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20화 (20/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0화

20. 그 겨울 강원도에선(3)

“아주 식품이요?”

“알아, 그 회사?”

김형철이 묻는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죠.”

“그럼 달콤이라는 제품도 잘 알겠네?”

“네, 물론이죠. 캔 타입 핫초코잖아요.”

“그럼 내가 얘기하는 것보다 덕모가 하는 게 좋겠다. 대신 설명 좀 해줘.”

아주식품, KJ식품의 오랜 경쟁자다. 아주식품의 주력상품은 대부분 KJ와 경쟁 관계에 있다. 제품마다 치열한 영업, 마케팅 경쟁이 있어왔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경쟁 중인 두 회사 간 관계는 참 아이러니하다.

아주식품이 신제품을 만들어 반응이 좋으면 KJ가 몇 달 만에 그걸 따라 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 성공한 제품만 베껴 시장에 내놓은 덕에 시장에서의 KJ의 평판이 좋을 리 없었다.

그 결과 카피 제품으로 회사를 키운 부도덕한 회사라는 비판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KJ식품은 시장 1위, 아주식품은 만년 2등. 마찬가지로 주말임에도 우리에게 떨어진 광고 제품 달콤이라는 녀석 역시 마찬가지.

“KJ 핫초코인 쏘스윗은 작년 출시해서 단숨에 히트상품에 올랐습니다. 반면 아주식품 핫초코인 달콤은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죠.”

“그랬구나.”

강미희가 고개를 끄덕였고.

“얘기 들었어. 덕모 전 회사. 이런저런 이슈로 욕 많이 먹더라.”

2년이나 뒤늦게 출시된 경쟁제품에 밀린 원조, 달콤은 이번에도 반복된 지긋지긋한 카피 제품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고 디자인도 바꾸는 한편 대대적인 광고를 기획하는 등 반격을 준비했다.

물론 반격 중 문제가 생겼지만.

제품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이후의 상황은 김형철이 들려주었다.

“작년 겨울에 맞춰 만들어둔 광고가 있는데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문제?”

“그래. 방송 광고 심의회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모양이더라.”

광고를 대중에게 내보내기 위해 반드시 걸쳐야 하는 방송 광고 심의회에서, 아주식품 핫초코는 몇 가지 이슈로 발목을 잡혔다.

목표했던 11월 광고 송출은 불발, 늦게라도 승인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시간은 흘러 1월이 되었고 광고는 결국 부적합 판정을 받아 수정조차 불가능한 재기불능 상황이 되었다.

회사가 뒤집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황한 아주식품 마케팅 담당자는 일주일 만에 광고를 만들어줄 기획사를 찾았다. 광인 기획 영업이 대표에게 보고를 했고 대표는 차혜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기획 1팀 전원이 일요일에 출근을 했던 것.

“뭐 기획 검토하고 수정하고 할 시간도 없어. 오늘 기획 만들고 내일부터 이틀간 촬영해서 모레부터 편집해야 해 그래야 다음 주에 내보낼 수 있으니까.”

“모델은요?”

“이름 있는 모델은 당연히 못 쓰지. 기획사 쪽에서 일정 가능한 모델로 알아봐 준다고 했으니까 그중에서 골라야 할 거야.”

“일주일이라니. 언제 시안 만들고 언제 컨펌받아요?”

강미희의 물음. 김형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 컨펌 조건이야.”

“아.”

“본부장님한테 확답받았어. 아주 쪽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방송 가능한 광고면 된다고 했다고 하더라.”

이해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주식품에서 그랬다니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 이상한데요?”

“뭐가?”

김형철이 묻는다.

“아주식품 홍보팀을 좀 알거든요. 그쪽 베테랑이라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글쎄.”

그가 까칠한 턱을 슥슥 매만졌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거니까.”

그때였다.

“……늦었습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그녀가 후다닥 빈자리에 앉는다.

“왔어?”

“늦잠 잤나 봐?”

“죄송해요. 너무 깊이 잠드는 바람에.”

경하나였다. 자리에 앉은 그녀를 살피던 강미희가 놀라 코를 틀어막는다.

“우와, 술 냄새! 하나 어제 술 먹었구나?”

“네…… 뭐.”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술 못하는 줄 알았더니 누구랑 그렇게 마신 거야?”

김형철이 짓궂게 묻는다.

찌릿.

따가운 시선이 날 향한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자, 그럼 아이디어들 생각해 봐.”

상황 공유는 끝났다. 이제 우린 오늘 내로 내일 촬영에 들어갈 광고를 기획해야 한다.

“핫초코니까 겨울과 추위가 강조돼야겠네요.”

강미희가 처음 의견을 냈다.

핫초코란 원래 동절기에만 반짝 매출이 오르는 계절성 음료. 추운 날 떨고 들어와 따듯하게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매출과 연결된다.

“캐릭터가 귀엽네. 이거 살리는 방향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신용재가 의견을 보탰다.

바뀐 브랜드인 달콤은 이번에 달콤이라는 캐릭터를 패키지에 넣어놨다. 그의 의견 역시 지당하다. 원하는 시기에 광고를 내보내지 못한 만큼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징은 유효한 전략이다.

나 또한 생각한 바를 말했다.

“제품 특징도 잡아내면 좋을 거 같아요. 달콤, 쏘스윗보다 단맛이 강한 게 특징이거든요.”

“그럼 살찌는 거 아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단맛이 강해서 칼로리가 높아요.”

“그건 민감한 포인트네. 칼로리 쪽은 빼고 맛을 강조하는 게 좋겠어.”

김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강한 단맛. 그림 하나 나올 것 같은데?”

키워드가 나오자 토론은 더욱 활발해졌다.

추위에 데이트 중인 연인을 모델로 하자는 아이디어.

핫초코 본연의 맛에 집중하자는 의견.

캐릭터인 달콤이를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보자는 의견.

제법 다양한 의견들이 모였다.

“흠 문제는 시간이야. 유명 모델은 안되고 애니메이션은 제작할 시간이 없으니까.”

김형철이 정리된 아이디어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 이거다 싶은 건 없네. 어디 눈이라도 잔뜩 쌓였으면 그림이라도 나올 텐데.”

이미 두 시간이 넘게 회의를 했다.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고만고만한 의견들 속에 뭔가 반짝이는 옥석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고심하던 팀장이 경하나를 바라본다.

“하나는 왜 조용해? 좋은 생각 없어?”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싶어 그쪽을 살폈지만 하나는 그저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는 중.

다행이라면 이제 숙취로 힘든 기색은 없다. 불행인 점이라면 팀장이 묻는데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

“뭘 그리 유심히 봐?”

팀장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고.

“그거 아세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낸 경하나가 입을 열었다.

“뭘?”

“강원도에 지금 대설 특보 내렸대요.”

“대설 특보?”

뜻 모를 소리에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김형철.

“서울에도 눈 온대? 얘기 못 들었는데? 그럴 날씨도 아닌 것 같고.”

“아니요.”

경하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자구요.”

“어딜?”

“강원도.”

“뭐? 왜?”

놀란 팀장의 눈이 동그래진다.

“추위, 겨울, 거기서 즐기는 따뜻한 핫초코.”

아련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놀랍게도 귀로 들어온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멋진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번 광고 배경만 잘 잡아도 절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국내에서 그런 배경 있는 데 강원도밖에 없어요.”

경하나의 입에서 그녀가 생각해 둔 최적의 배경, 그걸 확보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진짜 출발해요?”

운전대를 잡은 신용재가 묻는다. 보조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김형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끄러울 텐데…… 차도 막힐 거고……. 위험할 거 같은데 정말 갈 거야?”

뒷자리의 강미희가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가야 돼요.”

“아니, 일요일 저녁인데 굳이 지금, 이렇게 막무가내로 갈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김형철은 가기 싫은 게 분명하다.

“자, 어떡할까요?”

시동 걸어둔 회사 차. 신용재가 핸들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고? 아니면 스톱?”

“얘들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팀장이 내게 동의를 구해온다.

“진짜 갈 거야? 이 밤에? 눈 오는데?”

하지만 어쩌지? 난 진작부터 고였는데.

“사진 보셨잖아요, 팀장님.”

조금 전 회의실에서 경하나는 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배경을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건 바로 대관령 양떼목장. 지난 폭설 때 관광객이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곳은 온통 새하얀 눈에 뒤덮여 알프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거기서면 뭘 찍어도 좋은 그림 나올 거예요. 그런데 눈은 내일 아침이면 그친다잖아요.”

양떼목장은 유명한 관광지다. 알프스처럼 소복이 쌓인 눈을 본 사람은 누구나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저희가 가서 촬영 장소 지키고 있어야 돼요. 지금 당장 거기 갈 수 있는 건 저희밖에 없구요.”

“에휴. 그래, 뭐, 알았다.”

결국 팀장도 결심을 굳혔다.

“용재야. 고.”

“오케이 그럼 출발합니다.”

신용재가 액셀을 밟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획 1팀 전원을 태운 법인 승합차가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으아…….”

“힘들었다.”

장장 다섯 시간. 결국 우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요일 밤, 강원도로 이동하는 차가 적을 시간이지만 내린 눈에 길은 얼었고 대관령으로 가는 지선은 통제되어 결국 한참을 돌아야 했다.

더구나 필요한 것도 사 와야 했기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자정.

그제야 안전벨트를 푼 김형철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와 정말 살아 있는 게 다행이다. 아까 차 미끄러지는 거 봤어?”

다시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여정이었다. 오는 길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차만 다섯 대는 보았을 정도.

내린 눈에 우리 승합차도 몇 번 미끄러졌고 덕분에 우린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팀장이 신용재의 어깨를 꾹꾹 주무른다.

“용재 고생했다. 너 운전 잘하더라. 아까 거기 난간에서 얘기 안 해줬으면 다 같이 골로 갔겠지? 그럼 지금쯤 하늘나라에 있었을 텐데.”

“……하하.”

팀장이 살벌한 농담을 날리며 차창 밖을 두리번거린다.

“근데 아무도 없네?”

“잠깐만요. 지금 하나가 전화 중이요.”

오는 내내 그녀는 양떼목장과 통화를 했고 결국 조율까지 마쳤다.

“네? 아 여기요? 주차장이에요. 입구 근처 주차장.”

주변 풍경을 살폈다.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거대한 주차장. 한쪽에 입구가 보이고 근처에 문 닫은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와 정말 많이 온다.”

강미희의 말처럼 대설주의보가 내린 하늘에선 주먹만 한 눈덩이가 셀 수 없이 내려오는 중. 그렇게 떨어진 눈이 나무, 그리고 주차장과 건물 위에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덜컹.

충동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흘러나온 입김이 긴 꼬리를 만들어낸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른다. 이상하지만 이렇게 눈이 쌓이면 주변은 아늑하고 조용해진다.

톡, 톡.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이 부서지는 소리만이 가끔 들려올 뿐.

“30분이요? 잠깐만요.”

경하나가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냈다.

“길이 미끄러워서 30분 후에 도착하신다는데요?”

“그래. 그럼 차에서 기다려야겠네.”

경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럼 기다릴게요.”

“야! 덕모.”

김형철이 보조석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눈 그만 맞고 들어와. 감기 걸려!”

“네.”

차로 돌아가는 발걸음. 거대한 주차장에 홀로 주차된 차위로 밤하늘을 여백 없이 채운 눈이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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