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6화
6화. 난 선배고 넌 인턴이야
“재미있었어요. 그쪽 광고.”
“그렇습니까?”
“제가 사람 좀 볼 줄 알아요. 안덕모 씨 좋은 인재예요. 광고 보는 안목도 있고 아이디어가 신선해.”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쉽게 됐어요. 뽑을 사람은 한 명인데 지원자 한 사람이 실력이 너무 좋아서.”
“그렇군요.”
“경하나 씨라고 제삼 기획 출신인데 이 바닥에서 나름 유명한 사람이에요. 제삼 기획 CF 메인 카피라이터였고 길지 않은 경력인데 대표작도 몇 개 가졌거든요. 참 그리고 안덕모 씨보다 한 살 어릴 거예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통보를 받고 5분도 안 되어 차혜민이 만남을 청해왔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약속 장소로 나왔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누가 나 대신 합격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나? 그것도 불합격 통보받은 날에.
이쪽은 입사지원자 저쪽은 본부장이지만 더 이상 불편함을 참기 힘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목소리는 냉랭했다. 하지만 차혜민은 여전히 웃는다.
“억울해요?”
“네?”
“떨어진 거 억울하냐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터져 나오려는 욕지기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네. 억울해요.”
“어떤 점이?”
“더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게 억울하고 사람 알아볼 줄 모르는 회사 같아서 그것도 억울하고. 또…….”
말을 하다 멈추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어서였다.
“으흥. 역시 재미있네, 안덕모 씨는.”
아까부터 재미, 재미.
“제가 개그맨입니까? 아까부터 무슨 재미 타령입니까?”
“봤죠?”
앞뒤 다 자른 물음. 난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뭘요?”
“모토, 우리 회사 모토.”
그제야 뭘 묻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봤죠. 홈페이지 첫 번째 게시글에 쓰여 있는거 아닙니까.”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줄 알았어.”
목소리엔 더 이상 빈정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안을 하나 할까 해요.”
“무슨?”
“……그건.”
그녀의 입술은 아주 천천히 대답을 내어놓았다.
* * *
“좋니?”
그날 저녁. 저녁밥을 차려놓은 테이블 건너편 안주미. 그 얼굴이 아주 못마땅하다.
“당연히 좋지.”
“차암 대단해?”
들어 올린 숟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녀석이 중얼거렸다.
“대기업 제 발로 걷어차고 코딱지만 한 회사 계약직 붙어놓고 저리 좋다네?”
그렇다. 차혜민은 광인 기획 기획본부 1팀의 인턴사원 채용을 제안했다. 6개월짜리 계약직 인턴, 월급은 정직원의 70퍼센트 수준.
누가 들으면 정신 나갔냐고 할만한 그녀의 제안을 난 흔쾌히 승낙했다.
“하하.”
“엄마한테도 얘기했어?”
“그럼 안 했을까?”
“언제?”
“음 한 시간 전쯤?”
“아 미치겠네, 정말!”
녀석이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또 난리 나겠네! 난 또 눈치 보다가 말라죽을 거고.”
녀석이 자기 방으로 달려가더니 외투를 들고 나왔다.
“나 도망갈 거야.”
“야. 어디 가?”
“엄마 오면 친구 집에서 레포트 준비한다고 전해줘.”
녀석이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내려놨을 때였다.
띠띠띠. 띠링. 덜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덜컥 얼어붙었다.
“……엄마?”
“넌 어디 가니?”
“나? 친구 집. 레포트 준비해야 해서.”
“그럼 잠깐 앉아.”
명령을 내린 어마마마가 성큼 집안으로 들어선다. 보았다. 안주미 얼굴에 낭패감이 차오르는 걸.
“안덕모?”
“네. 마마.”
“너 이리 와서 앉아. 가족회의 할 거야.”
마마의 날카로운 눈빛. 주미의 원망 섞인 눈빛. 두 여자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회의. 우리 집은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한다.
“진짜야? 6개월 계약직 인턴 하기로 한 거?”
어머니는 가족회의라 하지만 나와 주미는 그걸 인민재판이라 부른다.
“네. 어머니.”
가족회의에서 마마 따위의 호칭은 허용되지 않는다.
“너 정말!”
큰소리가 터질 찰나. 난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후우. 그래. 알아서 해라.”
호통 대신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하지? 우리 세 가족 독하게 살기로 한 거. 나도 그렇게 살았고 사실 너희도 그래주길 바랐어.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내 새끼가 맘에 안 드는 회사 인턴으로 가는 거.”
자세를 바로 한 채 경청 모드로 접어들었다.
“이름 있는 회사 오래 다녔으면 했어. 돈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어릴 적 못 누렸던 화목한 가정 꾸리면서 살길 바랐어.”
“엄마…….”
안주미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딸, 어머니가 손을 뻗어 그런 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근데 내 욕심이지. 다 큰 자식한테 이래라저래라할 필요도 없고. 그래. 인생은 너희들 거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한번 해봐.”
어머니의 남은 손이 내 머리 위에 올라온다.
슥슥.
따듯한 손. 어릴 때처럼 온기 넘치는 손이 내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 놓는다.
“고마워요, 어머니.”
마침내 고집을 꺾었다. 무거운 가장의 권위를 힘겹게 내려놓은 어머니.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대신 조건이 있어.”
“네?”
“맘대로 해보는 시간은 반년만이야. 반년 지나서 또 백수 짓 하면 그땐 정말로 가만 안 둬. 알겠어?”
서릿발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
“네. 그럴게요.”
기세에 질린 난 얼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왜. 싫어?”
“아닙니다, 마마.”
“그래. 이제 밥 먹자.”
“예.”
말을 마친 어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안주미가 있다. 울어서 빨개진 눈, 녀석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뭘 보니? 멍충아.”
불끈 쥔 두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 * *
“자, 다들 주목.”
차혜민이 짝짝 박수를 쳤다. 각자 업무에 집중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내가 광인 기획에 입사하는 날. 첫 출근을 했고 계약직 인턴이나마 자리를 만들어준 차혜민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늘부터 기획본부에서 같이 일할 직원이야.”
차혜민에게 집중된 시선은 일제히 내 쪽으로 향한다.
“여긴 안덕모 씨. 간단히 소개 부탁해.”
생소한 사무실, 생소한 사람들과 분위기. 난 긴장하고 있었고 덕분에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안덕모라고 합니다. 앞으로 배울 게 많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왔어요.”
“축하해요.”
짝짝짝.
인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덕모 씨 일할 곳은 기획 1팀. 김 팀장이 직원들 인사 좀 시켜줘요.”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내가 속한 기획 1팀 팀장. 난 짧은 순간 꼼꼼하게 그를 살폈다.
첫인상은 푸근하다.
감고 말리지도 않아 헝클어진 머리. 광고 기획사가 아니라 생산 현장이 딱 어울릴 것 같은 얼룩 묻은 점퍼. 바지 주머니 밖으로 빼꼼 삐져나온 담뱃갑까지. 나이는 어림해보면 대략 30대 후반.
“다들 모여봐. 새 식구랑 인사하자.”
광인 기획엔 두 개의 본부가 있다. 그중 차혜민 본부장이 이끄는 기획본부엔 또 두 개의 팀이 있다. 광고 기획안을 만드는 1팀, 그리고 기획안을 가지고 1차 결과물을 만드는 2팀. 난 그중 1팀에 배속되었고 거긴 구면인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같이 일하게 될 줄 몰랐네. 잘 부탁해요, 안덕모 씨.”
그중 한 사람.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떡대.
“신용재라고 해요.”
그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민다.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의 순간을 짧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악력. 그의 자리를 힐끗 보니 책상 아래 덤벨과 이런저런 운동기구가 눈에 들어온다.
‘운동광이군.’
“여긴 우리 팀 차석, 강미희 대리.”
기획 1팀의 직원은 팀장 포함 네 명. 내가 왔으니 이제 다섯 명이 되었다. 인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이내 마지막 팀원이 내게 다가왔다.
“이쪽은 경하나 씨.”
헤어스타일만 봐도 알겠다. 면접 대기실에서 본 사람. 그 긴장감 넘쳐야 할 곳에서 드릉드릉 코를 골며 팔자 좋게 잠을 자던 무신경의 결정체.
하지만 압도적인 평가를 받아 정식 입사를 한 반전 있는 여자.
“두 사람 서로 안면 있죠?”
“네. 기억납니다. 면접 대기실에서.”
“잘됐다. 그럼 둘이 동기 하면 되겠네. 입사 일자 일주일밖에 차이 안 나니까.”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덕모라고 해요.”
내민 손을 바라보던 경하나. 그녀가 팀장을 향해 휙 고개를 돌린다.
“싫은데요?”
“응?”
“전 정규직으로 입사했어요. 이쪽은 인턴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동기를 먹어요?”
김형철 팀장이 당황했다. 상대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경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 일하는 회사예요. 상하는 확실하게 정하는 게 좋겠지요?”
“아…….”
김형철의 당황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래서 내 얼굴 역시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반가워. 경하나라고 해.”
그제야 뻘쭘해진 내 손을 붙잡는다. 피부로 느낀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나도 직급은 없으니까 그냥 선배라고 불러. 앞으로 잘해보자.”
무표정하게 인사를 마친 그녀가 휘익 돌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날카로운 첫 대면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멍해진 상태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신용재 대리가 불렀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도착지는 회사 꼭대기 옥상이었다.
“기분 많이 상했지?”
“아닙니다. 아니…… 사실 좀 그랬어요.”
이해한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중얼거렸다.
“걱정이다, 걱정이야.”
꼼지락꼼지락 뭘 하나 했더니 옥상까지 덤벨을 들고 왔다. 겨드랑이까지 쭉쭉 들어 올리는 모습이 참 경쾌하다.
“그때 대기실에서 잘 때부터 알아봤어. 유능한 건 알겠는데 걔 인성이 좀 그래.”
“…….”
“마음 쓰지 마. 걔 나랑 팀장한테도 그래. 강미희 대리한테는 안 그런데 사람 골라가면서 대하나 봐.”
그의 입에서 경하나에 대한 뒷담화가 흘러나왔다.
일주일 전 그녀가 처음 출근했을 때 신용재의 기대는 컸다. 업계에 이름난 인재, 압도적인 성적으로 입사한 후배. 하지만 그의 기대는 하루도 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사무실에서 운동 좀 하지 말래. 소중한 내 덤벨도 보기 싫으니까 치우라고 하더라고. 내가 참 기가 막혀서.”
잠깐. 그건 맞는 말 같은데?
“……음. 그랬군요.”
맞고 틀리고 가 중요한 건 아니다. 문제는 경하나가 입사 일주일도 안 되어 까마득한 선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안덕모 씨.”
“네, 대리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덕모 씨 사수야.”
“아.”
못 들었다. 하지만 그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나랑 같이 일하게 될 거야.”
그의 손가락이 나와 자신을 한 번씩 가리킨다.
“이렇게 둘이 한편이란 말이지.”
“알겠습니다.”
깍듯한 대답에 신용재가 얼굴을 환히 밝힌다.
“잘해보자고. 하나 걔 코도 좀 납작하게 눌러주고 말이야.”
전개가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 순간 맘 가는 대로 솔직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오케이. 우리 덕모 마음에 들어.”
한편. 마치 태어나서 처음 자기편이 생긴 사람처럼 신용재가 호탕하게 웃는다.
웃는 와중에도 쉼 없이 오르내리는 덤벨을 보며 난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