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1화 (11/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1화

11. 될 놈은 개천에서 용을 뽑는다(2)

“야. 너.”

“네?”

“잠깐 따라 나와.”

“…….”

회의가 끝난 사무실, 경하나가 독대를 요구해 왔다. 그 말투는 마치 ‘너 옥상으로 따라와’처럼 들렸다. 당사자의 동의 따윈 무시한 채 그녀가 성큼성큼 멀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신용재가 막아선다.

“뭐야, 선수 뺏겼네? 하나 씨 미팅 끝나면 나랑도 잠깐 보자.”

아무래도 줄줄이 면담이 생길 모양.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 경하나를 쫓았다.

“뭐냐? 너 신한 제약이랑 안 좋은 일 있었던 거지?”

경하나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회사 앞 한적한 커피숍. 갓 나온 커피가 뿜어내는 더운 김 너머 경하나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이유가 뭔데.”

“저번에 선배가 했던 말 때문이에요.”

경하나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편한 복장, 화장기 없는 얼굴을 가린 동그란 안경, 그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컬이 큼직한 갈색 머리.

“저번에 그랬잖아요. 신한 제약 건 운이 좋아 잘 풀린 거라고.”

그녀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힌다.

커피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조금 전 회의에서 광인 기획에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신한 제약 담당을 그녀에게 넘긴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 *

‘운이 좋았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신한 제약, 호랑이 서영춘 상무의 신임을 얻은 건 노력과 더불어 과거 경력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얼마 전 회식 자리가 끝났을 때 경하나는 말했다.

‘좋아할 수 있을 때 많이 좋아해 둬. 그 밑천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의 적대감 가득한 말은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신한과의 일이 잘 풀리고 우리 쪽으로 하나둘 광고 건들이 넘어오는 동안에도 난 내내 그 말을 곱씹었다.

이후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소한 일들을 담당하고 있는 경하나를 보았고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건 머릿속에 박힌 그녀의 말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 같다.

“신한 제약하고 아무 문제 없어요. 후속 광고 촬영 시작했고 PPL도 방송국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잘 체크만 해주면 돼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랑 오랫동안 일한 광고 대행사, 알고 보니 수준 이하더군요. 우리랑 일하면서 신한도 알게 된 것 같고 서영춘 상무가 잘리지 않는 한 다른 광고도 우리 쪽으로 다 넘어올 거예요.”

신한 제약과는 안정권이다. 담당자 하기 나름이지만 어지간히 소홀하지 않고서는 쪼그라들기 어려운 비즈니스가 되었다.

“특히 서 상무 잘 케어해 주세요. 듣자 하니 제법 규모 있는 주류 수입회사가 자회사로 있더군요. 서 상무가 거기 비상근 임원도 겸하고 있구요.”

앞으로 해야 할 일, 중요하게 케어해야 할 사람. 이로써 핵심 업무 전달은 끝났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하나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러니까 결국 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그거야?”

“뭐. 비슷해요.”

고개를 끄덕였다.

“신한 제약 담당 카피라이터로 있는 한 선배가 절 인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이번일 결정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지만 고민은 길었다. 기획 1팀이 처해 있는 문제 때문이었다.

강미희와 신용재로 대변되는 두 선임의 대립, 후배를 쓰레기 취급하는 경하나. 그리고 그런 부하들에게 질려 자꾸만 달아나는 팀장.

그건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광인 기획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상황을 바꾸길 원했고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했을 때 즉흥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제 넌 신한 대신 부대찌개 식당 광고를 맡게 돼.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네. 물론.”

알고 있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여러모로 생뚱맞게 튀어나와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광고, 지역방송 광고. 게다가 촬영지는 본사와 멀리 떨어진 인천 지역.

“지금껏 받았던 관심과는 안녕이란 뜻이죠.”

“잘 아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간다.

“신한 담당 넘겨주면 후배로 인정해 줄 것 같았어?”

“…….”

“착각하지 마. 난 이 기회 쿨하게 받을 거야. 그리고 너보다 훨씬 잘 해낼 거야.”

경하나가 웃는다. 생각해 보니 몇 달 동안 그녀와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 모습 조금 소름 끼치긴 한다만.

“서 상무 그 양반한테 내가 어떤 인간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그 입에서 네 이름 두 번 다시 안 나오도록 완전히 구워삶아 놓을 생각이라고.”

“좋네요. 그런 각오.”

“그래. 그래서 난 지금 너한테 정말 고마워. 카피라이터로서 평생 한 번 잡을까 말까 한 기회를 나한테 홀랑 넘겨준 꼴이니까.”

고마운 거 맞나? 표정은 싸우자는 거 같은데. 어찌 됐든 난 그녀와 마주 웃었다.

“알겠고. 저랑 약속 하나만 해요.”

“약속? 무슨?”

“지금부터 전 부대찌개 식당 광고를 담당할 거예요. 뭐가 됐든 한 달 안에 그 결과물이 전파를 타겠죠?”

“그런데?”

“그 결과물 보고 절 판단해 주세요.”

“…….”

“클라이언트였다는 선입견 빼고, 경력이 맞아서 운 좋게 성공한 풋내기라는 인식 말고…….”

난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회사 후배로, 이제 막 부대찌개 식당 광고로 처음 업계에 발 들인 새내기로 봐달라는 말입니다.”

경하나가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온 대답은 참 성의 없었다.

“그러든지.”

“그럼 약속한 겁니다?”

피식.

차가운 비웃음.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 * *

[오늘부터야?]

“네. 촬영팀하고 같이 이동 중이요.”

[이번 주엔 못 보겠네?]

“네 이번 주에 컨셉 잡고 주말 지나서 본 촬영 들어갈 테니까. 아마 다음 주 후반에나 출근할 것 같네요.”

인천으로 향하는 승합차 안, 전화기 너머 신용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둘도 없는 꿀담당 자리를 왜 하나한테 홀랑 넘겨줘?]

처음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신용재 대리 나름 나와 팀 안의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의도 없이 담당을 넘겨버렸으니 서운할 만도 하다.

[덕분에 내가 하나 서포트하잖아. 오늘도 같이 들어가야 되는데 불편해 죽겠다. 짜식아.]

“이번 기회에 둘이 친하게 좀 지내세요.”

[그게 되겠냐? 강 대리나 걔나 우리랑 결이 다른 종족이야. 친해지려고 해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니까?]

달리던 승합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원조 송탄 부대찌개, 신한 제약을 넘기고 만나야 할 새로운 광고주다.

“도착했네요. 그만 끊어요.”

[그래, 수고하고.]

짝을 잃게 되어 힘이 빠진 신용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끼익.

한적한 주차장에 승합차가 정차했다.

“참. 안덕모 씨는 이런 광고 처음이지?”

이번 광고 촬영감독 오대식 실장, 차가 출발하자마자 잠들어 이동하는 내내 보조석에서 숙면을 취했던 그가 물었다.

“네. 처음이에요.”

“얘기 들었어. 신한 제약 넘기고 이거 맡았다며?”

“네…….”

“그래, 뭐 좋게 생각해. 덕모 씨 입사한 지 세 달도 안 됐잖아? 신입 때는 그런 큼직한 건보다 이런 현장에서 배울 게 더 많아.”

까칠한 턱수염, 촬영 중엔 늘 저렇게 입는지 등산복 차림의 그가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더니 상의를 끌어 올려 슥슥 문지른다.

“카피라이터? 사실 이 정도 소형 광고엔 카피라이터 필요 없어. 인건비도 못 건지는 일에 뭐하러 세 명이나 보냈나 몰라.”

오 실장이 쯧쯧 혀를 찼다.

“아무튼 이번 일 나랑 용찬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덕모 씨는 현장 배운다 생각하고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 오케이?”

“음…….”

조금 혼란스럽다. 오대식 실장은 오랫동안 직접 촬영을 담당해온 베테랑, 구도나 촬영기법 같은 거야 그가 전문일 거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일 터.

“아, 배고프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승합차에 적힌 광인 기획이라는 글자를 본 식당 관계자들이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디 밥부터 좀 얻어먹어 볼까?”

그가 선글라스를 쓰고 보조석 문을 연다. 식당 관계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오 실장의 뒷모습을 보며 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잠시 후.

난 오 실장의 말처럼 침묵을 지켰다. 물론 현장 배운다는 심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당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쪽 테이블엔 어느새 빈 소주병 세 개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너머 얼굴이 벌게진 오대식 실장이 눈에 들어온다.

“어으, 잘 먹었다.”

두 손을 뒤로 뻗은 채 부른 배를 내밀고 있는 것도 꼴 보기 싫지만.

“쯥! 쯥.”

무슨 센스인지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친 채 이를 쑤시며 불쾌한 소리는 내는 꼴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옆에선 조용조용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저희가 서울에서 두 시간을 왔어요. 오늘 하고 내일 사장님하고 직원들 인터뷰하고 주말 내내 식당 근처에서 묵으면서 철야로 광고 컨셉 만들어야 된다구요. 그래야 다음 주 월요일에 본 촬영 들어갈 수 있단 말이죠.”

광고주임에도 왜인지 굽실대는 광고주 옆에서 조용찬이 하는 말. 하지만 그의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우린 두 시간을 오지도 않았고 이 근처에 묵을 계획도 없으며 더욱이 주말 내내 철야로 광고컨셉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난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조용찬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우리도 엄청 힘들어요. 요즘 회사에서 숙소비랑 밥값이나 챙겨주나요? 다 저희 사비로 하는 거지요. 그래서 말씀인데 뭐랄까요? 그…… 음.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 테이블 아래 손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보지 않아도 그게 뭔 줄 알겠다. 과연 조용찬의 요구를 뒤늦게 이해한 중년의 여사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마비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하하하.”

조용찬이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모습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지금 식탁 너머에선 광인 기획 직원이 벌이고 있는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마련을 해드려야…….”

사장이 곤란한 모양. 조용찬이 뭔가 말하려 했으나 오대식 실장이 선수를 쳤다.

“자. 맛있는 식사도 내주시고 하셨으니까.”

그가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당 오십. 딱 백오십만 준비해 주세요.”

“백, 백오십이요?”

생각지도 못했던 거금. 사장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럼 나도 이 한 몸 불살라서 좋은 작품 뽑아볼라니까.”

오대식의 호언장담. 더는 듣는 것도 참는 것도 불가능했다.

“잠깐. 잠깐만요.”

거만하게 몸을 뒤로 젖힌 채 이를 드러내며 웃던 오대식 실장. 그가 빤히 날 바라본다. 난 테이블 아래 놓아둔 핸드폰을 끌어당기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세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오대식이 눈매를 좁혔다.

“어허, 가만있어 봐. 덕모 씨 몫도 챙겨줄 거니까.”

“하아…….”

뜨거워진 숨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다. 이토록 속이 뒤집히는 기분.

“광고주한테 금품을 갈취해? 당신들 미쳤어?”

젖혔던 허리를 바로 하며 오대식이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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