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32화
32. Oldies but goodies(1)
현대는 뉴스의 시대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하고 반응하는 시대.
덕분에 그 어디에 있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윤도식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
[지워지는 윤도식의 흔적들.]
떠오른 기사엔 버스 광고판에서 윤도식의 얼굴을 떼어내는 사진이 나타났다.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아직 윤도식의 혐의와 완벽하게 입증되진 않았지만 즉각적인 조치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었던 광고는 사라졌고 사방팔방 나붙었던 그의 광고물들도 즉각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
사진을 내리니 연관된 기사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제품 카피 논란에 전속 모델 범죄 혐의까지, 바람 잘 일 없는 KJ.]
이번 사건은 윤도식의 연기 인생을 끝장낸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에 기대 부정적인 인식을 덮고자 했던 KJ가 직격탄을 맞았다.
[증폭되는 불매 움직임. KJ, 비호감 이미지 굳어지나.]
어디까지나 광고주와 모델의 관계일 뿐이지만 이런 논란이 터지면 광고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서이준의 광고, 아주식품 주한준 대표의 저격으로 위기에 빠졌던 KJ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KJ와 윤도식을 엮어 조롱과 쓴소리를 쏟아냈고 날이 지날수록 비난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저기, 손님?”
“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눈앞엔 직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였다.
“이제 들어가실게요.”
“아네.”
옆을 바라보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안주미.
“가자.”
“에휴. 점을 왜 봐, 점을.”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점 볼 돈으로 동생 용돈 주는 게 훨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지 않냐?”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미야. 이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뭐라는 거야?”
이번 윤도식 사태를 통해 난 사건의 주인공보다 안주미의 예지에 크게 놀랐다. 이 녀석 윤도식의 가면을 간파한 건 물론, 더 큰 걸 숨기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보았으니까.
하물며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난 그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안주미만큼 윤도식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KJ 같은 대기업의 전속 모델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난 결론 내렸다.
“넌 특별한 능력이 있어. 이건 그게 뭔지 알아보려는 일종의 조사일 뿐이야.”
안주미를 점쟁이에게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주말에 시간이 비었고 녀석을 끌고 이곳을 찾았다.
혹시 모르잖아? 녀석에게 사람 알아보는 재주 말고 다른 재주가 있을지.
예를 들면 숫자 같은 거? 아니면 불기둥이 솟아오를 종목명 같은 것도 좋고.
“에휴. 그래. 가자, 가.”
녀석이 앞장서 걸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자리한 점쟁이의 방안.
“그러니까.”
한복 차림의 점쟁이, 몇 달 전 신내림을 받았다는 젊은 그녀의 눈이 번뜩 빛났다.
“동생한테 귀신같은 게 붙어 있는지 봐달라?”
“네.”
고개를 끄덕였다. 점쟁이가 주미를 바라본다.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
“그래, 얼굴이 참 묘하구나.”
“아! 뭐래?”
안주미가 버럭 한다.
“이상한 건 그쪽이거든요?”
“……뭐?”
“묘해? 지금 어디다 대고 얼평이야?”
“아니, 얼굴 말고 기운이…….”
점쟁이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결국 난 손을 들어 녀석의 입을 막아야 했다.
“조용히 해.”
“아니, 저 사람이 먼저 기분 나쁜 소릴 하잖아.”
딸랑.
무당의 손에 들린 방울이 흔들렸다.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울려 퍼진 방울 소리에 난 험험 헛기침을 했다.
“알았다. 점보는 동안만 입 다물고 있어. 그럼 오만 원 줄게.”
“입금부터.”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 동생에게 내미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점쟁이. 잠시 후 개구리가 날파리를 집어삼키듯 내민 지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녀석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말없이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던 점쟁이가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뭐에 씐 게 분명한가 보구나. 어디 그 안에 든 게 뭔지 보자.”
점쟁이가 눈을 감는다.
딸랑, 딸랑.
규칙적으로 울리는 방울 소리. 진한 향냄새와 이상한 분위기, 뜻 모를 점쟁이의 중얼거림이 한데 섞여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멈추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점쟁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가 있나요?”
“아니, 뭐 씌고 그런 건 없어. 쟤는 그냥 기가 센 거야.”
“…….”
“기가 세면 귀신 씐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쟤는 기가 세도 너무 세. 우리 장군님이 그러시는데 하얀 범이랜다.”
“범이요?”
“그래. 호랑이, 그것도 북방을 호령하는 백호.”
아 호랑이였구나? 뭔 말을 해도 잘 알아먹지를 못하더라니. 동물한테 사람 말을 했으니 쟤는 나름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런 눈빛을 담아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눈빛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녀석이 쏴 붙인다.
“네 지갑에 오만 원 들어간 지 오 분도 안 됐다.”
그제야 불만스러운 표정을 거두는 녀석.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보던 점쟁이가 말을 이었다.
“기가 세면 남들이 못 보는 걸 볼 수도 있어. 네 동생은 그런 케이스야.”
남들이 못 보는 걸 본다고?
“그럼 혹시 숫자 같은 것도 볼 수 있어요?”
“로또번호?”
“네.”
“그럴 리가 있겠니?”
그녀가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신내림 받아도 나도 그런 건 못 봐. 보이면 이 짓 하고 있겠어? 진작 로또 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실망도 함께. 뭐 안주미 기 센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거 보려고 먼 길 온 게 아닌데.
“문제는 너야.”
딸랑.
점쟁이의 방울이 내게 향한다.
“저요?”
“그래. 주변에 쟤처럼 기 센 애 한 명 더 있지 않아?”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주미와 겨루면 천하의 명승부가 될만한 강한 기운을 지닌 여자. 경하나.
“네. 그렇긴 한데.”
“어떤 앤지 말해봐.”
난 어느새 그녀의 점에 빠져들고 있었다. 술술 경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잠시 후 다시 눈을 감은 그녀가 방울을 흔들기 시작했다.
“걔는 용이네. 사방위중 서쪽을 책임지는 청룡.”
백호에 청룡? 들어본 적 있다.
“좌청룡 우백호라구요? 와…….”
그리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럼 전 청룡과 백호를 거느리는 건가요?”
무당의 눈이 몇 번 깜빡인다.
“으흠.”
헛기침과 함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거 아닌데?”
“그럼요?”
“그냥 두 사람이 그렇다는 거고. 넌 걔들하고 별 관계 없어. 그리고 네 정도 기 가지고 걔들 거느리지도 못해. 궁합도 별로고.”
하긴 궁합이 좋다는 소리를 했다면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거다. 의외로 날카로운 무당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을 눈치챘는지 점쟁이가 말을 보탠다.
“지금부터 내 말 새겨들어.”
“네?”
“두 사람 다 크게 될 팔자네. 그러니까 넌 그 둘을 잘 이용하는 게 살길이야. 좌청룡 우백호니 뭐니 해서 괜히 거느릴 생각 하면 크게 다쳐. 딴생각하지 말고 비위나 잘 맞춰주라고.”
어처구니없는 점쟁이의 조언에 미간은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 * *
“호랑이 먹는다.”
“호랑이 마신다.”
“호랑이 용돈 필요하다.”
점쟁이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 이참에 아예 짐승이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녀석은 종일 호랑이 타령이었다.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 찾은 카페에서 난 야수로 변해가는 동생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까 오만 원 준 거 그새 까먹었냐? 이제 지능도 짐승 닮아가냐?”
“크흠.”
할 말이 없어진 녀석이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묻는다.
“참. 좀 있으면 제로 스웨트 광고 찍지?”
“귀신이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데?”
“뭐, 그 광고야 워낙 유명하니까.”
녀석의 말처럼 이온 음료인 제로 스웨트 광고는 여러모로 독보적이다. 오래전 한해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신예를 모델로 쓰던 전통은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달라졌다.
“이번엔 누가 모델 될지 말들 많더라고.”
성공한 연예인의 척도, 바꿔 말해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제로 스웨트 모델이 되지 못하면 무관의 제왕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래전엔 미스코리아 우승자를 모델로 썼고 이후엔 슈퍼모델 우승자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 십 년은 가장 핫한 여자 아이돌을 모델로 쓰고 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광고는 아이돌의 인기를 입증하는 시상식으로 바뀌었고 광고주가 가장 고민되는 포인트 역시 올해는 어떤 아이돌을 쓸 것이냐가 되었다.
평소 덕질에 도가 튼 녀석답게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야, 호랭아.”
“응?”
“사실 모델 아직 결정 못 했거든?”
“뭐? 3월인데?”
녀석이 화들짝 놀란다.
“원래 쓰려던 그룹 있었는데 이슈 터져서 못 쓰게 됐거든.”
“아…… 레몬 서클이 모델이었구나.”
분야가 분야다 보니 말이 통한다.
“그래서 말인데 확 감 오는 사람 없어?”
“음…….”
녀석이 손가락으로 슥슥 머리를 긁는다.
“그것참 어려운 문제네. 지금 여돌 쪽은 완전 가뭄이고, 모델이나 배우 중에서도 눈에 확 띄는 신예는 없는데.”
녀석의 말대로다. 혹자는 아이돌 시장이 빠르게 성장 중이라고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퍽 기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성공한 일 퍼센트가 다 가져가는 시장.]
어느 전문가의 평가처럼, 아이돌 시장은 최소 데뷔 5년 차 이상의 1티어들이 꽉 잡고 있는 시장이다. 해가 가면 갈수록 신인들이 성공하기 어렵고 이미 성공한 1티어들의 매출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형적인 시장.
그것이 현재의 아이돌 시장.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신인 그룹을 네다섯 팀 섭외해서 찍어보면 어떨까?”
“에이…….”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별로다. 지금까지 해온 컨셉하고 맞지도 않고, 이름 없는 신인 데려다 써봐야 주목도 못 받고 논란만 생길걸?”
“그럴까?”
“당연하지. 탑티어 아이돌 모델료가 얼만 줄 알아? 반면 신인들은 모델료 없어도 서로 찍어달라고 줄을 설걸? 다른 회사는 뭐 돈이 남아돌아서 탑티어 데려다 쓰는 줄 알아?”
“흠.”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고민하던 녀석이 힐끗 내 눈치를 살핀다.
“근데 모델을 네가 결정하는 거야?”
달콤과 서이준 광고를 통해 아주식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광인 기획에 대한 신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상태고 더구나 난 그 광인 기획의 메인 카피라이터.
“그럴걸?”
내가 결정하면 아주는 분명 군말 없이 따를 거다. 이건 예상이 아닌 확신에 가깝다.
“오. 안덕모 성공했네?”
“까불지 마라, 호랭아.”
‘좋다. 기분이다. 내가 딱 찍어줄게.”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치켜든다.
“잠깐. 녹색머리 안 됨.”
“뭐래? 내가 미쳤니? 우리 오빠들을 거기다 세우게.”
아무튼 그놈의 오빠들 얘기만 나오면 정색이다. 기다리고 있자니 녀석의 입에서 기다렸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빈티지로 가자.”
“빈티지? 그런 그룹도 있었냐?”
“으이그.”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빈티지(Vintage)! 복고풍 말이야. 올디스 벗 굿디스(Oldies but goodies, 오래되어도 가치 있는 것) 못 들어봤어?”
짐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창한 영어에 난 놀란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