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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21화 (21/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1화

21. 그 겨울 강원도에선(4)

부스럭.

잠이 오지 않는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잠을 자겠어?

드렁. 푸우우.

앞자리 팀장과 김형철이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구나, 나만 못 자는 거였구나.

부스럭.

고개를 돌렸다. 뒷자리의 강미희도 이불처럼 패딩을 덮고 고슴도치처럼 몸을 만 채 잠들었다. 이번엔 옆을 보았다.

코오.

하나 역시 숙면 중. 하긴, 쟤는 면접장에서도 자던 애였지.

잠든 하나 너머 창밖이 눈에 들어온다. 무섭게 내리던 눈은 이제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맑아진 시야에 내린 눈이 만들어낸 절경이 펼쳐졌다.

멍하니 절경을 눈에 담았다. 눈을 뒤집어쓴 승합차 한 대. 그 안에 잠든 다섯 사람. 평화롭지만 결코 일상적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대로 누워 있기 힘들어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

움직임에 패딩이 만들어낸 소리. 잠든 팀원들을 깨우지 않으려 난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였다.

“안 자냐?”

“흐어어!”

놀람과 동시에 재빨리 앞뒤를 살폈다.

드렁, 코오오.

다행히 깬 사람은 없다.

“아씨, 놀랬잖아.”

“그러니까 왜 안 자고 꼼지락대? 너 때문에 잠을 못 자잖아. 술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데.”

“하긴 너 술 많이 먹었…… 이 아니고 잘 자던데?”

“안 잤거든?”

“허…….”

지금 어디서 구라를?

“코 골던데?”

이제 난 네 코 고는 소리도 아는 사람이다.

침묵, 그리고 침묵을 뚫고 날아온 주먹.

퍽.

“억!”

그 주먹이 어깨를 강타했다. 어깨를 감싼 동시에 재빨리 앞뒤를 살폈다.

“야 이…….”

이번에도 깬 사람이 없다. 뭐지, 이 인간들?

“미친놈아, 여자한테 할 소리가 따로 있지.”

난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한 문장이지만 생각할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코 고는 걸 모르나?

잠깐 미친놈?

여자? 방금 내 어깨에 불주먹 날려놓고?

그런 생각들.

하지만 더 이상 투덕거리는 건 실례다. 아무리 고래 심줄 같은 신경이라도 깨면 곤란하니까.

“잠깐 따라 나올래?”

“뭐, 싸우자고?”

“아니…….”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잠깐 구경 좀 하자고.”

눈 쌓인 조용한 새벽. 눈이 그쳐 안정된 대기에 바람마저 잦아들었고 그리하여 찾아온 완벽한 고요함.

후우.

뭉게뭉게 피어난 입김은 구름처럼 덩어리져 흘러갔다.

“재밌냐?”

고요한 공기를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자국 내디뎌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설원에 그림 같은 발자국을 만들며 대답했다.

재미있냐는 물음의 정확한 뜻은 모른다. 다만 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냐는 물음으로 느꼈고 떠오른 감상 그대로를 들려주었다.

“응. 죽을 만큼.”

“참나.”

진한 입김을 피워 올리며 하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볼수록 이상해 너.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일이잖아?”

경하나를 보았다. 입까지 가린 검은색 롱 패딩, 눈썹까지 감싼 검은 털모자. 옷 밖으로 드러난 건 동그란 안경과 잘 보이지 않는 두 눈.

미사일 같다. 발사 직전의 검은색 미사일.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저 어그부츠 있는 데서 불이 나오려나?

그런 맥락 없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도 불려 나오고, 뻑하면 야근에 공들여 작업해 놓으면 퇴짜 놓는 멍청한 광고주랑 일하는 게 뭐가 좋냐?”

그녀의 어그부츠가 쌓인 눈을 걷어찼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눈덩이들이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졌다.

“지금도 봐. 이게 말이 되니? 새벽 네 시야. 한참 꿀잠 자야 하는 일요일 새벽에 대관령까지 이 고생하는데 뭐? 재미있어?”

반박도 긍정도 필요 없다. 어차피 여기 오자고 했던 게 그녀니까.

“야 그래도…….”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 별이 떠오르고 희미한 별빛을 받아 세상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일 아니면 이런 구경 했겠어?”

“어휴. 미친놈.”

난 피식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밀린 핸드폰을 보며 미사일이 미간을 찌푸린다.

“사진이나 좀 찍어줄래?”

녀석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뽀득뽀득.

밟을 때마다 귀여운 소리가 났다. 널따란 설원에 자리를 잡고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쇼생크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처럼. 타이타닉 뱃머리 위의 디카프리오처럼.

“어때?”

“……뭐가?”

“이쁘게 나와?”

“아니, 거지 같은데.”

“자 찍어주세요.”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 경하나. 그녀의 입에서 길고 진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 * *

험로를 뚫고 대관령까지 올라온 이유. 많은 숙소를 지나쳐 주차장에서 비박을 한 이유는 당연하지만 설경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양떼목장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을 보면 그 누구라도 발자국을 남기겠다는 충동을 참기 어렵다.

완벽한 무언가를 보면 어지럽히고 싶고 더럽히고 싶은 본능. 그건 인간의 본성이자 DNA에 새겨진 근원적인 욕구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달 착륙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만 봐도 그건 진실이다. 열에 아홉은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남긴 발자국을 기억하니까.

밤새 내린 눈은 대관령 양떼목장을 완벽한 도화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연락을 받아 오고 있을 촬영 스태프들이 도착할 때까지 도화지를 더럽혀지지 않게 지키는 것.

기획 1팀은 새벽 다섯 시에 기상했다.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함을 토로할 상황은 아니었다.

양떼목장 관계자가 올라와 적당한 촬영 예정지를 골라준 건 아침 여섯 시.

촬영지는 알아서 간수하라는 관계자의 안내에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촬영 예정지를 지키기 시작한 건 여섯 시 반.

그 후로 시작된 건 추위와의 사투 그리고 아침부터 무슨 부지런함인지 삼삼오오 올라오는 관광객들과의 실랑이였다.

“어으, 추워.”

외투와 바지에 덕지덕지 핫팩을 붙여놓았지만 대관령의 산바람은 작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시간 아침 9시.

“아니, 얘는 사진을 찍을 줄 모르나? 다 흔들렸네?”

추위 때문에 새하얗게 질린 손, 그 손으로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확인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하나에게 부탁해 십여 장의 독사진을 찍었다. 별빛을 반사하는 새벽의 설원, 그 위에 옥동자를 세워놓고 찍어도 작품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진 대부분은 엉망. 흔들린 사진은 찍힌 게 사람인지 나무인지 혹은 유령이 찍힌 심령사진인지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한 개는 건졌네.”

찍은 지도 몰랐던 한 장은 건졌다. 온갖 폼을 다 잡았던 촬영을 끝내고 녀석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진. 사진 찍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기에 지어진 자연스러운 웃음이 배경과 만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와! 너무 멋지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해 보니 네 명의 남녀 커플이 다가오는 중. 그중 목소리의 주인이 분명한 하얀 패딩의 여자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품에 넣고 달려갔다.

“야. 나 사진! 저쪽 나오게 한 장 찍어줘.”

대략 살펴보니 20대 초반 친구들. 완벽한 도화지를 더럽히러 달려가는 여자의 앞을 난 재빨리 막아섰다.

“어?”

달려가던 여자가 움찔 굳는다.

“뭐예요?”

난 허리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들어가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최대한의 정중함을 담아 부탁했다.

“왜요? 우리 입장료 냈는데요?”

예상대로 불만스러운 대답. 추위에 굳은 얼굴을 움직여 가능한 최대한의 미소를 그려냈다.

“저희가 저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목장 측에 협조도 구해놓았고요.”

“할 일은 우리도 있거든요?”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시선이 따갑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들이 합류했다. 아군의 등장에 기가 산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 뭐야 이 사람?”

“야. 왜 그래?”

“저기 들어가지 말래! 지가 빌렸다나 뭐라나.”

남자가 한 녀석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그제야 알겠다. 이 녀석 키가 크다. 눈높이가 목젖 정도. 그래서 목소리는 정수리 쪽에서 들려왔다.

“여기 직원이세요?”

“그건 아닌데.”

“직원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들어가라 마라야?”

성난 목소리가 화악 커진다. 결국 얼굴에 그렸던 미소는 와장창 깨어졌다.

“저희가 빌린 곳이라서요.”

“빌려? 우리도 입장료 내고 올라왔어! 그리고 당신이 빌린 게 땅이지 저기 눈이야?”

와다다다 할 말을 마친 그가 여자의 등을 떠민다.

“들어가. 내가 찍어줄 테니까.”

난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구요.”

“안 비켜?”

남자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는다.

“들어가시면 안 된…… 어?”

남자의 두 손에서 강한 힘이 전해져 왔고 그 덕에 난 뒤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포옥.

충격은 없었다. 눈 쌓은 바닥은 최고급 매트리스만큼이나 부드러웠으니까. 하지만 안락함을 즐기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달려가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기다려!”

키 큰 놈이 동작도 빠르다. 뻗은 손이 여자의 패딩을 낚아채려는 순간 남자의 억센 손이 팔목을 붙잡아 버린 것.

“들어가.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낭패다. 이대로라면 발자국이 생긴다. 물론 후작업 할 때 그래픽 처리를 해 지울 수도 있겠지만 이번 광고는 분초를 다투는 상황. 그 정도 후작업을 할 시간조차 없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얀 설원에 절규가 울려 퍼졌다. 남자에게 팔목을 잡혀 버둥대는 나. 한 발 두 발 멀어지는 하얀 패딩.

뽀득뽀득.

무심한 발걸음에 설원 위에 깊은 발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할 때였다.

“스토옵!”

어디선가 천둥 같은 호통이 들렸다.

“옴마야!”

달려가던 여자가 놀라 멈추었고.

“뭐야? 또 누구야?”

내 팔은 붙잡은 놈이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거기 당장-”

거긴 거대한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설원을 둘로 쪼개며 달려오는 적토마.

“스토오옵!”

멀리서도 굵직한 두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신용재가 달려오고 있었다.

* * *

“아…… CF 촬영이요?”

“네.”

“아 그럼 얘기를 해주시지.”

날 밀친 녀석. 그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까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녀석의 사과를 시작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일행들이 하나같이 허리를 숙였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난 말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위급했던 상황은 신용재가 간단히 정리했다.

크게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적토마처럼 달려왔고 눈사태가 날 만큼 소리를 쳤으며 날 붙잡았던 녀석 앞에 섰을 뿐.

큰 키에 자부심이 있었는지 신용재가 다가올 때까지 끓어오르던 화를 숨기지 못하던 녀석은 눈앞에 마주한 거한 앞에 단 일 초 만에 분노를 조절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피지컬에 네 사람 모두 온순해졌다. 그제야 난 잠시 후 저기서 있을 일이 무언지 설명해 주었다. 우리 눈을 피해 다시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다만 납득해 달라는 뜻으로 한 설명이 끝났을 때 상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저기…… 사실 저희가.”

날 밀쳤던 녀석, 그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배우 지망생들이거든요.”

“아…….”

“촬영장 지키는 거 저희도 도울게요. 대신 촬영하는 거 구경해도 될까요?”

정중한 부탁. 나와 신용재가 멍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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