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2화
22. 그 겨울 강원도에선(5)
“아 온다. 와.”
아침 10시 마침내 촬영 스태프 선발대가 도착했다.
눈길을 뚫고 묵직한 촬영 장비를 끌며 올라오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도를 뚫고 나타난 영웅처럼 보였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촬영지를 지키기 위해 우린 수없이 많은 방문객들의 앞을 막아 세워야 했고 양해를 구해야 했으며 때론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김형철이 앞으로 나섰고 올라온 촬영 스태프의 리더, ‘스튜디오 판타지아’의 촬영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어젯밤에 출발하셨다는 얘기 듣고 설마설마했어요. 근데…….”
감독이 촬영지를 바라본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그림 같은 설원, 이번 광고를 위해 준비된 최상의 도화지였다.
촬영감독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지키고 계셨네?”
“하하.”
팀장의 웃음과 함께 피로와 긴장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사실 좀 힘들었어요.”
“그러셨겠네. 이제 저희가 접수할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몸 좀 녹여요.”
경계 근무가 끝났다. 그제야 우린 목장 관리소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었고 뜨거운 커피로 바짝 마른 입을 축일 수 있었다.
따뜻한 실내, 따끈한 커피로 얼어버린 몸을 달래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온다.
“어우…….”
두 손을 들어 까칠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덜컹.
그때 관리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와 여자, 그중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도식아!”
“아 형님! 여기 계셨네.”
매끈한 조각상, 그런 얼굴을 한 남자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왔네? 힘들었을 텐데.”
“우리 형님이 부르시는데 안 올 수가 있나요?”
윤도식. KTV 밤의 황태자로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 신예. 그리고 톱스타가 되기 전 속평수 광고 속 강 대리.
광고 대박은 드라마 주연 캐스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윤도식은 끊임없이 내게 감사를 표해왔다. 마음 충분히 알았으니 당신 스케줄에 전념하라고 말해줬지만 그는 통 말을 듣지 않았다.
반복된 감사, 적당히 하라는 짜증. 그런 대화가 계속되다가 그만 윤도식과 친해져 버렸다.
어젯밤 대관령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경하나가 양떼목장과 촬영지를 조율하는 동안 강미희는 기획사와 연기자 섭외에 한창이었다. 일요일 저녁, 게다가 폭설이 내린 대관령에서의 촬영.
섭외는 쉽지 않았고 결국 난 윤도식에게 도움을 청했다.
“운이 좋았어요. 일요일에 촬영 끝나고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폭설이 온다고 하지 뭐예요?”
일주일간의 드라마 촬영, 덕분에 윤도식은 강원도에 있었다. 폭설이 내렸고 윤도식은 강원도에 발이 묶였다. 결국 하루를 더 묶기로 했고 그때 나와 연락이 닿았던 것.
“어머. 윤도식 씨?”
강미희의 목소리. 어느샌가 다가온 그녀가 내 옆에 바짝 섰다.
“아. 우리 팀원들. 인사해. 여긴 강미희 대리님.”
“아! 그렇군요.”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우리 형님 좀 잘 부탁합니다.”
에효. 나이도 어린놈이 까분다.
“정말 잘생기셨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돼요?”
“아이고 물론이죠. 아! 사진 찍으려면 저기가 좋겠네요.”
윤도식이 강미희를 끌고 설원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졸지에 사진사가 된 신용재의 관자놀이에 힘줄 하나가 불뚝 솟아올랐다.
“저는 사인 한 장만.”
김형철이 종이 한 장을 윤도식에게 내밀었고 그 뒤에선 어색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경하나가 있었다.
“아주 신나셨네들.”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주연은 해결됐는데 문제는 조연이네요.”
고개를 돌렸다. 윤도식과 함께 들어온 여자. 스튜디오 판타지아의 매니저다.
“조연이 부족한가요?”
매니저의 고개가 작게 끄덕인다.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요.”
“일단 섭외된 배우들 최대한 활용하고 부족한 인원은 스태프로 대체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가 안 될 텐데. 걱정이네요.”
“흐음.”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 너머 설원을 서성이는 일단의 무리.
“부족한 조연이 몇 명이죠?”
“한 여덟 명쯤?”
“배우 지망생이라도 문제없을까요?”
매니저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인다.
“지망생이면 기본 교육 받았을 테니까.”
“마침 잘됐다.”
“뭐가요?”
“제가 네 명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창밖을 가리켰다. 매니저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신이 나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는 네 명의 배우 지망생이 거기 있었다.
* * *
진심으로 힘든 촬영이었다. 정오 식사 직후 시작된 촬영은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한쪽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 팀은 마라톤 회의를 했다. 그리하여 현장에서 뚝딱뚝딱 완성된 콘티가 촬영팀에 전달되었다.
쪽대본이나 마찬가지인 쪽콘티에 감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뭐 가봅시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오랜 시간 광인과 손발을 맞춰온 그는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일 마무리합시다.”
결국 하루 만에 끝낼 수 없어 2박 3일 촬영이 되었다. 편집 준비를 위해 김형철 팀장과 강미희 대리가 서울로 출발했고 남은 세 사람은 촬영지 근처 모텔에서 다시 일박을 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촬영 스태프가 촬영지를 지켜주기로 한 덕에 따듯한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는 것. 물론 녹초가 된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체처럼 쓰러졌고 눈을 떴을 땐 동이 터 있었다.
촬영이 재개되었다. 적당한 추위가 계속된 탓에 눈은 녹지 않았고 덕분에 촬영도 순조로웠다.
모든 촬영이 끝났을 땐 오후가 거의 지나갈 무렵.
“고생했다, 도식아.”
급작스러운 일정에도 군말 없이 촬영에 임해준 윤도식에게 난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서울에서 술 한잔해요, 형님.”
“그래. 법인카드 들고 갈게.”
“아유! 법인카드는 무슨.”
그가 환히 웃었다.
“제가 사요. 형님은 시간만 비워둬요.”
“상황 봐서.”
“꼭이요!”
윤도식이 떠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엿듣던 경하나가 다가왔다.
“약속 잡히면 나한테도 말해.”
“왜?”
“나도 윤도식이 사주는 밥 한번 먹어보자.”
“……싫은데?”
퍽.
그렇게 모든 촬영이 끝났다. 물론 촬영 종료는 광고 제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본사로 돌아오자마자 편집에 동원되었다. 진행 과정은 실시간으로 본부장에게 보고되었다.
주말까지 갈아 넣어 광고가 완성되었고 마침내 운명의 다음 주가 밝았다.
“다들 고생했어. 진짜 해낼 줄은 몰랐네.”
아주식품 본사 앞. 시연을 위해 모인 기획 1팀과 영업 직원들을 보며 차혜민 본부장이 말했다.
“완성본 확인하셨나요?”
김형철이 물었고.
“그래. 오면서.”
워낙 급했던 일정이었다. 시연회에서 발표를 할 차혜민도 완성본을 아침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기대한 것보다 잘 나왔더라? 참. 하나, 덕모.”
“네 본부장님.”
“네.”
“얘기 들었어. 너희 둘이 고생 많았다며?”
뭘 또 저런 걸 묻는지. 민망해진 난 뒤통수를 슥슥 긁었다.
“배경은 하나가, 콘티는 덕모가 거의 다 했죠.”
김 팀장이 타이밍 좋게 끼어든다.
“그래?”
본부장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낸다.
“둘 다 입사 반년도 안됐는데 진짜 대견해요. 기획 1팀에 얘들 없으면 어쨌을까 싶다니까요?”
“대단하네. 두 사람 다.”
본부장이 작게 웃는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한다.
“자 이제 출발하자.”
* * *
광고주에게 완성된 광고를 처음 보여주는 자리, 시연회.
광고주의 반응이 기획사에겐 실적이기에 시연회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장비 세팅, 발표 준비, 리허설 등.
아주식품 같은 대형 광고주는 차혜민 본부장이 직접 발표를 한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노트북을 조작하며 빠르게 포인트를 적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레 ‘프로’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우웅.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자는 연예 기획사의 매니저.
“네. 매니저님.”
[지금 시연 중이신가요?]
“아뇨, 준비 중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고맙다는 말씀 드리려고요. 덕분에 좋은 신예 건졌어요. 걔들 좀 전에 대표님 면접 봤거든요.]
신이 난 그녀의 목소리에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예상대로 오케이 받았어요.]
“잘됐네요.”
[참 걔들이 주임님한테 결과 꼭 알려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전화해도 안 받으신다고…….]
걔들이라 함은 그날 촬영장에 발자국을 새기려 했던 배우 지망생 네 녀석이다. 출연배우 섭외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급한 데로 녀석들을 조연으로 써먹었다.
결과는 성공.
처음 느낀 인성은 그닥이었지만 연기는 제법이었고 덕분에 기성 배우 못지않은 열연으로 톡톡히 자기 몫들을 해냈다.
“이거 제 데뷔작이에요.”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 선생님!”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거든? 그리고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너희 없었으면 우리가 곤란할 뻔했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도통 말을 들어 먹지 않았다.
“오빠! 사랑해요.”
“충성!”
“오빠 아니고 충성도 하지 마.”
눈 구경하러 왔다가 데뷔작을 건진 녀석들은 결국 내게 굳건한 충성을 맹세했다. 무슨 강아지 귀신에 씌었는지 녀석들은 하루 종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야! 그만하고 가, 이제!”
결국 버럭 화를 내게 만들었다. 출중한 외모, 검증된 연기력. 매니저는 녀석들에게 명함을 건넸다. 오늘 대표 면접이 있었고 지망생들은 결국 소속사를 가지게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해서 오빠, 형님 하는데 전화를 어떻게 받아요.”
[그래도 가끔 통화해 주세요. 혹시 알아요? 그중에 스타 나올지?]
“어이구, 퍽이나요.”
우웅, 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온다. 누군지 안 봐도 뻔하다.
“그놈들 또 문자 보내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두 분. 지난번 제안 생각해 보셨어요?]
“음. 제안이라.”
제안이라는 말에 경하나의 고개가 휘익 내게 향한다. 그리고 거칠게 가로젓는다.
“둘 다 압도적인 거부입니다.”
[아쉽네요. 두 분 연기 좋았는데.]
“아니요. 그건 절대로 아니에요.”
난 칼같이 단호히 매니저의 평가를 부정했다.
그때였다.
덜컹.
시연장 문이 열렸다.
“지금 대표님 내려오십니다.”
아주식품 직원의 말을 신호로.
후다닥.
시연장의 모두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준비를 마무리하고 누군가는 지정된 자리에 앉는 사람들.
“이제 시연 시작하네요. 끊을게요.”
[주임님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끼익.
정리가 완료되어 조용해진 시연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서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소 50대 이상인 경영진들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다르다. 스타일을 살린 정장, 그리고 경영진과 나이 차가 확연한 젊은 남자.
“안녕하십니까.”
그의 정체는 바로 아주 식품 오너.
대표적 재벌 3세이자 모범 경영인, 꾸준한 선행으로 많은 미담을 가진 젊은 인플루언서. 주한준 대표가 참석자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