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30화 (30/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30화

30. 진짜와 가짜(6)

서이준.

그가 광인 기획으로 들어왔다. 매니저도 기획사 직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인간 외의 미지의 생명체를 만난 것 같은 느낌.

그의 등장에 사무실 모두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이끌린 것처럼.

그렇게 바라본 곳에 서이준이 있었다. 누군가 반사판을 비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느끼며 한동안 모두가 넋을 놓고 그의 워킹을 바라보았다.

서이준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악수를 나눈 강미희는 다리가 풀렸는지 선 채로 비틀댔고 경하나의 얼굴은 물감을 칠해놓은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그건 여자들에게만 국한된 반응은 아니었다.

“서이준입니다.”

“……아, 안덕몹니다.”

“아! 안덕모 카피라이터님.”

어찌 놀라는 모습까지 저리 완벽할 수 있는지. 난 서이준을 놀라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멋진 광고더군요. 좋은 작품 찍을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왜인지 몰라도 정신을 차렸을 땐 난 그에게 허리를 숙인 채였다.

“제가 고맙죠.”

그가 천상의 미소를 지었다.

충격과 공포, 살아 있는 채로 경험하는 현세에 강림한 천사와 악수를 나누는 경험. 하지만 그 신비한 경험들은 차혜민 본부장의 등장과 함께 와장창 깨져 버렸다.

“야! 서이준.”

신성모독에 경악한 시선들이 차혜민에게 향했고.

“누나!”

천사의 반응에 놀란 시선들이 서이준에게 향했다. 조금 전까지 천사가 있던 곳에.

“아니, 왜 맨날 바빠. 전화도 씹고.”

앙탈을 부리는 마흔의 어리광쟁이가 있었다. 한달음에 차혜민에게 달려간 서이준. 크게 벌린 팔로 차혜민을 끌어안으려는 찰나.

“스탑.”

팔을 벌린 자세 그대로 서이준이 굳었다.

“줘 터지기 싫으면 조용히 따라와.”

“네. 누님.”

혼란의 빠진 수십 개의 눈동자만이 정신없이 본부장과 서이준을 오갔다.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서이준 측은 이번 광고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처럼 모든 조건을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가 광고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상태인 아주식품이었기에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 미팅 당일 촬영일이 확정되었다. 급한 촬영 일정에 촬영장 세팅까지 해야 했지만 스튜디오 판타지아는 신속했고 예정대로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촬영 당일.

나와 경하나 팀장과 본부장, 그리고 이미래 팀장은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세트장이 위치한 양주로 향하는 승합차. 난 운전대를 잡은 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동생이요?”

“그래.”

이미래의 집요한 물음은 결국 본부장의 답을 끌어냈다.

“근데 성이 다르잖아요. 본부장님은 차 씨고 서이준은 서 씨…… 아!”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놀란 듯 이미래가 손을 들어 자기 입을 틀어막는다.

“설마 아버지가 다른?”

대체 입은 왜 막은 건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차혜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종사촌이야.”

“아하.”

이미래가 짝 박수를 쳤다.

서이준과 차혜민의 관계를 두고 많은 오해와 억측이 있었다. 단순히 얼굴만 아는 사이가 아닌 건 분명했고, 그래서 나온 추측은.

‘결혼 전 애인?’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본부장이 서이준을 편하게 대했던 이유.

“이준이 부모님 일찍 돌아가신 거 알지?”

대스타에 대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이준은 어려서 사고로 부모님의 여의고 고생 끝에 배우로 대성했으며 그의 성장사는 현재의 서이준을 만들어준 중요한 스토리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컸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서이준이 불우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지만 도움을 준 친척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그게 바로 차혜민의 집이었다는 말.

깨달음을 얻은 이미래가 존경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그래서 컴백하라고 하신 거예요?”

“아니. 마침 상황이 좋았어. 오랫동안 쉬어서 슬슬 복귀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아.”

아무리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차혜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제안이었다면 받아들였을까?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CF 모델로?

“내가 왜 이런 얘길 해줄까?”

멍한 표정이 김형철이 고개를 저었다.

“막 대하라고.”

“네? 누굴?”

“누군 누구야? 서이준이지.”

본부장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걔 10년 만에 연기하는 애야. 대배우네 뭐네 사정 봐주지 말고 다른 모델하고 똑같이 대해. 알겠어?

“네.”

차는 곧 세트장에 도착했다. 곧 시작될 촬영 준비로 분주하고 정신없는 현장이지만 오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짐을 나르면서도, 카메라를 만지면서도,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입구 쪽을 힐끔대는 사람들.

건드리면 끊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한 현장이었다.

“본부장님. 오셨네요?”

“네.”

차혜민의 등장에 촬영감독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준비는요?”

“진작 끝났죠. 모델만 도착하면 돼요.”

“좋아요.”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거 오랜만에 긴장되네요.”

감독의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 말 마세요. 모델 앞에서 긴장하는 카메라 감독은 없어요.”

“하하. 그치만 모델이 서이준인걸요.”

감독과 차혜민이 대화를 나누며 멀어졌다. 세트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나. 저것들은 어떻게 알았대?”

“응?”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바라보던 쪽은 세트장의 입구 거기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KTV에서 왔어요. 촬영 방해 안 해요. 쉬는 시간에 진짜 짧게 인터뷰만 할게요.”

“안돼요. 이 안은 출입금지예요.”

“그럼 카메라만, 딱 10초만 찍을게요.”

“어허, 안 된다니까요?”

세트장 안으로 들어오려는 기자들과 막아서는 진행요원들.

“내가 판타지아 대표님하고 술도 먹고 목욕도 하고, 어?”

“아 비켜요!”

하지만 소란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스타채널에서 왔는데.”

“잠깐만 들어갈게요. 저 촬영 스태프예요. 출입증? 안에다 두고 왔는데.”

취재진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서 샌 거지 뭐.”

이번 광고를 위해 세 개 회사가 움직였다. 정보가 새지 않을 리 없고 새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빠르게 냄새를 맡는 족속들이 저 기자라는 족속들이다.

“야! 다들 모여. 뚫리겠다.”

소란은 몸싸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쪽으로 붙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서이준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왔다.”

“야, 야, 카메라!”

“뭐 해, 뛰어! 달려!”

썰물처럼 입구에서 빠져나가는 기자들. 경하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왔나 보다. 주인공.”

“그래.”

퍼버벙.

“서이준 씨!”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터지기 시작한 카메라 플래시, 커지는 취재진의 소음과 함께 아주식품 광고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여보. 리모콘 줘봐.”

아내의 목소리는 소파 오른쪽에서 들렸다. 남편은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리모콘을 왼손으로 고쳐쥐었다.

“싫은데? 아직 내 거거든?”

토요일 아침 이 시간 리모콘의 주인은 남편이다. 물론 오후부턴 아내에게 넘어가지만 이 룰은 결혼 직후 합의한 일종의 암묵적 합의였다.

“아니. 지금 광고하잖아. 잠깐만 돌리라고.”

남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됨.”

단호한 거부에 아내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그러니까 그냥 TV 한 대 더 사자니까?”

“에효, 말을 말자.”

아내의 빠른 포기,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창 라면 광고가 나오는 중. 여자 모델의 화끈한 면치기를 끝으로 한 편의 광고가 끝났다. 그리고 이어서 시작된 광고.

[한 남자가 있습니다.]

검은 화면에 나타난 글자와 함께 광고가 시작되었다. 흑백 처리된 교실, 학생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하나하나 떨어진 책상, 그 사이를 오가는 감독관. 그렇다, 지금은 시험시간이다. 학생들은 시험지에 집중하며 열심히 문제를 풀어가는 중.

교실을 비추던 앵글이 천천히 줌인한다. 그리하여 드러난 주인공의 얼굴.

슥슥.

바쁘게 뭔가를 적어나가는 손길이 정성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화면이 전환된다.

“어?”

화면에 등장한 얼굴에 남자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서이준 아냐?”

아내가 주인공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세상에. 컴백한 거야?”

“아. 조용히 해봐.”

주인공은 대학생이 되었다. 캐주얼한 옷차림, 마흔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주인공이 캠퍼스를 걷는다.

“야!”

누군가 주인공을 부른다.

“리포트 다 했냐?”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 물음. 주인공이 쓰게 웃었다.

“밤새웠다 어제.”

“그럼 좀 빌려줘. 난 못 하고 잠들었단 말이야.”

주인공이 망설인다. 하지만 잠시 후 가방을 내려놓는다.

“마지막이다 진짜.”

가방에서 꺼낸 USB. 화면 너머에서 그걸 건네받은 남자가 답한다.

“그럼 당연하지.”

[모범적인 대학생이자]

화면이 다시 전환된다.

주인공은 직장인이 되었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서 사원, 이리 와봐!”

“네 과장님.”

주인공이 자리에서 멀어진다. 카메라는 여전히 책상 위에 있었고 그래서 주인공의 모습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누군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자 주인공이 연신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화면 너머에서 나타난 손 하나.

슥.

그 손이 자리에서 서류 몇 장을 집어간다.

[성실한 직장인이었으며]

화면이 바뀐다.

불 꺼진 사무실. 홀로 밝혀진 스탠드 아래 주인공이 잠들었다. 주인공의 뒤에서 움직이는 실루엣, 다가온 실루엣이 멈추고 손 하나가 나타난다. 그리고 화면 너머에서 손 하나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컴퓨터에서 USB를 빼내는 손. 실루엣이 멀어진다.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화면이 바뀐다.

사무실에서 시상식이 한창이다. 수상자에게 꽃다발이 전달되고 폭죽이 터진다. 부서장이 신뢰 가득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고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그는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예식장. 하객석에 앉아 있는 주인공이 보인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빛. 잠시 후 주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결혼에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드세요.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 어?”

주례가 당황했다. 하객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집중된 곳에.

“……뭐야?”

“누구야?”

주인공이 한 손을 치켜들었다.

바뀐 화면에 주인공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주인공의 여자였던 신부를 빼앗아간 그였다. 잠든 주인공의 성과를 훔쳐 간 것도, 자리를 비운 새 보고서를 빼낸 것도, 밤새 작성한 리포트를 베낀 것도, 학창 시절 주인공의 답안지를 컨닝한 것도 바로 그였다.

광고의 처음. 시험 중인 교실이 다시 등장한다. 바뀐 화면에서는 보인다. 주인공의 어깨너머 답안지를 힐끔대는, 야비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화면이 검게 변하고 글자가 떠오른다.

[거짓은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짜는 진짜가 되어선 안 됩니다.]

밝아진 화면, 웅성거리는 하객들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치켜들고 있는 주인공.

[이제 아주식품이 선언합니다.]

밝혀진 화면, 빛나게 환한 미소를 머금은 주인공.

“반대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혼란에 빠진 예식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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