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37화 (37/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37화

37. Oldies but goodies(6)

JBC 방송국 공개녹화 홀.

거대한 홀에서는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갖가지 조명으로 현란하게 표현된 무대 위에서 다섯 남자가 칼 같은 군무를 선보이고 있었다.

쿠궁.

피날레와 함께 음악이 끝나자 각자 가장 자신 있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다섯 남자.

“아아아악!”

동시에 폭발적인 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손에 노란 풍선을 든 보이그룹의 팬클럽 사생팬들.

“감사합니다.”

보이그룹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떠나는 가수들을 아쉬워하는 팬들은 목청 높여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까아악!”

오늘 음악방송 진행을 맡은 FD.

“아이고, 고막 터지겠네.”

그가 재빨리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촬영 스태프. 커다란 방송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어낸 그가 FD에게 말했다.

“거봐. 헤드셋 하라니까.”

그는 헤드셋으로 귀를 가렸다. 하지만 FD의 귀엔 고작 한쪽 귀에 매달린 인이어뿐.

“감독님, 본 촬영 때 쟤들 클로즈업 좀 제대로 해주세요.”

“왜? 뭔 말 있었어?”

“저번 방송 마지막에 두 명 클로즈업 안 해줬다고 게시판 폭발했잖아요.”

“참나.”

팬들의 눈치를 보는 건 음악방송 스태프에게 숙명과 같다. 자기가 덕질하는 가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조금 이상해도 실시간으로 공격적인 피드백이 날아오는 분야였다.

더구나 저들은 컴백만 했다 하면 그 주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 인기 그룹 엔리퍼블릭. 가장 적은 인기를 가진 멤버의 사생팬만 해도 만 단위를 훌쩍 넘기는 탑티어 아이돌이었다.

한 달 전 컴백한 직후 2등과의 압도적 점수 차로 1위를 거머쥐었고 이번이 벌써 4주째 1위 후보.

“그래, 어쩌겠어? 고객님이 신경 쓰라는데 신경 써줘야지.”

카메라 감독의 투덜거림에 FD가 쓰게 웃었다. 이제 다음 가수의 리허설 차례.

‘리허설을 본 촬영처럼.’

PD의 철칙이었다. 뒤돌아선 FD가 관중석을 살폈다. 다음 가수가 무대에 서는데 엔리퍼블릭의 팬들이 소란을 피우면 오디오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기에 가수 별 팬클럽 대표들과 미리 말을 맞춘다. 각 팬클럽에서 각자 팬들을 통솔하는 건 음방에선 일종의 상식.

물론 흥분한 팬은 돌발행동을 하기 쉽다. 특히 엔리퍼블릭 같은 대형 아이돌의 경우 더더욱.

“어? 뭐야?”

관중석을 살핀 FD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왜?”

카메라 감독이 물었고.

“애들이 왜 이리 조용해?”

“뭐? 그럴 애들이 아닌데?”

엔리퍼블릭엔 소위 골수 사생팬이 많다. 팬클럽 회장의 신신당부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지난주엔 FD 세 명이 올라가 계속 소란 피우면 퇴장시킨다고 협박을 하고서야 겨우 다음 가수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카메라 감독도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이 퇴장한 지 일 분도 안 된 상황. 하지만 사생팬들은 이미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러게요?”

두 사람이 팬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엔리퍼블릭의 팬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은 채 그들의 왼쪽을 연신 힐끔대고 있었던 것.

시선이 그들의 왼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보았다.

마치 요원의 호위를 맡은 비밀요원들처럼 검은 양복을 입은 수십 명의 남자들. 관중석 한편을 차지한 채 완벽한 침묵을 지키며 오직 무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들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박력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저 아저씨 팬들 덕분이구만?”

엔리퍼블릭의 팬들은 이제 고작 10대 후반. 30, 40대로 이루어진 검은 정장의 남자들은 그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두 사람은 남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전 17년 만에 재결합해 활동을 시작한 어느 걸그룹의 팬들.

팬들은 놀라운 속도로 결집했고 대부분의 신분을 나타내듯 검은 정장을 팬클럽의 공식 복식으로 채택했다. 물론 회사 출근과 덕질을 겸하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게요.”

FD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살다 살다 음방에서 이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네요.”

“그 CF가 톡톡히 한몫했지.”

카메라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CF를 통해 재결합을 알렸고 직후 그룹 해체와 관련한 공식 발표와 당사자의 사과문이 발표되었다.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직후 팬들은 엄청난 속도로 모여들었다. 집결한 팬은 예전 그녀들의 팬들만은 아니었다. 오래전 전설, 전설이 부서지고 다시 살아난 일련의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자아냈다. 덕분에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제법 많은 신규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과연 정장의 남자들 사이에 펑퍼짐한 정장의 앳된 얼굴들이 사이사이 눈에 들어온다.

“감독님도 저기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그러고 싶긴 한데.”

헤드셋의 얼굴이 히죽 웃는다.

“최대한 잘 찍어주는 게 내 역할인 거 같네.”

그때 FD의 인이어에 피디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무대 세팅 완료. 방청석 컨트롤 끝났어?]

“네. 정리됐습니다.”

[오케이, 진행팀 가수는?]

[준비 완료.]

[좋아. 카메라, 조명 스탠바이…… 지금! 가수 올려보내.]

[네 올라갑니다.]

[기술팀 배경 화면 고.]

[화면 고.]

[지미집! 뭐 하고 있어. 정신 안 차려?]

[아! 죄송합니다.]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 준비된 영상이 밝혀졌다. 화면에 다음 가수의 이름이 떠오르자 공개홀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우오오오.”

그건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야수의 으르렁거림.

“우어어어.”

그 소리는 너무 낮고 중후했다. 그래서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또 그 소리는 드래그 레이스 출발지점에서 달릴 준비를 마친 머신의 엔진음을 연상시켰다.

[가수 올라간다. MC 멘트 고.]

무대 한편에 별도로 준비된 작은 무대. 그곳에 자리한 남녀 두 MC가 주거니 받거니 멘트를 시작했다.

“혜나 씨 다음 순서는 누구죠?”

“Oldies but goodies.”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정말! 오래되어도 변함없이 반짝인다는 뜻이잖아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죠. 이번 순서는 17년 만에 화려한 컴백 무대입니다. 세기말과 세기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원조 걸그룹!”

“소개합니다. 퍼플 캔디!”

파앗.

조명이 밝혀지고.

“오오.”

조명을 받아 빛나는 그녀들의 모습은 여전히 전성기였다.

“우아아아!”

출발 준비를 마친 검은 정장의 머신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튀어나온 보라색 풍선들. 바로 퍼플 캔디를 상징하는 응원 도구였다.

고막을 강타했던 여자아이들의 환호성과 달리. 검은 정장 팬들의 저음 함성은 심장을 진동시켰다.

“윽!”

그래서 FD는 양손으로 심장이 있는 곳을 움켜잡았다.

* * *

“와 미쳤네.”

사무실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신용재의 말에 업무 중이던 팀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뭐가?”

강미희가 물었고.

“아니, 퍼플 캔디 말이에요.”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옛날 가수잖아요. 그냥 일회성으로 반짝 주목받고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이거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강미희, 신용재의 자리로 다가와 그가 보고 있던 화면을 살폈다.

[퍼플 캔디 뜨거운 역주행. JBC 음악캠프 1위]

거긴 지난주 공식 컴백한 퍼플 캔디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신곡 발표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일위래요. 그 엄청난 엔리퍼블릭을 재꼈다니까요?”

“그게 다가 아냐.”

“네?”

“얘기 못 들었어? 그 사람들 협찬해준 옷, 액세서리, 굿즈 다 품절이야. 웃긴 게 우연히 같이 찍힌 제품도 지금 줄줄이 품절됐어. 퍼플 캔디, 지금 완전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야.”

주말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이슈였다. 그녀들의 팬들은 지금 자신의 팬심을 소비로 증명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돌과 다르게 그녀들의 주력 팬층은 지출 여력이 충분한 30, 40대. 그들이 몰려들어 품절시킨 제품이 기사화되기 시작했고 기사에 탄력받은 팬들은 다음 소비를 일으키고. 이상한 순환의 결과 지금 퍼플 캔디는 업계의 가장 핫한 광고모델이 되어버렸다.

지난주 금요일 아주식품 홍보팀에서 전화를 받았다. 성수기도 안된 제로 스웨트가 동이 났다나 뭐라나? 팬들이 생수 대신 제로 스웨트를 사재기하는 중이라고.

“모델료도 엄청 올랐겠네요?”

“당연하지. 계약 기사만 나도 줄줄이 품절인데.”

“오호.”

“광고가 줄을 선단다. 벌써 여름 스케줄까지 꽉 찬 모양이더라.”

눈을 깜빡이며 강미희의 말을 듣던 신용재가 파티션 너머로 날 바라보았다.

“이야…… 안덕모.”

“네?”

“네 광고에선 엄청 싸게 썼잖아.”

“하하.”

웃고 말았다. 상황이 조금 민망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로 스웨트 광고에 쓰인 그녀들의 모델비가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돌들의 모델료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우리가 제안한 모델료는 대략 3티어급과 무명 모델 그 어딘가.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린 모델비 대신 제작비에 많은 예산을 집행했다. 오랜만에 화면에 등장하는 그녀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도록 더 좋은 카메라, 더 좋은 조명, 더 좋은 영상미를 보여주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세 사람이 초라한 모델료를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 그 역시 그걸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들은 광고를 통해 성공적으로 재결합을 알렸다. 화려한 컴백에 이어 단숨에 음방 1위까지 거머쥐었다. 미안함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민망함은 여전하다.

“대박이네. 얼마를 아낀 거야? 아주식품이 아주 좋아라 하겠어. 어? 아주식품이 아주? 아주 아주.”

렉 걸린 컴퓨터처럼 아주를 반복하는 신용재. 강미희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파티션 너머가 신경 쓰였다.

애드립이 들어간 NG 버전. 경하나는 안 된다고 했던 그놈이 결국 대박을 터뜨렸다. 진심 어린 눈물, 그리고 이후 공식 사과를 통해 세나는 그룹 해체의 부담을 덜었고 덕분에 세 사람은 전처럼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1999년 해맑았던 세 자매처럼.

녀석도 이쪽이 신경 쓰였는지 파티션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난 입만 벙긋거리며 말했다.

‘커피랑 빵 살게. 조용히 따라 나와.’

녀석이 이마 가득 주름을 잡는다. 그래도 숨길 수 없다. 억지로 찡그린 눈이 너무 반짝거리고 있잖아.

“야, 큰일 났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긴 뛰듯이 달려오는 팀장이 있었다.

“일단 다들 주목해 봐.”

목소리는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대표한테 직접 들었는데. 회사로 CF가 하나 새로 들어왔나 봐. 근데 이게…… 어후, 어떡하지?”

“뭔데 그래요?”

강미희가 물었고.

왠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김형철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자동차야.”

“네?”

“자동차요?”

나 역시 놀란 입이 자동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 자동차. 무려 자동차! 맙소사. 이게 뭔 일이냐?”

팀장의 입에서는 기대와 흥분 그리고 우려가 동시에 전해져 왔다. 웃으면서도 동시에 찡그려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김형철.

“잠깐만요! 팀장님 확실해요? 까놓고 광인은 자동차 광고 찍을 급이 아닌데?”

“아니지. 수입차면 그럴 수 있지. 어디 새로 들어오는 브랜드 아니에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김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아니. 수입차 아냐. 그리고 작은 데도 아냐. 중원 자동차래.”

“허얼.”

“네에?”

“세상에! 아니, 중원 자동차가…… 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들. 소란을 참지 못한 기획 2팀 직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팀장의 얼굴을 가렸던 한 손이 떨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쭈욱 뻗는다.

“재 때문에 그래.”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덕모, 쟤가 범인이라고.”

갑작스러운 추리소설로 장르 변경,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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