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5화
15. 될 놈은 개천에서 용을 뽑는다(6)
원조 송탄 부대찌개.
식당 깊숙한 곳에 손님을 위해 준비된 8인실. 조용한 공간에서 지인과 술 한잔 기울이기 좋은 공간이지만 지금 이곳은 손님을 위한 공간도 식사를 위한 공간도 아니다.
위잉.
설치를 끝낸 빔프로젝터를 켜자 한쪽 벽에 파란색 화면이 나타났다. 컴퓨터를 조작하자 파란 화면이 바뀌어 준비된 화면이 떠올랐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젊은 종업원 하나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끝났나요?”
“네, 끝났어요.”
“그럼 사장님 모셔올게요.”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그렇다. 난 식당의 작은 룸을 시연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거의 20일간 매달린 광고가 마침내 준비를 마쳤던 것.
광고를 지원해 달라는 그날 밤 요청. 진광인 대표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촬영 장소 대관, 모델과 전문 촬영팀 섭외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갔다. 덕분에 이번 광고는 이미 적자.
직원을 더 붙여주겠다는 차혜민 본부장의 제안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초과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홀로 동분서주해야 했고 덕분에 지난 20일 난 지옥을 맛보았다.
좋은 광고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었던 일이었고 결국 난 원했던 광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웅.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네.]
발신자를 확인한 난 재빨리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일하고 있니?]
“네. 마마.”
[저녁은 들어와서 먹을 거지?]
“저녁이요? 음.”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 일곱 시. 식당이 바쁜 시간을 피하다 보니 피치 못하게 이 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연이 끝나고 의견을 나누면 아무리 빨리 끝난다 해도 저녁 시간에 맞춰 귀가를 하는 건 무리.
“아무래도 안될 것 같은데요?”
전화기 너머가 어머니가 잠시 침묵하신다.
[생일인데 미역국도 못 먹고. 에휴.]
어느덧 12월의 마지막 날. 한 해의 끝이자 바로 내 생일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태어난 탓에 내 생일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초를 밝혀둔 케익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고 모처럼 세 식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 한 해 동안 고생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그런 시간.
그래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힘이 빠져 있었다.
[저녁 거르지 말고 챙겨 먹고 일해.]
“네 식사는 주미랑 먼저 하세요.”
[말 안 해도 우리끼리 맛있는 거 먹을 거거든?]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심통 난 목소리. 안주미다.
[혼자 있는 동생은 신경도 안 쓰지? 맨날 늦어. 맨날!]
[주미야!]
[엄마도 늦고, 오빠도 늦잖아. 맨날 집에 오면 아무도 없다고. 엄마는 다 큰딸 걱정도 안 돼?]
[그만해! 오늘 오빠 생일이야.]
전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진다. 한결같은 동생과 어머니의 대화, 오랜만에 들어보는 투덕거림에 내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찾아왔다.
촬영이 끝나고 후반부 작업에 들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정시퇴근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10시 퇴근은 고사하고 지하철 끊겨서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주말까지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퇴근해서 가족과 이렇게 대화 나눠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주미야. 오빠 카드 가지고 있지?”
[카드? 있지.]
“그걸로 맛있는 거 사드려. 식사 끝나면 바로 들어오지 말고 백화점 가. 가서 어머니 옷 한 벌 사드려.”
[뭐? 왜?]
“왜는 왜야? 나 이제 정상 월급 받잖아. 이번에 연말이라고 보너스도 좀 나왔고.”
[오…… 그럼 내 것도 사도 돼?]
“그래. 한 벌 사 입어.”
[오예!]
환호성이 터진다.
일이 바빠졌지만 정직원이 된 만큼 수입도 늘었다. 뭐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날 작은 호사 부릴 정도는 벌게 되었다.
드륵.
시연장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이번 광고의 광고주인 여사장이 보인다.
“그만 끊어요. 나 일해야 돼.”
[그래. 늦더라도 끝나면 집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럴게요.”
뚝.
전화가 끊어졌다. 오늘의 시연 관람객들이 하나둘 방으로 들어섰다. 식당 직원이 둘. 여사장 그리고 그녀가 부축한 백발의 노인.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평택에서 식당을 창업했던 여사장의 어머니.
네 사람이 내 앞에 착석을 마쳤다. 올라오는 긴장을 긴 한숨과 함께 털어냈다.
“그럼 시작할까요?”
여사장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영문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작하기 전에 안 주임님한테 드릴 말씀 있는데.”
“네?”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다.
“작은 식당 광고 만드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매일같이 먼 데까지 찾아오시고 시연까지 해주시고…… 아이고 주책이네.”
그녀가 눈가를 훔쳐낸다. 당황스러운 모습에 난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생각도 못 했어요. 이렇게 열심히 해주실 거라고는.”
작은 식당 광고, 그래 별거 아니다. 그녀의 평가와 똑같은 말을 난 광고를 준비한 지난 20일 동안 수없이 들었다.
‘지역광고? 하루 찍고 하루 편집하면 끝날 일을 왜 그렇게 하느냐.’
‘미련하다. 쓸데없고 지나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다.
“전 광고쟁이고 이게 제 일인걸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가를 훔쳐내는 여사장. 그녀의 눈가에 노인의 손하나가 올라온다. 여사장의 눈물을 닦아주는 떨리는 손. 여사장이 노인의 손을 잡는다. 그제야 진정된 여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많이 기대가 돼요. 한번 볼까요?”
“그럼 지금부터 원조 송탄 부대찌개 광고를 시연하겠습니다.”
끄덕.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여직원에게 사인을 보냈다. 신호를 알아본 직원이 부탁한 대로 움직였다.
딸깍.
조명이 꺼졌다. 사람들이 프로젝터 화면이 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트북 실행 버튼을 눌렀다. 정지되어 있던 화면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 * *
“송탄! 송탄!”
“의정부! 의정부!”
“우와! 이겨라!”
농구 경기장.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열기는 당장이라도 경기장을 날려버릴 듯했다. 응원과 함성 속에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등장한다. 이마에 흥건한 땀, 열기를 토해내는 호흡.
그들의 어깨 위로 보이는 전광판엔 ‘부대찌개 최강자전, 4쿼터’라는 글씨가 잡힌다.
그렇다. 지금은 경기의 마지막 쿼터 작전타임. 스태프가 건네준 수건과 음료를 받으며 선수들이 벤치로 모여든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내며 붉은색 유니폼의 송탄팀 주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의정부 애들 생각보다 너무 맛있는데? 대체 비결이 뭐야?”
단숨에 음료수 한 통을 다 해치워 버린 센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결은 김치예요.”
“김치?”
“네. 듣자 하니 3년 숙성한 김치로 국물을 낸다더군요.”
“3년? 숙성기간이 너무 훌륭하잖아?”
분한 듯 이를 부득 갈며 주장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깔끔하면서 깊은 맛이 나더라니.”
이번엔 수건으로 두 눈을 꾸욱 누르고 있던 가드가 중얼거렸다.
“쟤들 의정부예요. 길가는 사람 붙잡고 부대찌개 원조가 어디냐고 물어보세요. 맛도 맛이지만 상징성도 저쪽이 우위예요.”
“그래. 간판 수도 저쪽이 훨씬 많지. 이대로 가다간 부대찌개는 다 의정부에서 나온 줄 알게 될 거야.”
탄식한 송탄의 주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승산이 없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서 절망이 진하게 묻어났다. 주변을 두리번대던 포워드가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은 어디 가셨지?”
그제야 모두가 깨닫는다. 교체 선수를 결정하고 작전을 짜야 할 감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아니. 작전타임인데 감독이 없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주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두 눈을 감는다.
“그래……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건가?”
그때였다.
덜컹.
경기장 한편.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 너무도 눈 부신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문 앞, 빛이 잦아들자 거기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잡힌다.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감독의 목소리.
“아니!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순간 치열했던 응원전을 벌이던 관중들도, 긴박하게 작전 토의를 하던 상대 팀 선수들도 일제히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송탄 부대찌개를 완성시킬 최강의 용병들이 도착했다.”
넓게 경기장을 비추던 화면, 용병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화면이 좁혀 들어간다. 그리하여 화면을 가득 채운 열린 문, 빛이 완전히 사그라든 곳에 모습을 드러낸 용병들.
머리에 알 수 없는 큰 모자를 쓰고 송탄의 유니폼을 입었다.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경기장을 바라보던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온다.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줌인되고 타이밍에 맞춰 감독이 설명을 시작한다.
“월드와이드 부드러움의 대명사, 치즈!”
남자의 머리 위에 씌워진 큼직한 치즈 모자.
화면이 치즈를 스쳐 지나가고 이번엔 다른 용병이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전통의 깊은 맛, 바로 사골 육수다!”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 큼직한 사골 모자.
“치즈?”
주장의 혼잣말에 이어.
“사골 육수?”
이구동성 화답하는 선수들. 주장이 불끈 두 주먹을 말아 쥔다.
“그래! 저 둘이라면 깊고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어.”
센터가 짝짝 박수를 친다.
“이거 진짜 의정부를 이겨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삐이익.
작전타임 끝을 알리는 주심의 신호가 떨어지고.
“와아!”
“송탄! 송탄!”
“의정부! 의정부!”
경기장이 폭발할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찬다. 힘차게 달려 나가는 송탄 부대찌개의 선수들. 듬직한 그들의 등을 비추던 화면이 하얗게 밝혀진다.
[치즈와 사골육수로 만들어낸 압도적인 맛의 신세계.]
[평택을 평정한 그 맛, 인천 만수동에 상륙했다.]
[지금 절찬 요리 중!]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자막.
화악.
자막이 지나간 화면에 다시 등장한 선수들. 어느새 경기는 끝났다. 선수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보는 중. 거기엔.
[송탄 부대찌개 우승!]
경기의 결과가 적혀 있다. 주장이 주먹으로 슥슥 눈가를 문지른다. 선수들이 말없이 다가와 그런 주장에게 둥글게 모여든다.
전광판 아래에서 선수들이 멋진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짜악.
둥글게 자리한 다섯 선수의 모습이 그래픽으로 처리되어 부드럽게 부대찌개 인서트로 연결된다.
보글보글.
맛깔나게 김을 피워 올리는 부대찌개, 그 위에 적당히 녹은 노란색 치즈가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예약 문의는 032-XXX-XXXX]
[원조 송탄 부대찌개 40초 CF END.]
광고가 끝났다.
“허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의 입이 벌어졌고.
“뭐야, 이거?”
다른 직원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
여사장은 재생이 끝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 프로젝터 조명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빙긋.
멋진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