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9화 (19/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9화

19. 그 겨울 강원도에선(2)

악연. 경하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

어둠이 내린 상영관, 전방엔 대형 스크린.

또각.

스크린 속에서 분노한 여주인공이 걸어간다. 저 너머 남자가 보인다. 여자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중.

또각.

남주가 여주의 등장을 눈치챘다.

두둥.

적절한 효과음이 깔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남자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짜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남자의 얼굴이 빙글 돌아간다. 여자가 남자의 뺨을 후려쳐 버린 것.

“어머!”

“어떡해…….”

극장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옆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들고 입을 가린 채 스크린 속 주인공에게 자신을 이입하고 있는 안주미, 그리고 그 옆엔.

“불쌍해…….”

주미와 똑같은 자세로 경악한 눈을 한 경하나가 있다. 얄궂다. 하필 쟤랑 같은 영화를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떠오른다.

‘지랄이 뭐야, 지랄이.’

30대 초반, 결혼 적령기의 여자 입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여자한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구나. 안주미.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뺨을 후려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화면에 들어온다. 이후에 일어날 뻔한 전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뻔한 걸 봐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더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다. 예상대로 여주와 남주가 화끈한 입맞춤을 했고 엔딩크레딧 중간중간 두 사람의 행복한 일상이 그려졌다.

지옥 같던 두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는 보상을 받을 시간.

직원이 열어준 상영관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안주미가 쪼르륵 앞장서 달려간다.

“저기 언니.”

“네?”

“배 안 고프세요? 밥 먹으러 갈 건데 괜찮으면 같이 가요.”

놀란 난 재빨리 안주미를 말렸다.

“야. 왜 이래?”

“왜? 회사 동기라며.”

“동기고 나발이고 실례야. 쟤도 약속이 있을 텐데.”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붙인다.

“이런 데서 회사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이야? 어렵게 만났는데 그냥 보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래야지.”

“……뭐?”

나만 모르는 세상의 상식을 들려주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뭐?”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내 귀를 잡아당긴다. 그리고 속삭인다.

“언니 이쁘네. 슬슬 솔로 탈출할 때 되지 않았어? 잘 엮어볼 테니까 구경이나 하고 있어.”

경악스럽다. 이 자식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경하나가 물끄러미 우리 둘을 바라본다.

‘뭐 쟤가 오케이를 할 리가 없지.’

“그럴까요? 마침 배고팠는데.”

“가요, 언니!”

안주미가 경하나의 팔짱을 낀다.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는 행동.

“요 앞에 별점 좋은 고깃집 알아뒀거든요. 거기로 가요. 오빠가 살 거니까.”

“좋네요. 공짜 고기.”

하나가 날 바라본다. 입가에 걸린 미소, 대충 의미를 해석하자면.

‘엿 먹어 봐라?’

“가요, 가요.”

하나의 손을 이끌며 안주미가 앞장섰고.

“미치겠네, 정말!”

난 이마를 짚으며 두 여자 뒤를 쫓았다.

* * *

“진짜 이상하다. 오늘 언니 처음 봤는데 왜 이리 말이 잘 통하지?”

주미 얼굴이 빨개졌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언니.”

“주미 성격 좋다. 내 동생 삼고 싶을 정도야. 오빠랑은 완전 딴판이네.”

“내가 어떻길래?”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재수가 없지.”

“싸울까?”

“너 자신 있냐?”

말을 말자. 술 취한 애랑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기에 술이 빠지면 섭섭하다는 주미 말에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벌써 세 병째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술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좀 나아진 거였고 나쁜 점이라면 동생과 하나가 의기투합을 했다는 거였다.

“여자한테 싸우자가 뭐냐? 못 하는 말이 없어.”

안주미가 찰싹 내 등을 후려쳤다. 하나가 또 한마디를 보탠다.

“쟤 회사에서도 저래.”

“아니, 내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녀석이 동생 손을 붙잡는다.

“주미가 힘들었겠네. 저 자식 동생이라니.”

“……언니.”

미치겠다 정말.

“자. 이제 그만 일어서자. 늦었다.”

“그러네? 늦으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시간을 살피던 안주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깐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얘기 좀 하고 있어. 또 싸우지 말고.”

안주미가 자리를 떴다. 사라졌던 어색함이 다시 찾아왔다. 어색함이 찾아온 술자리엔.

타닥.

지나치게 바삭해져 버린 고기만이 불판 위에서 기름을 튀겼다.

“야.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봐.”

녀석이 잔에 술을 채우며 무심하게 대꾸한다.

“기억나냐? 저번에, 나 식당 광고 찍으러 가면서 했던 말.”

“아니.”

“그랬잖아. 마케터 경력 빼고 그냥 실력으로 평가해 달라고.”

“…….”

신한 제약 담당자 자리를 내려놓고 했던 말.

“아직도 동료로 인정 못 하겠냐?”

난 아직 녀석에게 어떤 평가도 듣지 못했다. 굳게 닫힌 입술은 시간이 지나 열렸다.

“아니…… 인정해.”

난 빤히 경하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전혀 바뀐 게 없어?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고 투명인간 취급하고 말끝마다 쏴대는 건데?”

하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능력 있어. 재능도 있고.”

“그런데?”

입에 술을 털어 넣으며 중얼거린다.

“너 보면 그냥 화가 나.”

“아니, 왜?”

“몰라…… 그냥 그래.”

“하…….”

모르겠다. 보고만 있어도 그냥 화가 나는 인간. 녀석은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그래도 대답해 줘서 고맙네.”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노력해 봐야 이해할 수도 없을 거고.

다만 이 순간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준 것만 해도 고맙다. 말없이 술병을 들어 녀석에게 내밀었다.

“한잔 받아라.”

꼴꼴꼴.

잔이 술로 차오른다.

“어…… 야 넘쳐.”

“……알아.”

술이 넘치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넘치도록 부었다. 그리고 내 잔도 마찬가지로 가득.

“사실 그동안 힘들었어. 너도 이직했지만 나도 그렇잖아. 게다가 해본 업무도 아니고.”

“…….”

잠자코 내 말에 귀 기울이는 녀석.

“네가 나한테 까칠하게 대하길래…… 그래, 나도 똑같이 그랬어.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 너랑 나 회사에 하나뿐인 동긴데.”

술잔을 내밀었다.

“전에 들었어. 촬영팀 문제 생겼을 때 사표 내자고 한 게 너였다며? 제일 먼저 그거 쓴 것도 너고. 그때 나 솔직히 감동했거든?”

흔들려 넘친 술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먼저 노력해 볼게. 죽고 못 사는 동기? 솔직히 그런 건 못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 보면 기분 더러운 사이는 좀 아닌 거 같다.”

하나가 잔을 든다. 그 잔이 내 잔을 때린다. 넘친 술이 튀고 흘렀지만 둘 다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뭐. 너 하는 거 봐서.”

하나가 웃는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인간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둘이 분위기 왜 이래?”

돌아오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주미.

“에휴.”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벌컥.

“야. 안덕모!”

오늘도 여지없다. 내 방엔 분명 문이 있고 방주인도 있건만 오늘도 여지없이 방문은 벌컥벌컥 열린다.

“네.”

“주미랑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아침밥 차려놨으니까 먹어.”

머리맡에 충전해 둔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시간은 어느새 아침 11시. 일어날 시간을 한참 지나 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머리야.”

숙취가 몰려온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마가 쯧쯧 혀를 찬다.

“주미는 멀쩡한데 넌 왜 그 모양이냐? 동생하고 영화 보러 가서 뭔 술을 그렇게 퍼먹었어?”

“에…… 뭐 그렇게 됐네요.”

“밥 다 먹으면 설거지하고 청소기도 돌려놓고.”

“네, 마마.”

“그럼 간다.”

모처럼의 완벽할 수 있었던 주말, 하지만 피 같은 주말이 절반 이상 흘러가 버렸다.

“이렇게 끝낼 순 없지.”

번개처럼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5분 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영화를 보관해둔 폴더를 열어 스타워즈 오리지널 영상을 찾아냈다.

클릭을 했다. 모니터엔 스타워즈 오프닝이 떠올랐다.

언제 봐도 명작, 너무 많이 봐서 달달 외우는 영화지만 오프닝이 올라오는 이 장면에서 한결같은 기대와 흥분을 느낀다. 감상을 위해 자세를 편히 하고 갓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본격적으로 집중 모드에 들어서려 할 때였다.

위잉.

전화기가 진동했다.

“아…… 뭐야.”

집중이 깨져버렸다. 방해받은 느낌에 거대한 짜증을 느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

발신자는 김형철 팀장. 재빨리 영상을 중단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덕모야.]

“네. 팀장님?”

[지금 혹시 집이냐?]

“네 그런데요.”

그의 목소리에서 다급한 심정이 전해져 왔다.

[미안한데 출근할 수 있냐?]

“지금요?”

[그래.]

“일요일인데요?”

[알아.]

무슨 일이냐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출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직접 만나서 듣게 될 터였고.

“지금 출발할게요.”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말고.]

“아! 그럼 저 영화 한 편만…….”

[한 시간 안에만 와.]

뿌득.

전화를 끊었다. 난 정지된 영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하다. 정말…….”

출근까지 한 시간. 결국 지하철을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덕분에 제한 시간 안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어. 덕모 왔어?”

신용재 대리, 그가 덤벨을 양어깨 위에 올리고 엉덩이를 뒤로 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중.

“대리님. 그거 안 하면 안 돼요?”

“왜?”

“자세가 좀 민망한데…….”

“민망하다고?”

그가 보라는 듯 엉덩이를 뒤로 빼며 주저앉는다.

“이게 스쿼트야. 코어 강화에 이만한 게 없어.”

“네, 뭐, 알겠고, 혹시 오늘 무슨 일인지 아세요?”

“흠.”

그가 덤벨을 내려놓는다. 흘러내린 땀을 훔쳐내며 중얼거린다.

“광고 의뢰가 들어온 모양이더라. 엎어진 광고.”

“엎어진 광고요?”

“그래, 방송불가 판정받았다고 하던데. 급하게 재촬영 의뢰 들어온 모양이더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다.

광인 기획과 인연을 만들어준 광고, 황 이사의 갑질로 한 번 망했던 ‘확깨수’ 광고.

“선배님.”

“음?”

“혹시 우리가 그런 광고를 자주 찍어주는 편인가요?”

이두박근을 꾹꾹 누르던 신용재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구나? 광인 기획 원래 이쪽 전문이야.”

“이쪽?”

“그래. 좋게 말해 해결사고 나쁘게 말해 땜빵이지. 대표님하고 차 본부장 처음 회사 세운 계기도 그거였어.”

처음 들었다. 그래서 성수 기획 담당자가 여길 소개해 줬구나.

“회사는 컸지. 예전이랑 지금은 다른데. 아직도 그때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거든. 그래서 가끔 땜빵이 들어오는 편이지.”

그때였다.

“아, 일찍 왔네? 쉬는데 불러내서 미안.”

김형철 팀장이 도착했다. 그의 뒤를 이어 강미희가 도착했다.

“자, 회의실로 집합. 비상이다.”

책상에서 한 움큼 자료를 들고 앞장서 걸어가는 김형철. 세 사람의 팀원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때 빈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안 오나?’

주인 없는 녀석의 자리를 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