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5화
25. 진짜와 가짜(1)
핫초코 달콤의 광고가 방송을 탄 후 열흘. 그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일들은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광고는 예상대로 크게 성공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낸 두 편의 광고였지만 첫 방송이 나가고 이어진 주말을 거쳐 다음 주로 이어지며 무서운 기세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커뮤니티와 온라인엔 ‘윤도식의 반전 광고’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속속 올라왔고 그렇게 올라온 게시물엔 최소 수백, 많게는 수만의 조회 수가 찍혔다.
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만든 광고를 대중이 퍼 나르고 공유하는 상황. 단언컨대 그건 광고주 입장 백번 절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말이 지나자 광고는 다양한 형태의 짤로 변환되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지난 2년간 공고했던 핫초코 시장에도 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얘들아 다들 주목!”
월요일 오후. 본부장실에서 돌아온 김형철 팀장이 짝짝 박수를 쳤다.
“달콤 매출 엄청 늘었댄다. 그쪽 홍보팀에서 연락받았는데 지난주 판매량이 전주 대비 다섯 배 찍었대.”
“와!”
“대박.”
오리지널이면서 카피 제품에 밀려 늘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던 달콤은 2년이라는 굴욕의 시간을 딛고 반전의 드라마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좋겠수. 1팀은.”
“아이 깜짝이야.”
어느샌가 다가온 이미래 팀장.
“비켜봐. 나도 1팀한테 한마디만 하자.”
팀장의 어깨를 밀어내며 이미래 팀장이 험험 헛기침을 했다.
“팀장 뭐 이런 거 다 내려놓고 선배로서 부탁 하나만 할게.”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살살 해주면 안 될까?”
이미래가 두 손을 들어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근엄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모습은 애절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이러다 우리 애들 단체 입원하게 생겼다. 일이 계속 쌓이고 있다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아주식품 역시 광고의 성공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달콤과 관련한 각종 이벤트 시안 의뢰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팝업 광고, 전광판 광고, 버스 택시 광고, 게다가 이벤트 시안까지.
대부분의 일이 기획 2팀에서 쳐내야 할 일들. 인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일감이 쏟아지니 팀원이 갈려 나가기 시작했고 현재 2팀은 팀장의 말처럼 불난 호떡집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신입사원 충원받기로 한 건가?”
김형철 팀장이 물었고.
“그건 그렇지, 뭐. 다 우리 팀으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미래가 다시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그러니까 신입 들어올 때까지만이라도 좀 살살…… 진짜 살살 좀 해줘. 알겠지?”
부탁을 마친 이미래 팀장이 멀어졌다. 뚱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형철이 작게 중얼거렸다.
“살살은……. 아직 본 게임 시작도 안 했는데.”
이상함을 눈치챈 강미희.
“또 뭔 일 있어요?”
“음.”
열릴 듯 말 듯 하던 김형철의 입술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팀원들을 둘러본다.
“뭐 차차 알게 될 거야. 참 그리고 오늘 저녁은 시간들 좀 비워.”
“왜요?”
“아주식품 홍보팀에서 저녁 사러 온단다.”
“오?”
“네? 광고주 가요?”
광고주가 저녁을 산다. 아주식품이 광인 기획에게 얼마만큼의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지표다.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경하나가 물었다.
“뭐 사준대요?”
“한우, 등심.”
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네 글자. 경하나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린다. 그래 저번에 나한테 고기 뜯어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저 녀석 고기에 진심인 편이다.
“일 인분에 5만 원짜리로 쏜다니까 다들 기대해도 좋아.”
“우…… 우와.”
“……한우 등심? 오만 원짜리?”
사막에서 쩍쩍 말라비틀어졌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대박!”
경하나가 탄성을 터뜨렸다.
한우가 불러온 환호와 흥분이 지나간 후. 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차혜민, 잠시 후 난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야. 유명인!”
“…….”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듣고 있는 단어다. 하지만 본부장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카피라이터 광고 모델, 국내에선 첫 케이스일 거야. 안 그래 김 팀장?”
그녀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김형철을 바라보았다.
“흠. 한 회사 카피라이터 전체가 광고에 등장한 건 아마 세계 최초일 것 같네요.”
“아깝네. 시간 맞았으면 나도 나가보는 건데.”
“그러게요? 본부장님 모델로 나왔으면 다 뒤집어 놨을 텐데요.”
장단 잘 맞는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럼 뭐 난 춤이라도 춰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 미안 불러놓고 헛소리만 했네. 덕모, 이리 와서 앉지.”
“아, 네.”
눈알만 굴리고 있던 부하를 뒤늦게 발견한 차혜민이 김형철 옆을 가리켰다.
“기다려. 내가 차 한잔 내려줄게.”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차혜민은 차 애호가다. 그녀가 다가간 곳에 위치한 큼직한 진열장, 거긴 온갖 차와 다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다기를 다루는 소리가 들렸다. 난 목소리를 낮춰 김형철에게 물었다.
“뭡니까?”
“있어. 그런 거.”
아까부터 뭔가를 숨기고 있다. 괘씸한 건 숨기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서 상대가 궁금해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다는 것. 이상한 악취미가 즐거운지 김형철이 음흉하게 미소 짓는다.
“걱정하지 마. 좋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안알랴줌.”
이 인간이? 그때 앞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놓였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로즈마리야.”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찻잔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급하기도 하네.”
차혜민의 입술이 길쭉하게 말려 올라갔다.
“덕모야.”
“네. 본부장님.”
“조만간 아주식품 광고 다 우리한테 넘어올 것 같다.”
숨이 턱 멎었다.
아주식품은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종합 식품회사다. 수십 개의 브랜드, 그리고 수십 명의 전속 모델. 매년 열 편 이상의 TV 광고를 내보내는 대기업.
“그쪽은 벌써 작업 들어간 것 같더라, 주한준 대표가 직접 밀어붙이는 모양이야.”
예상은 했다. 이번 광고로 아주식품이 톡톡히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표인 주한준이 광인 기획의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결이 맞는 두 회사, 그러니 협력 확대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전격적일 거라곤 생각 못 했지만.
“우리도 걸맞은 준비를 해야지? 아주를 전담할 메인 카피라이터를 결정해야 해.”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획본부의 직원을 더 뽑는 이유.
“그래서 대표님하고 얘기를 좀 해봤는데.”
말을 멈춘 차혜민, 김형철 팀장과 눈을 맞춘다. 무언의 사인을 주고받은 본부장의 고개가 작게 끄덕인다.
“덕모 네가 메인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쿵.
격렬한 심장박동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할 수 있겠지, 덕모?”
본부장의 말은 천둥처럼 정수리 위로 내려쳤다.
* * *
아주식품 메인 카피라이터.
엄청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지난번 신한 제약 메인을 맡은 경력이 있지만 광고 기획사 입장에서 아주와 신한은 그 격의 차원이 다르다.
본부장실의 제안이 있은 후 김형철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아주식품의 제안, 그리고 대표와 차혜민 본부장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올해 KJ랑 전면전을 벌일 생각인가 보더라. 그리고 너만큼 그쪽 업계 잘 아는 사람이 없잖아.”
최적의 무기로 내가 선택되었다. 말하자면 ‘이이제이’.
이유는 납득할 수 있지만 입사 6개월 차 햇병아리가 회사 최대 비즈니스의 키맨이 된다. 그 사실은 사내에 큰 파장을 불러올 거다.
생각하니 또 심장 떨린다.
어찌 됐건 카피라이터로서 두 번 다시 없을 엄청난 기회.
“후우…….”
가빠오는 숨을 고르기 위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주임님?”
앞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그리 멍해 있어요?”
“아, 아닙니다.”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좀 드세요. 비싼 고기 다 타네요.”
집게로 고기 몇 점을 집어 내 앞의 접시에 덜어 놓는다.
“감사합니다.”
광고주지만 싹싹하고 예의 바르다. 홍보팀 과장이라고 했던가?
“아뇨. 감사한 건 이쪽이죠. 저 달콤 브랜드 매니저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하하하.”
“아이고! 아니에요.”
“자! 같이 짠합시다!”
회식 자리는 이미 불타오르는 중. 술잔을 머리 위에 털고 있는 김형철. 젓가락으로 고기 꼬치구이를 만든 경하나. 박장대소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린 강미희와 신용재.
“저, 주임님?”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네?”
광고주가 주최한 회식 자리다.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KJ식품 마케팅 출신이시라면서요?”
“아…… 네 맞습니다.”
그가 쓰게 웃었다.
“황재평 이사 잘 알겠네요?”
“네 알죠.”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럼 이번에 성수 기획 대표로 간 것도 아세요?”
“네?”
처음 듣는다. 성수 기획이 KJ와 돈독한 관계라는 건 알지만 둘은 별개의 회사. 아무리 갑을 관계라도 갑의 임원이 을의 대표가 되는 경우는 들어본 적 없다.
“설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달 전에 KJ가 성수 기획 인수했어요.”
오래전부터 검토하던 카드였다. KJ가 성수 기획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기획사를 자회사로 두는 건 메리트 있는 카드였으니까.
다만 성수 기획 오너가 합병에 반대 입장이었고 몇 년째 검토만 하던 카드였다.
“그랬군요.”
“달콤 광고 엎어진 거 황재평 이사 짓이에요.”
“네?”
“그 광고 엎어지게 만들었던 카피라이터 세 사람, 다 성수 기획으로 옮겼더라고요.”
충격이었다. 하지만 거기 황재평이 있다면 가능한 그림이다.
“확실한가요?”
“모든 정황이 딱 맞아떨어지니까요.”
깨달음이 찾아왔다. 주한준 대표가 KJ와 전면전을 치르려는 이유.
그때였다.
우웅.
품 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죄송합니다. 통화 좀.”
“그러세요.”
회식장을 빠져나왔다. 발신자는 조준용, KJ식품 마케팅에 있을 때 친했던 선배.
“네 형.”
[이야, 안덕모?]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황재평 이사?”
[그래, 알아듣는구만. 유명인이 알아봐 주니 기분 좋은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발신자를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는 조준용이다.
“왜 선배 전화번호로…….”
[내 전화 안 받을 것 같아서 빌렸지.]
“무슨 일입니까?”
[싸가지없는 건 여전하네. 은혜도 모르는 자식.]
빠득.
악물린 이에서 거친 소리가 났다.
[이번 광고 잘 봤어. 시즌 대응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귀에 붙은 핸드폰은 뭔가에 짓눌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참. 나 KJ에서 병신 된 얘기는 들었나?]
악의 섞인 목소리는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결국 성수 기획 사장으로 왔네? 다 네 덕이야. 고맙다고 해야 하나?]
“…….”
[참 네 회사 조만간 아주랑 아예 붙어먹을 모양이더라? 너랑 이렇게 계속 엮이는 거 보면 인연이라는 게 참 얄궂다. 그렇지?]
“하아…….”
[지난번에 그랬지? 모르는 놈은 닥치고 있으라고. 뭐 잘됐어. 누가 진짜 모르는지 한번 가려보자고.]
그제야 핸드폰이 귀에서 떨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노라니 뜨거운 뭔가가 울컥 치솟는다.
“황재평 씨?”
목소리는 스스로도 소름 끼칠 만큼 낮고 스산했다.
“개소리 그만하고 핸드폰 주인 바꿔. 듣기 거북하니까.”
[하…… 피차 동감이야.]
들려오는 비웃음. 지그시 깨문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