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23화 (2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3화

23. 그 겨울 강원도에선(6)

설원의 아침. 멀리서 동트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설원을 비추는 화면.

푹, 푹.

누군가 눈 밟는 소리가 들리고.

“나 잡아봐아아라!”

한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이 이동했고 거기 목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하얀 패딩을 입은 그녀는 자신을 쫓는 남자를 뒤로한 채 해맑게 하얀 눈밭을 달리는 중.

“하하. 어디 잡히기만 해봐.”

뒤따르는 남자, 화면 가득 남자의 얼굴이 잡힌다. 대한민국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배우.

CF의 주연 윤도식이다.

“잡히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거다?”

달아나는 여자. 그녀가 깔깔거리며 묻는다.

“소원? 어떤 소원?”

“잡히면 나랑…….”

남자가 발걸음을 멈춘다. 그의 표정에 아주 잠깐의 각오가 스치고 지나간다.

“사귀는 거다!”

“그래. 그러든지.”

돌아온 대답. 윤도식이 환히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짹, 짹.

바뀐 화면엔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귄다.

“헉…… 헉…… 아으.”

다시 등장한 윤도식. 깔끔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흘러내린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왜, 도대체 왜? 잡히질 않는 건데?”

주인공이 애절하게 손을 뻗는다. 그쪽으로 이동하는 카메라 앵글엔 앞장서 달려가는 여자의 모습이 잡힌다.

푹, 푸욱, 푹.

그녀는 살인마에 쫓기는 것처럼 긴박한 표정으로 설원을 내달리는 중.

풀썩.

주인공이 눈밭에 무릎을 꿇는다. 조금 전 나누었던 대사가 에코로 처리되어 재생된다.

[잡히면 나랑 사귀는 거다?]

[사귀는 거다?]

[사귀는…….]

“아…… 사귀기 싫었구나.”

주인공의 깨달음, 그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

화면이 암전된다. 다시 밝아진 화면 속 주인공은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빨간 노을 그리고 유난히 쳐진 남자의 어깨.

윤도식이 중얼거린다.

“아 달달한 거 땡기네.”

그때 윤도식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온다.

“달콤한 거 땡겨?”

주인공이 그를 바라본다. 거긴 달콤 캐릭터가 새겨진 털모자, 정체불명의 남자가 있다.

딸칵.

그가 캔 음료를 따 내민다. 핫초코 달콤이다. 캔에서 따뜻한 김이 폴폴 피어올랐다.

쭈욱.

그걸 받아 마시는 주인공.

“후우…….”

주인공의 표정이 화악 풀어진다.

“고맙습니…… 어?”

캔을 건넨 남자의 모습이 오간 데 없다. 주변을 두리번대던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주인공의 등 뒤로 카메라가 멀어진다.

하얀 설원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그리고 저 멀리.

후다닥.

여전히 전투적으로 설원을 내달리는 여자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아주식품 달콤, 나 잡아봐라. 30초 END.]

광고 시연이 끝났다.

떠오른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아주식품 대표와 직원들, 특히 가장 크게 긴장하고 있던 아주식품 홍보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나왔네요.”

그의 옆자리 임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모델이 윤도식이었어?”

“그렇네요.”

“일주일 만에 어떻게 윤도식을 캐스팅했대?”

홍보팀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도 캐스팅 비하인드는 모른다. 아는 거라곤 좌초가 확정된 광고가 되살아났다는 것과 노 컨펌 조건으로 어떤 광고가 튀어나올까 하는 일주일간의 불안이 끝났다는 것뿐.

“주목 좀 받겠네요. 모델도 좋고 아이디어도 괜찮아서.”

“그래. 재미있네, 신선하고.”

임원의 호의적인 평가. 홍보팀장의 입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대표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표의 반응이 시연의 성패를 좌우한다. 지금 주한준 대표는 시종일관 미소 짓는 중.

“다행이구만.”

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장을 살폈다. 하지만 이상하다. 시연을 마무리해야 할 광인 기획 본부장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 홍보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먼저 아주식품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차혜민이 마침내 입술을 뗐다.

“찍어두신 달콤 광고가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광고 시기도 놓쳤구요. 혹시 어떤 문제였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민감한 이슈에 대한 질문. 섣불리 먼저 입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죠.”

침묵을 깬 건 주한준 대표. 그가 직접 대답할 거라 생각지 않았기에 놀란 시선들이 그에게 쏠린다.

“광고를 만든 건 신생 기획사였습니다. 경험도 적고 노하우도 없었지요. 물론 그걸 제때 대처하지 못한 건 저희였구요.”

대표의 지적, 홍보팀장과 임원이 움찔 굳었다. 고개를 끄덕인 차혜민이 물었다.

“그럼 예전부터 함께한 기획사가 있었을 텐데. 굳이 리스크를 안고 신생 기획사를 쓰신 이유가 있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주식품 직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실례 아닌가?”

“시연회에서 굳이 왜 저런 걸 묻지?”

혼란은 광인 기획 쪽도 마찬가지. 놀란 김형철 팀장이 본부장에게 속삭였다.

“본부장님. 분위기가…….”

하지만 차혜민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양측이 웅성이는 가운데 차혜민과 주한준만이 고요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좋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주한준의 목소리는 선선했다. 그래서 시연장의 혼란은 단숨에 잠잠해졌다.

“전 과거의 방식이 싫습니다. 제가 이끄는 아주식품은 대한민국 최고가 되어야 해요. 10년 넘게 우리 광고를 맡아준 기획사를 교체한 건 그 일환이었구요.”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와는 다른 신선한 광고,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크게 이슈가 될 만한 그런 광고를 원하셨군요?”

“정답입니다.”

“과연 인플루언서 주한준 대표님답네요.”

“하하.”

주한준이 밝게 웃었다.

“그럼 잘 선택하셨습니다. 물론 자의로 저희를 선택한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주랑 광인 아주 잘 맞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그제야 내게도 깨달음이 찾아왔다.

대표 주한준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선행을 적극적으로 알려온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 덕분에 오래전부터 아주식품의 이미지 개선에 큰 역할을 해온 그였다.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그가 회사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지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대중의 관심, 그걸 밑거름으로 성장하는 회사.

차혜민은 주한준의 방식을 꿰뚫어 보았고 그래서 일회성 광고를 통해 더 큰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려 하고 있었던 것.

“이제 광고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하는데…….”

차혜민이 말끝을 흐렸다. 덕분에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향한 시선을 한번 훑어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가는 다음 편까지 본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응?”

“다음 편?”

다시 웅성이는 사람들. 어느샌가 시연장의 모두를 쥐락펴락하게 된 차혜민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광고 시기를 놓치셨지요? 그러니 임팩트는 더 커야 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 광인 기획은 한편이 아닌 두 편의 광고를 만들어 봤습니다.”

쿠궁.

아주식품 광고주들의 귀에 분명 그런 소리가 들렸을 거다.

“두 편?”

“일주일 만에?”

“아니, 어떻게?”

한 편의 광고를 찍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일주일이라는 시간, 한편 계약으로 책정된 제작비.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윤도식이라는 탑배우의 출연.

그래서 차혜민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허허, 이거 참.”

표정 변화가 없던 주한준 대표마저 헛웃음 짓게 만들 만큼.

혼란과 의아함으로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 속에.

“혹시 농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야 보시면 알겠지요.”

조명이 꺼졌다. 그렇게 준비된 비장의 카드, 핫초코 달콤의 두 번째 광고가 시작되었다.

* * *

휘이이잉.

주변의 모든 걸 날려버리는 강풍, 강풍에 섞여 얼굴을 때리는 눈과 얼음 조각들.

“다들 괜찮나?”

“네. 대장님.”

얼음 폭풍을 뚫고 주인공 윤도식과 조연들이 등장한다. 설산 등반을 위한 등반용 장비를 하고 고글을 쓴 주인공의 얼굴에 군데군데 눈과 얼음이 달라붙어 있다.

화면이 줌인한다. 윤도식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고글에 주변 풍경이 반사된다. 거대한 설산의 봉우리, 그리고 눈과 얼음으로 온통 새하얀 세상.

그렇다. 윤도식과 그의 일행은 악마의 산을 등반 중이었다. 몰아치는 폭풍을 뚫고 걸어가는 네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고 윤도식의 독백이 들려온다.

[죽음의 산. 모두가 실패할 거라고 했다.]

“으아악! 대장님!”

“안돼애애!”

폭풍 속에서 들려온 대원의 비명.

[열 명의 대원이 출발했지만 이제 남은 건 넷뿐.]

팍! 팍!

윤도식이 빙벽에 앵커를 꽂아 넣는다. 대장을 따라 빙벽에 매달린 대원들의 모습이 무척 위태롭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대장님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습니다! 당장 베이스로 귀환을!”

“안 돼!”

윤도식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 년이야, 십 년! 이대로 돌아가면 다음은 없어!”

[기다려라, 악마. 모두가 실패했지만 난 기필코 네놈을 발아래 둘 것이다.]

탈진한 대원을 부축하며 새하얀 설원을 오르는 윤도식. 반사된 태양 빛에 피부는 갈색이 되었고 멋대로 자라난 수염엔 고드름이 맺혔다.

윤도식의 발걸음이 멈춘다.

“아아 보인다.”

그가 고글을 벗어 던졌다. 윤도식이 절규했다.

“드디어…… 악마의 정상이다.”

그가 달렸다. 대장을 따라 장비를 내팽개친 동료들이 뒤를 따른다. 설원의 정상, 마침내 윤도식이 그 정상을 정복했다. 감격으로 떨리는 두 손이 천천히 올라간다.

“해냈어!”

쇼생크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처럼, 윤도식이 두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우리가 악마를 정복했다고!”

그때였다.

“아이고, 추운데 먼 길 오셨네.”

누군가의 목소리에 주인공의 고개가 휘익 돌아간다.

“요 앞에 사우나 새로 오픈했는데. 와서 몸 좀 녹이고 가요.”

주인공에게 다가온 남자, 그가 전단지 한 장을 내민다.

“……뭐요?”

영혼이 날아간 표정, 윤도식이 중얼거렸다.

거짓말처럼 눈 폭풍이 걷혔다. 그리하여 드러난 정상엔 각자의 전단지를 손에 든 호객꾼들이 가득하다. 호객꾼들의 머리 위에 간판이 화면에 잡힌다.

[악마 정상 빅세일 이벤트, 음식점, 숙박 시설 30퍼센트 할인.]

주인공의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아. 달달한 거 땡기네.”

윤도식에게 다가온 중년 여성. 그녀가 캔 하나를 따 그에게 내민다.

“총각? 이거 마셔.”

건네받은 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주인공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 망할.”

장면이 바뀐다.

여전히 칼날 같은 눈 폭풍이 몰아치는 벼랑. 그 벼랑 중간에 튀어나온 한 평 남짓한 바위 위. 거기 한 쌍의 남녀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 버림받은 거 같은데. 이제 어떡하지?”

남자가 물었다. 여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몰라. 난들 알겠냐?”

“아. 달달한 거 땡기네.”

“마셔.”

여자가 캔 하나를 그에게 내민다. 남자가 그걸 받아 들며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외침.

“여기 사람 있어요!”

화면이 확대된다. 마침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캔 음료. 귀여운 캐릭터와 함께 화면에 떠오르는 이름.

[핫초코 달콤.]

휘잉.

달콤의 브랜드명 사이사이로 눈과 얼음 조각들이 떨어져 내린다.

[아주식품 핫초코 달콤 2편. 악마의 정상. 30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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