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31화
31. 진짜와 가짜(7)
3월. 저 멀리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느린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봄은 달이 바뀌자마자 우사인 볼트처럼 빠르게 우리 곁에 다가왔다.
봄이 찾아온 거리. 한 남자가 아스팔트를 걷는다.
“아으. 더워.”
급작스레 더워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 벗은 외투를 손에 들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낸다.
남자가 걸어가는 길 어느 가게 쇼 윈도 안에 틀어놓은 TV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 TV에선 몇 명의 남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토론 중이었다.
쇼윈도로 가까이 가자 소리가 들려온다. 손에 든 만년필로 테이블 위 대본을 탁탁 내려치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 논란은 당연한 겁니다. 알려진 것처럼 KJ 제품 절반 이상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한 경쟁사 카피 제품이에요. 아주를 비롯한 피해기업들이 여태 참고 있었던 게 비정상이었던 겁니다.”
방송 중인 건 시사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반대편을 비추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논란이 될 만한 광고를 내보내고 대표가 직접 SNS를 통해 상대 기업을 직접 저격하는 행위가 문제라는 겁니다.”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화면 한편에 준비된 화면이 나타났다. 웅성거리는 하객들 사이에서 손을 들어 올리는 서이준, 그리고 주한준 대표의 SNS를 캡처해 놓은 장면들.
“불매 운동은 소비자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해요. 경쟁 기업의 광고를 통해서, 또 일개 대표의 영향력에 의해서 불매 운동이 촉발된다면 앞으로 기업계 어떤 일이 펼쳐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시 바뀐 화면. 만년필의 남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핵심은 KJ의 얌체 경영이에요. 카피 얘기야 워낙 유명한 거고, 주한준 대표 SNS 보셨잖아요? 다 만들어 놓은 광고를 방송불가 판정받게 해서 엎어지게 만든 게 KJ예요. 그게 사실이라면 불매 운동이 아니라 법적 처벌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짓이란 말입니다.”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말 나온 김에 불매 운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합시다. 아주식품이 불매 운동을 종용한 적 있습니까? 아니에요. 광고도 주 대표의 SNS도 불매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없었어요.”
남자의 상태를 대변하듯 현란하게 돌아가는 만년필.
“아주는 공권력과 시장질서에 의해 적발되었어야 할 불공정에 대해 일침을 날렸을 뿐이에요. 불매 운동은 그 사실을 알게 된 대중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거란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예요. 공정위도 있고 중재 기관도 있어요. 근데 아주는 어떻게 했지요? 기업 간 문제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잖아요.”
“자, 자. 두 분 잠시 진정하시고…….”
치열해진 양측의 대립이 사회자가 끼어들었다.
“저희가 준비한 영상이 있는데 잠시 보고 오겠습니다.”
화면에 떠오른 흑백 화면, 1970년대 두 회사의 태동기가 자료화면과 함께 오늘날 아주식품을 있게 만들었던 대표 제품 ‘초콜릿 파이’, 그리고 이후 출시된 ‘KJ 파이’에 대한 자료가 나타났다.
KJ는 공격적인 가격정책과 유통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제품군을 대표했던 초콜릿 파이의 시장 점유율은 KJ파이에 밀려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은 이후 수없이 반복되었다. 아주에서 출시한 오리지널, 그리고 그걸 따라 한 KJ의 카피 제품. 대형사의 모방제품은 오리지널을 압도했고 그 결과 KJ는 대한민국 식품업계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선은 쇼윈도에서 멀어졌다. 거리를 조금 지나자 작은 동네 마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희망 슈퍼, 간판 아래 걸린 작은 현수막 하나.
[희망 슈퍼는 KJ 제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불어온 봄바람에 현수막이 조금 나부꼈다.
* * *
광인 기획, 기획본부 회의실.
“얘들아. KJ 광고 봤냐?”
김형철의 물음에 경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당연히 봤죠. 그 망할 놈이 찍은 광곤데.”
“덕모는?”
“네, 봤어요.”
지난 주말 KJ의 광고가 전파를 탔다. 예상대로 주인공은 윤도식.
코믹 이미지를 벗은 윤도식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KJ의 얼굴을 연기했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땀을 흘렸고 KJ의 제품이 가득 실린 화물차를 몰았으며 무거운 박스를 나르고 마트를 찾은 고객에게 시식을 권유했다.
모범적인 기업 이미지 광고이자 성실한 윤도식의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한 광고였다.
“그것들 카피 하난 기똥차게 뽑아놨던데.”
경하나의 말에 떠오른다. 이번 논란에 대한 KJ의 생각이 담긴 헤드카피.
[KJ는 고객만 생각합니다. 더 건강한 먹거리, 더 안전한 먹거리를 위해 오늘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진심. KJ식품.]
석양을 배경으로 KJ의 유니폼을 입고 묵직한 박스를 든 채 슬로 모션으로 뒤돌아보는 윤도식.
환하게 웃는 그를 배경으로 떠올랐던 헤드카피는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는 이렇다.
“솔직히 잘 만들었어요. 윤도식 연기도 좋았고.”
“그래서 더 열 받아. 뒤통수치고 저쪽으로 간 놈이 그렇게 웃고 있는 꼴 보니까.”
KJ, 그리고 성수 기획은 이번 광고에 명확한 메시지를 숨겨두었다.
카피 논란, 불공정 논란. 불매 운동. 우린 관심 없다. 우린 오직 고객에게 더 좋은 식품을 제공하는 일에 힘쓸 뿐. 그래, 너희는 소모적인 기업 전쟁에 집중해라. 우린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겠다.
김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발끈해서 바로 반박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대처가 좋아.”
만약 이번 논란에 KJ가 정면으로 반박했다면 그 결과가 결코 좋지 않았을 거다. 그들의 비윤리적 경영은 잘 알려진 이슈였고 자신을 향한 비난의 손가락을 꺾어버리면 더 큰 반발이 나왔을 거다. 분명 그다음 맞게 될 건 발길질.
하지만 그들은 현명하게 이슈를 흘려보냈다. 이번 광고는 무대응 원칙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
“윤도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죠.”
KJ는 나빠진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윤도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마치 회사 모든 이미지를 윤도식의 이미지로 덮을 듯 모든 곳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TV 광고, 옥외 광고판, 버스 택시는 물론 택배 차량에까지. KJ의 물량 공세는 상상을 초월했고 덕분에 대한민국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지난 주말 시작된 광고는 이번 전략의 정점.
“아무튼 당분간 지켜보자고, 승패는 대중이 가려줄 테니까.”
아주와 KJ, 오리지널과 카피, 진짜와 가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대중은 나름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이고 결과는 무거운 책임으로 돌아올 것이다.
“참, 덕모야.”
“네, 팀장님.”
“슬슬 다음 광고도 준비해야지?”
다음 광고, 광인 기획과 아주식품이 끈끈한 파트너 관계가 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바로 그 광고.
“네 준비 중이에요.”
“그래. 별문제는 없고?”
“아뇨. 큰 문제가 있죠.”
생각하면 골치 아프다.
“광고 모델이 문제예요. 그걸로 아주 쪽도 골치 아픈 것 같더라구요.”
“그럼 큰일이네. 이번 광고는 모델이 전분데.”
김형철의 말처럼, 이번 광고는 아주 음료군의 대장격인 이온 음료 ‘제로 스웨트’의 여름 광고다.
제로 스웨트는 국내 출시 30년 이상된 전통의 음료이자 해마다 여름 시즌 엄청난 매출을 뽑아내는 스테디셀러.
게다가 마케터에게 제로 스웨트의 위상은 독보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출시 초기 형성된 이미지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제품이자 오랜 시간 광고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과 고집의 대명사.
그것이 이온 음료 시장의 개척자인 제로 스웨트였다.
“작년하고 재작년 모델했던 걸그룹은 해체했어요. 올해 모델 결정해 놨는데 얼마 전에 학폭 이슈 터지는 바람에 계약해지 됐고요.”
제로 스웨트는 매년 가장 핫한 여가수 또는 걸그룹을 모델로 선정한다. 반복되는 광고 패턴, 매년 똑같은 배경과 구도를 보여주면서도 한결같이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 이유다.
“그렇지 않아도 아주식품 홍보팀 하고 회의 있어서 지금 출발해야 돼요.”
어느덧 3월, 5월에 맞춰 광고를 내보내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에휴 덕모가 고생 많네. 쉬지도 못하고.”
그가 쓰게 웃었다.
“이번 광고 끝나면 휴가 쓰고 싶습니다.”
“그래그래. 그렇게 해.”
그때 김형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매니저님. 네?”
전화기를 귀에 붙인 그의 표정이 이내 경악으로 물든다.
“정말요? 아니…… 무슨 그런 일이?”
영문을 모르는 나와 경하나는 눈만 깜빡였다.
“보내주시면 좋죠. 네, 확인해 볼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김형철이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본다.
“무슨 일이에요?”
“덕모야.”
“네?”
“우리 큰일 날 뻔했다.”
설마 아주 광고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김형철의 핸드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야 이거 봐봐. 하나 너도. 지금 막 기사 올라오기 시작하나 보더라.”
핸드폰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스튜디오 판타지아 매니저가 보낸 문자엔 링크 하나가 걸려 있었다.
김형철이 링크를 누르자 화면에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화면에 나타난 얼굴, 그 위 헤드라인을 본 순간 난 두 눈을 의심했다.
[배우 윤도식, 사기 및 폭행 혐의로 현장 구속.]
“사기? 폭행? 이런 미친.”
하나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
김형철이 화면을 쓸어내렸다. 기사의 본문은 헤드라인보다 충격적인 것이었다.
“무명시절에 동거녀한테 돈을 빌렸어? 성공하고 입 닦았고?”
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만 해도 배우의 커리어에 엄청난 타격. 하지만 기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하니까 돈 갚겠다고, 집으로 오라고 했고…… 폭행…… 경찰에 체포, 허.”
이후의 말은 끝을 의미했다. 윤도식이라는 배우의 커리어는 물론 인생까지도.
“미쳤구나? 윤도식.”
“와…… 진짜 뭐야?”
기사의 끝에 달린 댓글엔 벌써 수백 개의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와. 쓰레기.]
[돈 갚겠다고 불러놓고 때려? 진심 충격.]
[지금 윤도식 광고 나오는데. 당신에게만 진심? 돈에게만 진심이겠지?]
[끝났네 윤도식.]
댓글의 분위기는 충격, 배신, 그리고 경멸.
“와…… 정말 큰일 날 뻔했네.”
김형철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광고를 만드는 기획사도 그 광고를 내보내는 광고주도 모델의 일탈은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다.
“망할 놈, 그 인성 어디 안 가는구나.”
경하나가 중얼거렸다.
난 여전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오는 댓글 중 이제 막 등록된 댓글 하나.
[진짜 쓰레기 놈이 쓰레기 회사 광고를 찍었네.]
한동안 그 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