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4화
24. 그 겨울 강원도에선(7)
시연은 대성공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뽑아낸 두 편의 광고 시연이 끝났을 때 아주식품의 오너 3세이자 현 대표 주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시연회가 끝나고 대표와 독대한 차혜민은 아주식품의 새 광고, 여름 성수기에 맞춰 봄부터 방송 예정인 이온 음료 광고 제작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냈다.
확정된 달콤의 광고는 기획 2팀에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고 완성본을 전달받은 아주식품 홍보팀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 저녁 달콤의 CF 1편과 2편이 첫 공중파 방송이 확정되었다.
“야!”
벌컥.
오늘도 여지없다. 방주인의 프라이버시 따윈 개나 줘 버리겠다는 듯 문을 열어 재끼는 안주미.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아주식품 달콤의 모든 작업이 끝났고 우리 팀은 차 본부장의 배려로 이틀의 전체 휴가를 받았다. 어제 오전에 갑자기 결정된 휴가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 반.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집에 들어왔고 모처럼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한가로운 낮잠을 즐길 수 있었다. 잠도 충분히 잤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은 스타워즈 정주행.
아침 먹고 정리를 마친 후 곧장 본격 시청 모드에 접어든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스타워즈의 명대사.
[아임 유어 파덜.]
바로 그 대사가 흘러나오던 참이었다. 방해자의 등장에 난 재생 중이던 영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다섯 시라고 하지 않았냐?”
녀석의 물음. 난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뭐가?”
“광고 다섯 시에 한다며.”
“아!”
깜빡 잊을 뻔했다. 난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5분 전.
“마마는?”
“못 오신대. 회사일 바빠서.”
“그래? 흠.”
약간 아쉬우면서도 한편 다행이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 뭐 언젠가 보시게 될 테지만 그래도 그땐 내가 옆에 없겠지.
“가자, 가.”
방문을 나서는데 안주미가 삐죽거린다.
“아니, 광고가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계속 나오는 거 아냐? 귀찮게 왜 시간 맞춰 보라고 그래?”
“짜식아. 대단한 거거든?”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방송 예정인 채널로 돌렸다.
“혹시 모델로 우리 오빠들 나오나?”
저 생각하는 꼬라지 하고는.
안주미는 날 오빠라 부르지 않는다. 보통 칭호는 ‘야’거나 ‘너’니까. 대신 녀석이 오빠라고 부르는 남자들이 있다.
한참 해외로 뻗어 나가고 있는 K팝 남성 5인조 아이돌.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 안 나지만 아무튼 내가 만드는 광고에 걔들을 쓸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오빠 호칭도 뺏겼는데 광고까지 찍어주면 너무 호구 같잖아.
“아니거든?”
“그럼 뭔데? 나 약속도 깨고 들어온 거라고.”
“시끄럽다 앉아.”
난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미야, 네겐 광고를 봐야 할 의무가 있단다.”
* * *
방송 첫날인 오늘 주요 채널에 두 편의 시리즈 광고가 동시 상영된다.
두 편을 합하면 거의 1분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주인공인 윤도식이 열연을 펼친 만큼 1분의 시간은 절대 길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안주미를 힐끗거렸다. 20년 넘게 데리고 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이 녀석 안목이 제법이다.
누구보다 일찍 덕질을 시작한 보이그룹은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물론 해외로 진출해 대박이 터졌고 녀석이 개봉을 기다린 로코는 어김없이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나와 취향 차는 명확하지만 녀석의 반응을 통해 광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 지표랄까?
광고가 시작되었다.
“와. 윤도식이네?”
녀석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렇다. 이 녀석 강 대리일 때부터 윤도식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광고 직후 그는 간판 드라마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어김없이 안주미의 안목은 적중했다.
“와하하. 뭐야, 저게.”
나 잡아봐라 편이 끝났을 때 녀석이 짝짝 박수를 치며 넘어간다. 반응을 분석하자면 ‘성공’.
“음, 좋아.”
녀석의 평가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2편이 이어 시작되었다.
“뭐야? 한 편 더 있어?”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두 손을 뻗어 녀석의 양쪽 뺨을 잡고 화면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쪽 보지 말고 TV 봐, TV.”
화면을 향한 녀석의 옆얼굴. 불만스러운 입술이 쭈욱 삐져나온다.
화면엔 윤도식의 고난이 펼쳐진다. 스튜디오 판타지아의 촬영 기술은 기대대로였다. 대관령 설원을 킬리만자로 정상으로 바꾸어 놓은 연출력에 난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도식 저기까지 보낸 거야? 너무했다.”
그래서 녀석도 주인공이 어디 험준한 산에서 촬영했다고 착각하는 것. 마침내 주인공이 정상에 도착했다. 감동적인 포효에 이어 반전이 펼쳐진다.
“아니? 아하하하.”
이번에도 성공이다. 유사한 구성의 반전 구성이 두 편이다 보니 효과가 반감되지 않을까 했던 우려는 단숨에 날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들어 올린 손바닥으로 안주미의 두 눈을 가렸다.
“아 뭐야!”
“오케이, 감상은 여기까지.”
“치워!”
탁.
녀석이 거칠게 내 손을 쳐냈다. 무슨 힘이 그리 좋은지 가린 손은 치워졌고 그렇게 확보된 시야에 절벽 위에 고립된 나와 경하나의 모습이 잡힌다.
“하나 언니? 뭐야? 언니랑 너도 광고 나왔어?”
“아…… 안 돼.”
숨길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본다.
그랬다. 나와 경하나는 이번 광고 엔딩신에 출연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 내린 강원도, 그것도 하루 전 섭외로 캐스팅할 수 있는 연기자는 많지 않았고 그 덕에 나는 물론 팀장과 두 대리까지 엑스트라로 광고에 참여를 해야 했다.
배역이 결정되고 대사가 있는 역할과 없는 역할 중 어떤 걸 맡을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때만큼은 나와 경하나가 하나 된 목소리를 낸 첫 번째 케이스였던 것 같다.
배역을 정하라는 스튜디오 판타지아의 진행팀 담당자 앞에서 우린 목소리를 높였다.
“제비뽑기를 하죠.”
“그래요. 공정하게.”
문제는 팀장과 두 대리 역시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것.
“난 대사 못 해.”
“나도 싫어.”
“직급으로 해. 직급으로.”
팀장과 신용재, 강미희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보탰다. 난 간절한 표정으로 신용재의 굵직한 팔을 가리켰다.
“대사 고작 두 줄이거든요? 그리고 담당님, 이 팔뚝 한번 보세요.”
다가온 담당자가 신용재의 팔을 붙잡는다.
“우와.”
한 손으로는 절반도 잡히지 않는 굵직한 팔 두께, 담당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오른다.
“이런 몸은 무조건 엔딩씬에 써야 해요.”
신용재가 주춤대며 물러났다. 난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대리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어요. CF로 주목받아서 스타 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스타?”
“네. 몸짱 스타 많잖아요.”
“와…… 싫어.”
제기랄.
“덕모가 날 너무 모르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주목받는 거야.”
웃기고 있네. 주목받는 거 싫어하는 인간이 사무실에서 엉덩이 빼면서 운동하고 그래?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이 쳐다보면 식은땀이 난다니까?”
그렇게 결판이 났다.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형철 팀장이 선고를 내렸다.
“엔딩씬은 덕모랑 하나, 우리 셋은 등반대 엑스트라. 결정 끝! 땅땅땅.”
그리하여 그날 저녁. 나와 하나는 앵글만 조정하면 절벽 위처럼 보이는 개울 한 편의 바위 위에 자리해야 했다.
강풍기 바람을 맞아야 했다. 스태프가 날린 눈가루와 얼음 조각은 쉴 새 없이 코와 입안으로 날아들었다.
“컷. 안 주임님, 표정 좀 풀어요! 더. 좀 더.”
영화를 좋아하지만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본 연기가 감독에게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지금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해요. 여긴 천 길 벼랑 위다. 난 여기서 죽는다. 아니! 입은 벌리지 말고!”
다행인 점이라면 처음 연기를 하는 게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
“경 주임님! 캔이 기울어졌잖아요. 어허, 손가락 치워요. 제품 가리면 안 되지!”
때론 나, 때론 하나. NG로 인한 컷은 셀 수 없이 이어졌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박 2일, 몸은 이미 솜뭉치처럼 무거웠고 강풍기는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렸다.
감독은 여기가 벼랑이라고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라 했지만 난 진심으로 위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위기 덕분이었을까? 어느샌가 우린 엔딩컷 속 조연에게 완벽히 감정이입을 시작했다.
“어? 울어요? 야 티슈 티슈.”
카메라 앵글을 보고 있던 감독의 다급한 목소리.
“아니다. 그림 나온다! 야 눈물 닦지 마. 티슈 치우고 눈 뿌려! 자 두 분 감정 고대로 유지하시고.”
숙련된 래퍼처럼 와다다다 주문을 마친 감독이 둘둘 만 대본을 내뻗었다.
“하이 큐!”
그렇게 완성해낸 엔딩컷이었고 광인 기획 입사 후 처음 이 선택을 후회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엔딩컷. 보고만 있어도 창피해 죽고 싶은 저 모습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우와아…… 이럴 수가. 네가 CF 모델?”
녀석이 핸드폰을 꺼내 든다.
“동작 그만.”
난 말 없이 손을 뻗어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누구한테 알리시게?”
“일단 선영이?”
“그 이십만 팔로워?”
끄덕.
“얼마 받고 닥칠래?”
“얼마까지 줄 수 있는데?”
“오만 원.”
“입금부터.”
난 눈물을 흘리며 지갑을 꺼냈다. 열린 지갑에서 나오는 지폐를 바라보며 녀석이 잔인하게 웃는다.
“근데 지금 보니 좀 별로다.”
“계산 끝났다. 무르기 없음.”
“아니, 윤도식 말이야.”
“윤도식?”
난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윤도식이 왜?”
“느낌 좀 별로야. 너무 잘생겨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까…….”
손가락으로 슥슥 볼을 긁으며 녀석이 중얼거렸다.
“성격 좀 안 좋을 것 같아. 그런 사람 있잖아? 겉은 천사인데 속은 완전 딴판인.”
잠시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주방을 가리켰다.
“밥이나 차려라. 저녁 먹자.”
“으이그 진짜.”
녀석이 쿵쿵 바닥을 찍으며 멀어졌다.
* * *
CF 출연, 그것도 탑스타 윤도식과의 CF 출연의 파장은 엄청났다.
휴가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내 몸은 물을 잔뜩 먹은 솜덩이 같았다.
‘으, 피곤해.’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철에서 선 채로 졸았고 덕분에 목적지를 두 정거장이나 지나 되돌아와야 했다.
회사 앞 지하철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오는 길도 마찬가지. 오 분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내겐 마치 천리행군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20년 전에 연락 끊긴 놈까지 전화를 다 하네.’
광고의 엔딩에 내 얼굴이 그대로 나갔고 CF에서 날 알아본 모든 이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전화를 받다 받다 무시하기 시작했지만 핸드폰은 끊임없이 몸을 떨었고 결국 새벽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러다 날밤 새우겠다 싶어 전원을 끄지 않았다면 아마 난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했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마침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팀원들을 본 순간 어젯밤 난리가 내게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획 1팀에 사람이 아닌 좀비들이 있었던 것.
“덕모 왔냐?”
다크서클 때문에 한 마리 팬더로 변신한 김형철이 말했고.
“부재중 전화가 백 통이야, 백 통. 하하…….”
계속 진동하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신용재가 중얼거렸다.
“다들 비슷했군요?”
“우리 집은 동네에 떡 돌린단다. 자식이 TV 나왔다고.”
강미희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 자리로 걸어오니 건너편에 경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코오.
역시나 갈색 파마머리를 사방팔방 흩뜨린 채 숙면 중이시다. 강미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얘는 아예 날밤 깠대.”
핫초코 달콤 엔딩씬의 히로인. 이제 익숙해진 녀석의 코골이를 들으며 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