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화
12. 될 놈은 개천에서 용을 뽑는다(3)
“하나 씨는 회사 생활 할만해?”
“네.”
“힘든 일은 없고?”
“없는데요?”
“…….”
신한 제약으로 향하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경하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봤지만 돌아온 건 짤막한 단답이 전부였다.
이야기는 도통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신용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친해지긴 뭘 친해져?’
두 분 이번 기회에 좀 친해지세요.
신용재는 덕모의 제안대로 해보려 노력했다. 좋든 싫든 신한 건으로 함께 일하게 된 사이니 언제까지고 어색한 관계로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 그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절대 친해질 수가 없다는 걸.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달리던 차가 정체로 멈추고 대화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사라지자 경하나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대리님은 운동이 좋으세요?”
신용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좋지. 원래 운동이란 운동은 다 좋아했거든. 직장 생활 안 했으면 트레이너 됐을 거야, 아마.”
취미에 대한 이야기, 그런 대화는 끊길 일이 없다.
“건강해지는 건 기본이고 집중력도 올라간다니까? 하나 씨는 운동 안 좋아해?”
신이 난 목소리. 정체되었던 차가 다시 움직였고 동시에 대답도 날아왔다.
“네. 안 좋아해요. 대리님도 사무실에서 안 했으면 좋겠어요. 땀 냄새난단 말이에요.”
“……아. 하하.”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던 걸까?
작게 고개를 저으며 신용재가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주일 동안 인천으로 출퇴근하게 된 바람에 당분간 얼굴 못 보는 녀석. 이 불편한 상황을 만든 원흉.
“좋겠네. 덕모 자식.”
무의식의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뭐가 좋아요?”
“아, 들었어?”
신용재가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덕모 말이야. 일주일 동안 사무실 안 와도 되니까 출퇴근 프리하잖아. 뭐 오늘 같은 날은 감독님하고 술도 한잔할 테고.”
“아…….”
경하나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전 별로던데.”
“뭐가?”
“촬영팀이요. 특히 오대식 실장님.”
의외의 포인트에서 대화가 터졌다. 그리고 한번 터진 경하나의 입은 술술 다음 대화를 내어놓았다.
“사무실이 산이에요? 등산복에 선글라스 꼴 보기 싫었어요. 또 그 사람 광고주한테 삥 뜯는다는 소문 있던데.”
“아…….”
신용재의 머릿속에 잊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때는 그가 신입으로 광인 기획에 입사한 직후. 온천 광고 촬영을 위해 오대식 실장과 충청도로 출장을 갔고 나이 지긋한 온천 주인에게 그가 했던 일이 기억났다.
촬영 기간 동안 무료 식사, 무료시설사용, 저녁 대접은 물론이고 거마비까지 뜯어내 만원 자리 몇 장을 자신의 품에 욱여넣던 모습.
광고주는 소중한 고객이라는 인식이 크게 뒤흔들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신용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직도 그러겠어?”
“그거야 모르죠.”
“하긴 미리 얘기를 좀 해줬어야 했는데.”
신용재가 품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안덕모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안덕모?”
메시지의 발신자는 안덕모.
“어, 저한테도 왔는데요?”
내비게이션을 실행시켜 거치해 놓은 경하나의 핸드폰에도 같은 메시지가 도착한 것. 신용재가 메시지를 눌렀다. 메시지엔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일을 실행시켰다. 첨부된 파일은 음성파일. 핸드폰에서 대화가 흘러나왔고 이내 신용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왜 그런 거 같냐?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광인 기획 기획본부. 기획 2팀 회의실.
“뭐가?”
“덕모 말이야.”
“아하.”
“사회생활 감 없는 애도 아니고 왜 굴러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차지?”
김형철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게 요즘 애들 스타일인가?”
“정말 모르겠어?”
“그렇다니까?”
“형도 참 어지간히 눈치 없다.”
이미래의 공격에 김형철의 이마에 굵직한 주름이 잡혔다
“그러니까 뭐냐고.”
“미희랑 용재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 알 테고.”
“그걸 모르겠냐?”
“걔들이 후배 하나씩 꿰차고 앉아서 남녀 대립 구도 만든 것도 알지?”
“……대충은.”
김형철도 알고 있다. 지난번 신한 제약 광고건 가지고 양 팀으로 쪼개져 경쟁했던 사이니까. 자기 팀이 처한 상황이 다시 한번 떠올랐는지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모래알이지. 에휴. 아마 국회도 걔들보다 단합이 잘될 거다.”
“딱히 관심 가지고 알아본 건 아닌데 우리랑 그 팀이 가까워서 의도하지 않아도 보고 듣는 게 있거든?”
이미래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자기는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옆 팀 팀장. 김형철은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다.
“그 팀에 남녀 대립 구도를 깨려는 놈이 하나 보이더라.”
“그게 덕모다?”
“그렇지.”
“흠.”
“생각해 봐. 신한 담당 자리 꿰차고 있으면 못해도 사오 년은 승승장구할걸?”
“그렇겠지.”
“근데 덕모 걔가 팀 막내야. 자기가 승승장구하면 걔 선배인 하나는 갈수록 초라해지겠지. 어쩔 수 없이 둘이 비교가 될 거고 그러면 대결 구도도 끝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신한을 넘겼다?”
“그래. 제일 껄끄러운 하나한테 말이지.”
팔짱을 낀 이미래. 그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슥슥 매만졌다.
“아닌 거 같은데?”
“맞다니까?”
이미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덕모 특이한 애야. 나 느낌 정확한 거 알잖아? 신한 아니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아.”
곰곰이 듣고 있던 김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엔 그 감 틀렸어. 걔 이 바닥에 발들인 지 삼 개월도 안된 초짜야. 신한 같은 큰 건 끌고 가는 게 자신이 없었겠지.”
“아니라니까. 멍충아!”
“야! 멍충이라고 하지 말랬지?”
선후배 간 주먹다짐이 다시 한번 시작되기 직전.
우웅.
테이블 위 김형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 용재야.”
전화기에 귀를 붙인 채 상대의 말을 듣던 그의 눈이 빠질 듯 커졌다.
“뭐 음성 파일? 누구? 오 실장?”
심각해지는 목소리. 이미래는 알 수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어. 확인해 볼게. 넌 덕모한테 전화해서 무슨 상황인지 확인해.”
전화를 끊은 그가 급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조작했다.
“뭔데 그래?”
“이 자식이 대체 뭘 보낸 거야?”
핸드폰에 도착한 메시지. 안덕모가 보낸 것이었다. 첨부된 파일이 있었다. 김형철이 파일을 실행했다.
[그러니까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조용찬의 목소리에 이어.
[두당 오십, 백오십만 준비해 주세요.]
오대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생되는 음성파일에 회의실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그걸 보냈다고?”
“네.”
“……누구한테?”
“기획 1팀장님하고 팀원들한테요.”
“미치겠네, 정말.”
원조 송탄 부대찌개, 승합차를 세워둔 주차장에서 조용찬이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덕모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조금 전 무료 식사를 제공받은 식당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후 녹취를 시작했다. 대화의 방향은 우려했던 대로 흘러갔고 난 녹취해 둔 파일을 기획 1팀 전원에게 보냈다.
“아까 말했지만 이거 이상한 거 아냐. 이 바닥 관행 같은 거라고.”
조용찬이 퍽퍽 가슴을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식당 같은 조그만 사업자의 광고를 찍을 땐 거마비 조로 용돈을 받아왔다는 말. 그건 광인 기획 같은 광고 대행사는 물론 지역광고를 찍는 방송국도 마찬가지라는 소리.
물론 그건 분노만 키우는 헛소리였다.
“관행이고 나발이고 아까 사장님 표정 못 봤어요? 두 분 절대로 해선 안 될 일을 한 거라구요.”
판단 기준은 명확하다. 거마비를 요구했을 때 사장이 지었던 표정.
황당하고 난감하고, 이러다 저 사람들 기분 상해서 개떡 같은 광고 만들어주면 어쩌나 고심이 잔뜩 묻어나던 그 표정.
그거면 충분하다.
“두 분이 회사 얼굴에 똥칠을 한 거란 말입니다!”
“아…… 말 안 통하네, 진짜.”
결국 조용찬이 포기했다. 승합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워 올리던 오대식,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신입.”
“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데?”
아주 당당하다. 나쁜 짓 들킨 사람답지 않게 너무도.
“사장님한테 사과하세요.”
“그럼 아량을 베풀어 넘어가 주시겠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아량을 베풉니까? 결정은 회사에서 할 일이죠. 밥값은 제가 계산했으니 두 분은 사장님께 사과부터 하세요.”
“싫은데?”
“그럼 이 파일 회사 전체에 보낼 겁니다.”
오대식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 그렇게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마치 귀여운 조카의 재롱을 보는 삼촌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그가 내게 다가왔다.
“막 정의의 사도가 된 거 같아? 신한 건으로 박수받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냐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까 그랬지? 현장에서 배울 게 많을 거라고. 이 바닥 원래 이런 바닥이야.”
그의 검지손가락이 내 가슴팍을 쿡쿡 찌른다.
“현장엔 현장만의 규칙이 있는 거야. 네가 현장 알아? 모르면 어쭙잖게 정의감 내세우지 말고 닥치고 배우라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인간이다. 물론 이렇게 된 상황에 거마비를 뜯어내진 못하겠지만 난 이 일을 대충 넘길 생각이 없다.
식당 쪽을 살폈다. 현관문 너머 빨간색 두건 끝자락이 보인다. 여사장이 머리에 두르고 있던 빨간 두건.
자기 때문에 다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눈치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눈치 보는 광고주, 부정한 금품을 요구하고도 당당한 촬영감독.
정수리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라는 듯 들어 올렸다.
“대표님한테 보냅니다. 대표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해 보세요.”
“아. 좀 전에 말했지 않나?”
입에 문 이쑤시개를 잘근거리며 그가 히죽 웃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우웅.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신용재. 아까부터 계속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중이었다.
“신 대리님?”
[지금 촬영팀하고 같이 있어?]
“네.”
[녹취 파일 보낸 건 촬영팀도 알고?]
“네.”
[분위기는?]
“안 좋죠.”
촬영팀 쪽을 살폈다. 통화 중에 핸드폰을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핸드폰을 빼앗을 기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중.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녹취 들었어.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네…….”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 했는데…… 촬영팀 더 이상 도발하지 마.]
“네?”
[문제 있다는 거 알아. 근데 그 사람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야.]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
부득.
악물린 어금니에서 섬뜩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왜요?”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침묵 뒤 들려오는 풀 죽은 목소리.
[오대식 실장, 대표님 친구야.]
“……그게 무슨?”
고개를 돌렸다. 마치 통화 내용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짓는 오대식.
[진광인 대표 삼십 년 지기 친구라고…….]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