황한 강미희에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