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4화 (14/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화

14. 될 놈은 개천에서 용을 뽑는다(5)

인맥,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모종의 네트워크.

인맥이란 무섭다. 경제적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현대 사회에서 인맥은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KJ 식품에 근무하면서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겪어왔다. 황재평 이사만 해도 회장 아들 인맥이라는 이유만으로 비경력자 주제에 단숨에 마케팅 부서장을 꿰찼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건드린 사람이 하필 대표의 가장 가까운 인맥. 그래서 신용재 대리에게 본부장과 팀장이 날 보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모종의 각오를 했다.

‘회사 잘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각오.

식당을 향해 걸어가며 이런저런 감정을 느꼈다. 분노와 아쉬움 그리고 회사에 대한 실망감 같은 것들.

광인 기획이라는 회사를 오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었던 팀원들에겐 배신감마저 느꼈다.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계약직 고집을 부린 것도 모자라 해고당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이 걱정스러웠다.

거봐라. 멍충아.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 옆에서 빈정댈 안주미의 얼굴은 보너스고.

“뭘 그리 멍해 있어?”

그래서 차혜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설마 내가 거짓말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그건 아니겠죠.”

차혜민이 씩 웃는다.

“안 그래도 앓던 이라고 생각했거든.”

차혜민이 빙긋 웃었다.

“덕분에 시원하게 빼버렸네. 잘했어, 안덕모.”

김형철 팀장이 끼어들었다.

“대표님도 오실 거야. 좀 있으면 도착하시겠네.”

“대표님이요?”

“그래. 식당 쪽에 직접 사과하신다고.”

이번엔 신용재다. 참새를 덮치는 매처럼 날 향해 달려오는 육중한 근육질. 그가 두 손을 들어 내 어깨를 부여잡는다.

“아깐 미안했어. 선배가 되어가지고 부끄러운 소리를 했네.”

“아…….”

콱 막혀버린 목구멍에선 의미 없는 탄성만이 흘러나왔다.

“중요할 때 같은 편이 못 됐어. 걱정 많이 했겠다. 정말 미안해.”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을 통해 회사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짐작조차 못 했던 이야기였다.

처음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기분이 상한 오대식 실장은 현장을 이탈해 회사에 들어갔고 복귀하자마자 지원 본부장의 집무실에 난입했다.

‘버릇없는 놈이 까마득한 선배에게 무례를 범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쏙 빼놓은 채 오대식은 무례한 신입만을 문제 삼았다.

모욕감을 느꼈다. 다른 본부에 대한 직권 남용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촬영 못 하겠다.

지원 본부장 앞에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지원 본부장의 반응 역시 예상대로였다. 차혜민 본부장에게 쳐들어가 큰소리를 치려 했지만 차혜민은 거기 없었다. 결국 지원 본부장은 오대식을 옆에 끼고 대표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거긴 선객이 있었다.

선객의 정체는 기획본부, 즉 차혜민 본부장과 기획 1팀. 심각한 표정의 대표와 그들 사이엔 한 장의 서류가 있었고 잠시 후 지원본부장은 서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기획1팀 전원 일괄 사직서.]

팀장을 비롯한 기획 1팀 전원이 단체로 사직서를 썼다. 그걸 받아 든 차혜민은 크게 놀랐고 상황을 파악한 직후 대표에게 접견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대표와 차혜민 본부장 그리고 기획 1팀의 접견.

거기서 녹취가 재생되었다. 기획 1팀은 결연한 의지를 밝혔고 차혜민은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돌았던 오대식의 비리를 고해바쳤다.

‘대표님께서 그 사람 감싸면 저도 회사 그만둡니다.’

대표에게 상황 보고를 마친 차혜민 역시 기획 1팀과 함께했다.

회사를 이끄는 대표 입장에선 충분히 무례하다 느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 근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기획 1팀은 회사의 중추, 거기 개국공신인 차혜민 본부장이 가세했다. 진광인 대표는 친구를 선택하면 회사의 중추를 잃고 반대를 선택하려면 친구를 내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차혜민도 기획 1팀도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대표는 상식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판단을 내렸고 이후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했다.

그는 기획본부장과 기획 1팀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후객으로 집무실을 찾은 오대식에게는 즉시 회사를 떠날 것을 지시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이쪽으로 오는 중.

“솔직히 놀랐어. 하나가 이런 결정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신용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일괄 사직서 쓰자고 한 거. 하나 아이디어였어.”

“…….”

혼란스럽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움받던 후배를 위해 사표를 섰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사표 쓴 게 걔였다니까. 나 솔직히 걔 다시 봤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형철이 끼어든다.

“난 니들 다시 봤다. 이렇게 뭉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던 건데?”

“……하하.”

신용재가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잠시 후 약속처럼 진광인 대표가 도착했다. 난 그를 부대찌개 집 여사장에게 안내했다. 이번 일로 인해 곤란을 겪었던 여사장은 중견 광고 기획사 대표의 진심 어린 사과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렇게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날도 늦었는데. 식사나 같이하지.”

입사 후 처음 대면한 진광인 대표. 그는 저녁 자리를 제안했다. 난 대표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 * *

“부끄러운 꼴을 보여줬어. 미안하네.”

진광인 대표는 내게도 사과했다. 대표의 사과 앞에 난 급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덕모 씨가 큰일을 해줬어. 전부터 내보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런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랐네.”

차혜민이 입을 연다.

“쉬쉬했겠죠. 대표님 친구니까.”

“그래. 그랬겠지…….”

두 사람이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전 진광인 대표가 어려웠을 때 오대식이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갈 곳 없던 그를 회사로 끌고 온 건 일종의 보은이었다.

근무 기간이 길어지며 잡음이 들려왔고 진광인도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잘라낼 명분은 없었다.

직원들을 입을 다물었고 어떤 중역은 그를 옹호했다. 덕분에 진광인도 단호한 조치를 내릴 수 없었다.

“나도 문제지만 직원들도 잘못했어. 이런 문제가 그리 오랫동안 은폐되고 있었다니…… 사실 충격이더군.”

진광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이제 예전 광인 기획 아니에요. 회사가 이렇게 컸는걸요.”

차혜민이 웃었다.

“직원들 입장에서 오너가 멀게 느껴지고 때론 어렵고 무섭고, 또 한마디를 해도 잘 생각해서 해야 하는 회사. 광인은 이제 그런 회사가 된 거예요.”

“그렇지.”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로서는 잘된 일인데. 난 마냥 좋지만은 않네.”

“좋아하셔야죠. 이렇게 되기 위해 그 고생해온 건데.”

“하하…….”

쓰게 웃는 진광인, 같은 미소로 화답하는 차혜민.

대표와 본부장을 앞에 둔 어려운 자리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편하게 만난 세 사람처럼 술이 한 순배 돌았고 안주로 나온 좋은 횟감을 맛보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다.

“그나저나 말로 끝내실 건가요?”

“응?”

차혜민의 물음. 벌게진 얼굴의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덕모가 큰일 했잖아요. 그냥 말로 때우실 일 아닌 거 같은데요.”

“아.”

진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얘기 들었어. 신한 건 잘 풀린 것도 자네 덕이었다고?”

“네. 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친구가 대단하구만. 차 본부장이 눈여겨본 이유가 있었어.”

“감사합니다.”

눈여겨보았다? 나를?

그간 차혜민이 내게 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게만 광고 평을 물었고, 불합격자를 직접 찾았으며 빛날 광 어쩌고 이야기했던 일들.

“이만하면 검증은 충분한 것 같고. 일단 계약직 꼬리표부터 떼시죠.”

진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축하해, 안덕모. 이제 정직원이네?”

“…….”

말문이 막혔다.

차별적 급여, 불투명한 재계약 여부, 특히 어머니께서 많이 반발하셨던 계약직. 아직 3개월이나 남은 계약 기간.

방금 그 계약직 인턴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졌다. 너무도 쉽게, 다 예정되었던 일인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으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진광인이 휘휘 손을 저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건 회사 입장에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럼 이제 진짜 포상을 줘야 할 텐데.”

대표가 기분 좋게 웃는다.

“원하는 걸 하나 말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걸로.”

대답은 쉽게 나왔다. 대표의 말이 아니어도 이 자리에서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광고…… 회사에서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원?”

“네. 좋은 광고 한번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욕심이 좀 생겼거든요.”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진광인.

“알겠네. 그렇게 하지.”

대표의 승낙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난 이마가 테이블에 닿을 만큼 깊이 허리를 숙였다.

* * *

부웅-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조금 전 대표와의 식사, 그곳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하…….”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룸미러로 택시기사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삼 개월 만에 계약직을 마쳤다. 이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때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직원 안덕모를 있게 만들어준 사람. 생각지도 못한 용기 있는 결단을 해준 인물.

하지만 그동안 그런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인물.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이유도 묻고 싶었다.

톡톡. 뚜르르.

연결음이 울렸다.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를 훌쩍 넘겼다. 늦어서 전화를 안 받는구나 생각할 즈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이 시간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경하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

“선배님.”

난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했다.

“오늘 일 얘기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선배님.”

[…….]

그녀에게 큰 빚을 졌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대표를 움직였고 덕분에 원하던 대로의 광고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정직원 됐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좀 전에 팀 톡방에 떴더라.]

“아.”

대표의 결정이 벌써 공유된 모양. 뜻밖의 신속함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이제 선배라고 부르지 마.]

“네?”

[나랑 같은 직급 됐잖아? 같이 입사한 사이끼리 선배는 무슨 선배야?]

쿨하다. 그녀답다.

[징그럽게.]

독기 어린 마무리도 마찬가지.

“아니,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동기니까 이제 너도 나한테 말 놔.]

“네?”

덜컥.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와다다다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끊어진 전화기를 보고 있노라니 기분 좋게 올라오던 술기운도 한순간에 달아났다.

“뭐지?”

난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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