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29화 (29/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9화

29. 진짜와 가짜(5)

아침 6시 반.

서울 강북구의 어느 공원. 겨울의 늦자락에 찾아온 한파에 공원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탁탁탁.

멀리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졌고 마침내 어둠을 뚫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새벽의 공원을 달리는 차혜민. 얇은 트레이닝복의 그녀가 달려왔다.

아침 러닝은 한결같이 지켜온 그녀의 루틴이었다. 마흔의 나이에도 전성기의 건강과 외모를 유지하는 비결. 그건 독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탁. 탁…… 탁.

러닝을 멈춘 그녀가 양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헉, 헉, 후.”

흘러나온 뜨거운 숨이 만들어낸 짙은 입김이 조용한 공원 위로 솟아올랐다.

손을 들어 스마트워치를 확인하는 그녀. 잠시 후 쓰게 웃는다.

“힘드네.”

한결같이 목표를 정해 놓고 달렸다. 하지만 오늘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지쳐버렸다.

“나도 이제 늙었나?”

그녀가 쓰게 웃었다.

아침 8시 50분.

출근을 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안녕하십니까.”

본부장의 등장을 알아본 직원들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래, 좋은 아침.”

사무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하다. 두 개 팀 열 명이 넘는 기획본부 직원으로 북적거려야 할 사무실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한산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차혜민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거긴 기획 2팀 이미래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본부장님.”

“그래. 굿모닝, 미래 팀장.”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기를 둔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전기 포트를 들고 뒤돌아서는데 어느새 쫄래쫄래 따라온 이미래 팀장이 눈에 들어온다.

“왜?”

“급히 결재받아야 할 게 있어서요.”

이미래 팀장이 결재서류 하나를 내민다. 차혜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찾아온다.

“그냥 책상 위에 올려놓지 뭐하러 기다리고 있어?”

“아…….”

이미래 팀장이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신경이 좀 쓰여서요.”

“뭐가?”

“본부장님 요즘 계속 저기압이셨잖아요.”

정수기에 전기 포트를 가져다 대던 차혜민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고 이미래 팀장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고객 눈치 보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우리끼리는 그러지 말자고.”

투명한 포트에 딱 두 잔만큼의 물을 담은 차혜민이 뒤돌아섰다.

“비효율이고 쓸데없는 격식이야.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네. 그럼요.”

머쓱해진 이 팀장. 그녀가 쭈뼛대며 물러난다.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 차 한 잔만 내리고 검토해 줄게. 아, 미래 팀장 것도 내릴 테니까 마시고 가.”

달그락, 달그락.

다기를 다루는 능숙한 손놀림, 잠시 후 두 잔의 차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차혜민이 소파에 앉는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음미한 후 결재판을 들어 올린다.

“시안 나왔나 보구나?”

“네. 수정 요청 들어와서 어제 다시 작업한 거예요.”

“그래. 잘 나왔네.”

이미래 팀장. 본부장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능력 있는 디자이너다. 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뽑아내는 실무자인 동시에 기획 2팀을 누구보다 잘 이끌고 있는 좋은 리더다.

“그래. 이렇게 가자.”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이미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본부장의 사인이 떨어졌다. 결재판을 돌려받은 이미래 팀장이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는다.

그제야 눈에 본부장이 직접 내려준 찻잔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이미래 팀장이 오만상을 찌푸린다.

“미래 팀장은 여전히 차에 적응을 못 하는구나?”

“하하.”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건 살짝 밀어 놓는다.

“저 쓴 거 못 먹는 거 아시잖아요.”

“억지로라도 마셔. 몸에 좋은 거야, 그거.”

“……네.”

밀어 놓았던 잔을 들어 올리며 이미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기획 1팀은 아침부터 어디 갔어?”

“1팀이요?”

이미래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인다.

“외근 나갔나?”

“아뇨. 회의실에 있어요.”

“회의?”

차혜민은 출근 시간 10분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야근이 잦은 광고 기획사는 보통 아침에 회의를 하지 않는다.

이상함을 느낀 차혜민. 그녀가 묻는다.

“언제부터?”

“아 모르셨구나?”

은근슬쩍 다시 한번 찻잔을 밀어 놓은 이미래가 중얼거렸다.

“어젯밤부터예요. 걔네 밤샘 회의했어요.”

입술에 찻잔을 붙인 자세 그대로 차혜민이 얼어붙었다.

* * *

“자, 자. 다들 마지막으로 정신들 차리고.”

책상 위엔 온통 어지러운 메모들. 화이트보드엔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선과 글자들.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자.”

자리에서 일어선 김형철이 손을 뻗었다. 수북하게 쌓인 복사지들이 흩어졌고 그 덕에 한편에 쌓였던 과자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회의실에 그 누구도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하게 종이를 뒤져 찾아낸 복사지 한 장.

툭툭.

쓰레기를 뒤져 보물을 찾듯 조심스레 종이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정리가 끝난 그 종이를 들어 팀원들에게 내민다.

“최종 승자는 이거네. 다들 동의해?”

“네에.”

오늘따라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 갈색 머리 위에 안경을 걸친 경하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네. 동의요.”

손가락 끝으로 눈꼽을 슥슥 비비며 강미희가 대답했다.

“저도! 이견! 없습니다.”

툭툭 힘주어 끊어내는 말투. 두 눈에 활활 불길을 피워 올리던 신용재의 대답. 모두의 대답을 확인한 김형철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향했다.

“그럼 덕모?”

“네.”

“네 아이디어로 최종 간택…… 아니, 아니, 선택, 채택? 뭐가 됐든 자! 박수.”

물론 그 누구도 박수를 치는 이는 없었다.

14시간의 자비 없는 철야 회의. 마침내 지옥 같던 광고 기획 회의가 끝났다. 경하나가 책상 위로 무너졌고 강미희의 몸이 의자 아래로 미끄러졌으며 신용재는 십 분 넘게 유지하고 있던 허공 앉기 자세를 마침내 풀었다.

“야, 야! 잠들지 말고 조금만 정신 차려. 지금 본부장님한테 보고하고 올 테니까.”

소중한 복사지를 들고 회의실 문으로 걸어가는 김형철.

덜컹.

하지만 문은 타이밍 좋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차혜민 본부장, 그리고 그 뒤를 이미래 팀장이 따라붙었다.

“아니…….”

회의실로 들어서 죽어가는 팀원들과 쓰레기장이 된 회의실을 훑어본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밤새 회의했다며? 애들 집에 안 보낸 거야?”

“아 그게.”

김형철이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안 보낸 거 아니에요.”

“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애들 퇴근 안 시키고 그럼 잡혀가요.”

차혜민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인다.

“다 자진해서 남았어요. 진짜로요, 하늘에 대고 맹세해요.”

억울한 김형철의 말에 어제 일이 떠올랐다.

윤도식이 KJ로 넘어갔으니 우리 쪽에도 새로운 모델이 필요했다. 이런 경우의 결론은 보통 꿩 대신 닭이어야 하지만.

“서이준 오케이 했대. 시간도 이쪽에 맞춰준다고 했나 보더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젯밤 김형철의 말처럼 우리 쪽에 서이준이 붙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주식품 쪽엔 본부장님이 직접 전달하신 모양이더라.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새 광고 기획 만들어야지.”

“사실 구상해 둔 게 몇 개 있는데.”

나도 그간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았다. 경하나가 말했던 대로 모델이 누구 건 써먹을 수 있는 새로운 광고를 고민해 왔다.

“그래? 그럼 하나랑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할까?”

시간은 퇴근 시간이 지난 저녁 7시. 그리고 팀장의 회의 제안은 바로 신호탄이 되었다.

“팀장님, 저도 같이 봐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강미희가 말했고.

“어, 저도 같이요.”

그런 강미희와 이쪽을 힐끔대던 신용재가 따라붙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기획 1팀 전체 회의. 서이준이라는 카드를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한 토론과 논박이 이어졌고 내가 준비한 광고 안에 대한 검토와 평가가 이어졌다.

화장실과 야식을 사러 갈 때를 빼놓고 그 누구도 회의실을 떠나지 않았다.

“좋아,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

자정이 지난 시간. 결국 퇴근을 포기한 김형철의 제안을 시작으로 기획 1팀 모두가 그날 저녁을 새하얗게 불태우고 말았던 것.

아침까지 이어진 토론의 결과 기획 1팀의 최종 광고 안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상황을 파악한 차혜민.

“결과물은 나왔어?”

“네. 날밤 새웠는데 결과물 안 나오면 안 되죠.”

회심의 미소와 함께 김형철이 들고 있던 복사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품 안에서 안경을 꺼내 쓴 본부장이 선 채로 그걸 살펴 나갔다.

약 일 분 정도의 시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뚫어져라 그걸 바라보던 차혜민.

“이거 누구 생각이니?”

긴장한 채 본부장의 눈치를 살피던 팀장이 대답했다.

“누구긴요.”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덕모죠.”

호불호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빤히 날 바라보는 본부장.

“그래, 알겠어.”

다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굳건하던 그녀의 입술이 약간 말려 올라갔다는 것.

본부장이 복사지를 이미래 팀장에게 내밀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이미래가 눈을 껌뻑인다.

“미래 팀장. 오전 중에 콘티 만들 수 있지?”

이미래가 받아 든 종이를 살폈다. 어지러운 낙서로 보이는 종이에 찌푸려지는 이미래의 미간, 하지만 그녀의 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졌다.

“네. 가능해요.”

“오케이. 콘티는 미래 팀장이 맡고, 나머지는 내가 챙길 테니까…….”

지시를 끝낸 본부장이 회의실의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니들은 퇴근해.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당장 집에 가서 자.”

서릿발 같은 명령이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팀원들이 주춤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손대지 마. 쓰레기도 그냥 둬. 지금부터 사무실에서 사라지는데 10초 준다. 십, 구, 팔…….”

후다닥.

그렇게 쫓겨나듯 회의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 * *

이후의 일은 본부장의 진두지휘 하에 착착 굴러갔다.

지시를 받은 기획 2팀은 점심시간도 되지 않아 완성된 콘티를 내놓았다. 기획안은 본부장이 손수 작업해 정리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10분 후 콘티를 붙인 최종 광고 기획안이 대표에게 보고되었다. 승인이 떨어졌다. 기획안이 아주식품 조성록 부장에게 전달된 건 오후 2시.

아주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대표까지 배석한 회의에서 기획안은 만장일치로 컨펌되었다. 결과는 즉시 광인 기획에 전달되었고 그때부터 차혜민 본부장의 전화가 사방팔방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후 4시.

꿀 같은 낮잠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기획 1팀 직원들에게 본부장이 통보했다.

“컨펌됐고 촬영 일정도 확정 끝났어. 내일 아침에 광고 모델하고 판타지아 담당자들 회사로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그렇게들 알아.”

낙서나 다름없는 초안을 전달한 것이 오늘 아침. 하루 업무가 끝나기도 전에 수십 개의 업무를 진행해 놓았다는 본부장의 말에 김형철은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네?”

통보를 마친 차혜민이 뒤돌아 걸어갔다.

“아, 맞다.”

하지만 발걸음은 세 걸음 만에 멈추었다.

“참, 덕모야.”

“네.”

“이번 기획 좋더라. 아주 쪽도 만장일치로 컨펌 냈고.”

“아, 네.”

“역시 메인 자격 있네.”

말을 마친 그녀가 쿨하게 뒤돌아섰다. 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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