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9화
9. 신한제약 속평수(3)
배경은 어느 사무실. 창밖은 이미 어둡다. 화면 너머 보이는 직원들의 자리는 듬성듬성 비어 있어 퇴근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준다.
“아이고…….”
주인공이 등장한다.
유난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늘의 주인공. 서류 뭉치를 들고 걸어가던 부장이 발걸음을 멈춘다.
“강 대리 어디 아픈가?”
주인공이 고개를 돌린다. 걱정스러운 부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 먹은 게 잘못됐는지 속이 안 좋습니다.”
“어허. 체했나 보구만.”
화면이 정지한다.
그리고 영상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부장이 뒷걸음치고 자리에 앉아 있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걸어간다.
되감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여기저기 비어 있던 사무실의 빈자리들이 다시 채워지고 어두웠던 사무실 창밖이 다시 환하게 밝혀진다.
그리하여 오늘 낮. 강 대리의 얼굴이 화면에 다시 잡힌다.
“보고서가 왜 이따위야? 다시 해!”
강 대리의 얼굴에 복사지 뭉치가 화악 뿌려진다.
“아 죄송합니다.”
후다닥 땅에 떨어진 복사지를 집어 드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 대리! 자료 아직이야? 시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지?”
“강 대리! 이리 와봐. 마우스가 안 움직이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
“강 대리? 복사지 다 떨어졌어.”
“강 대리. 난 설탕 둘 프림 둘!”
사방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요구들. 강 대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윽!”
그가 아랫배를 짚으며 오만상을 찌푸린다. 그랬다. 점심을 먹은 직후 쏟아진 스트레스로 인해 강 대리는 체하고 말았던 것.
찌푸린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카메라가 멀어졌을 때 주인공의 어깨너머 창은 다시 저녁에 되어 있었다.
“부장님. 그래서 오늘은 일찍 퇴근을…….”
“잠깐만 기다리게.”
부장이 품속에 손을 넣는다.
“부하직원이 아픈데 그냥 보낼 수가 있나.”
품속을 뒤져서 꺼낸 건 소화제. 오늘의 광고 제품인 신한 제약의 속평수다.
까드득.
부장이 직접 뚜껑을 열어 속평수를 내민다. 부장의 얼굴엔 아주 인자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마셔봐. 체했을 땐 이게 직빵이거든.”
강 대리에게 회사는 말라비틀어진 사막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따듯한 관심 한번 준 적이 없었다. 말라버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강 대리의 얼굴에 진한 감동이 번져 나간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일하다 체하면 쓰나? 나도 자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강 대리가 속평수를 들이켠다. 밀폐된 사무실이지만 어디선가 불어온 신선한 바람에 그의 머리칼과 옷깃이 나부낀다.
“어때 좀 나아진 거 같나?”
“네. 이제 살 것 같습니다. 부장님.”
카메라가 천천히 줌아웃한다. 군데군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오늘도 밤늦게 청춘을 불태우고 있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정지된 화면 안에 들어온다.
그 위로 등장하는 헤드카피.
[먹고살자고 하는 회사 생활인데.]
[과식, 소화불량, 더부룩함. 고통받는 직장인들에게 신의 한 수 신한 제약 속평수!]
정지된 화면에 한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 전 강 대리에게 속평수를 내밀었던 부장이다. 강 대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그의 목소리.
“퇴근하기 전에 보고서는 끝내 놓고 가. 알았지?”
멍하니 부장을 바라보던 강 대리.
“윽!”
그가 다시 아랫배를 움켜쥐며 책상 위에 쓰러진다.
[신한 제약 속평수, 강 대리의 야근 30초. END.]
시연이 끝났다. 화면이 꺼지고 어두웠던 시연장에 하나둘 불이 밝혀진다. 빛을 받아 드러나는 얼굴들.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 얼굴이 오늘 광고를 평가해 줄 클라이언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무님, 어떠셨는지?”
클라이언트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다. 광인 기획은 물론 신한 제약 마케팅 담당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린다.
“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턱을 슥슥 매만지는 신한 제약 상무.
꿀꺽.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한 시연장에 울려 퍼졌다.
“한번 물어봅시다. 이 광고 어느 분 아이디어지요?”
반응을 종잡기 어렵다. 그의 다음 말에 긍정이 붙어도 부정이 붙어도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을 깬 건 차혜민이었다.
“네. 저기 안덕모 카피라이터입니다.”
그녀가 턱짓으로 날 가리킨다.
“네, 접니다.”
“그렇군요.”
상무의 시선이 느껴진다. 마주 보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의 몇 초가 지나고 다시 들려온 목소리.
“솔직히 별로네요. 이 광고.”
평가가 떨어졌다. 결과는 부정적. 바라본 상무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였다.
“유명한 모델도 아니고, 제품이 특별히 부각되지도 않는데? 난 그런 거 생각했거든? 딱 보면 알아보는 연예인 나와서 제품 들고 멋진 포즈 딱 취하는 거.”
거만하게 등받이에 몸은 기댄 채 내 쪽을 바라본다.
“물어봅시다. 안덕모 씨는 왜 이런 아이디어를 내셨죠?”
시연장에 앉아 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게 집중되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상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줬으면 좋겠군요.”
시연장, 상무를 향해 있던 수십 개의 눈빛이 일제히 내 쪽으로 쏟아졌다.
* * *
이런 반응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완성된 기획안이 클라이언트에게 전달되었을 때 잡음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한 제약 실무자들에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문제는 윤 부장. 마케팅팀장인 그는 광인의 광고에 혹평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잡음은 차 본부장에 의해 진화되었다. 그제야 우린 광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방송 준비가 끝난 광고를 시연하는 자리. 신한 제약은 기획 1팀 전원 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고 난 여전히 잡음이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 모를 질문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 왔다.
“생약 소화제 시장은 수십 년간 시장을 지켜온 강자들이 주도하는 시장입니다. 생약 소화제, 사실 제조가 어렵다고 할 수 없는 제품입니다. 제약회사건 음료회사건 마음만 먹으면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고 그만큼 차별화된 전략이 없으면 도태되기 쉽죠.”
날 바라보던 몇 개의 눈빛이 경악으로 변한다.
“얼마 전 귀사의 마케팅 전략을 보았습니다. 아쉽지만 이렇다 할 전략은 없더군요.”
상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서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현재 시장 강자들은 시니어와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속평수는 다른 타깃에게 어필해야겠다.”
상무의 팔짱이 풀렸다. 풀려난 오른손, 그 손가락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바로 젊은 남성 직장인, 사회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칸, 스트레스와 격무가 일상인 까닭에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이들, 바로 젊은 직장인. 이 광고는 그들을 타깃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린 광고만 맡겼는데 광인은 전략을 준비했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건 좀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전략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조금 풀려가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는다. 당황스러운 상황, 일개 담당으로서 이 이상의 대응은 불가능하다.
차혜민을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보내는 구조 신호.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의 입술은 도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끄덕.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 해석하자면 알아서 하라는 뜻이겠지.
“출시 전략이든 타깃팅이든 마케팅 전략은 우리가 짜는 거지요. 광고를 만드는 광인 기획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궁지에 몰렸다. 코너에 몰린 쥐를 바라보는 포식자처럼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상무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우리 쪽 얘기도 좀 들어봅시다. 윤 부장?”
“네 상무님.”
“왜 가만히 있지? 광인 기획의 카피라이터가 그러잖아. 속평수가 출시 전략이 없다고. 윤 부장이 가만히 있으면 그걸 수긍하는 꼴이 되잖아?”
질문은 받은 윤 부장이라는 사내. 그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떨린다.
“저희는 경쟁사보다 기능성 재료 함량을 대폭 늘리고 맛과 가격 경쟁력을…….”
“허허. 헛소리 말고!”
호통이 터졌다. 윤 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된다.
“얘기 못 들었어? 전략! 신제품이 어느 타깃에게 어필해야 하는지 어떤 포인트를 강조해야 하는지 또 차별화된 USP는 뭔지! 그런 전략 말이야.”
“…….”
“없어? 마케팅 부서장이 그런 고민도 안 해봤어?”
부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상무의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야 원.”
쯧쯧 혀를 찬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안덕모 카피라이터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얘기를 듣고 보니 광고가 좀 달리 보이네. 우리가 뭐가 부족했던 건지도 보이고.”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상무의 말은 자칫 광고 전체가 뒤집히는 상황에서 내려온 한 가닥 동아줄과 같았다.
“얘기를 듣고 보니 광고 퍽 마음에 듭니다. 고맙습니다, 카피라이터님.”
“……네.”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괜찮다면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고견을 듣는 자리니 걸맞은 곳으로 가시죠.”
“하지만 저 혼자 온 게 아니라서.”
차혜민 쪽 바라보았다. 이 자리엔 우리 쪽 직원도 열 명 가까이 참석한 상태.
“아, 걱정 마세요. 다 같이 가도 충분할 만큼 자리는 넉넉하니까.”
그가 빙긋 웃었다.
“신제품 성공시키려면 예산도 더 필요할 것 같군요. 후속 광고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고…… 어떻습니까, 차 본부장님. 식사 같이해도 괜찮겠지요?”
지금껏 꾹 닫혀 있던 차혜민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네. 물론.”
“그럼 다들 갑시다.”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풍채가 대단하다. 어쩐지 호통칠 때 천둥 치는 소리가 나더라니.
상무의 곁에 차혜민이 재빨리 따라붙는다. 그 뒤로 크게 혼이 난 윤 부장이 따라붙는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들.
“후아…….”
난 그제야 참았던 긴 한숨을 토해냈다.
위급했던 상황은 끝났다. 두 손을 들어 굳은 얼굴을 슥슥 매만졌다.
“잘했어, 안덕모.”
팀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전 직장 경력을 이렇게 써먹네.”
팀장의 말대로다. 전 직장의 경력, 식품회사 음료 파트의 마케팅 책임자. 매년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신제품이 출시되고 하나하나 마케팅 전략과 광고 전략을 짜던 것이 바로 내 업무였다.
이번 광고를 만들면서 클라이언트의 출시 전략 부재를 안타까워한 이유. 상무의 지적에 주눅 들지 않았던 이유. 차혜민이 내게 모든 걸 일임한 이유.
모두 내가 이 시장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팀장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의 어깨너머 신용재의 모습이 보인다.
척.
상기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대리님.”
그때 뒤통수에 냉랭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곳엔 강미희와 경하나가 있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재빨리 시선을 회피하는 경하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풍성한 갈색 파마머리가 흔들리며 너무 악물어서 힘줄이 솟아오른 관자놀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만 일어나. 주인공이 늦으면 쓰나.”
“네. 가야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시연장.
[신한 제약 속평수, 강 대리의 야근 30초. END.]
아직 시연장 모니터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문구를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