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50화 망하면 망하는 거죠
“돈이죠, 돈!”
맞다.
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살아오면서 했던 일들을 부정하는 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 길 말고는 없다 싶더라고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진짜 장사! 좆같아요.”
“그런데 왜 하고 있는데?”
“제가 가장이잖아요.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고, 우리 영지 착한 놈 골라서 시집 보내야 하고, 인정둥이도 가게 하나씩 차려서 독립시키고… 어떤 여자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혼하면 집 한 채 정도는 해주고 싶고, 그래요.”
“기특하네.”
“솔직히 제일 하고 싶은 건, 어머니 집부터 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국밥집 정리하고 일 그만두게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무슨 고집이신지…….”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것도 나쁜 거 아니야.”
“알죠. 아는데, 저도 장사해 보니까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요. 게다가 그 힘들다는 국밥집을 십 년 넘게 하고 계시는데… 후우. 이게 마음 같지 않아요.”
“나도 그 마음 안다. 참고로 우리 아버지, 아직도 아파트 경비 일하셔. 그게 마음 편하다고 하는데 방법이 없더라고. 나 일 년에 수십억씩 버는데도 그래.”
“헐, 진짜요?”
“딱 육십오 세까지만 일하겠다더라.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
주혁 형은 그렇게 말한 뒤, 소주 잔을 비웠다.
역시나 이 형도 그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데, 전 장사할 팔자 같더라고요.”
“어째서?”
“그게 참… 뭐랄까? 이번에 쉬면서 진짜 생각 많이 해봤거든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말수도 적고 무뚝뚝했지만, 행동으로 날 사랑하는 걸 보이셨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행복으로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아버지 손 잡고 이런저런 걸 먹으러 다니는 거.
백 원 오뎅집도 그중 하나였다. 이후 어묵을 좋아하게 됐고 그러다 자갈치 시장 공장 근처에서 오뎅 국밥을 먹어보게 됐던 것이다.
그 흐릿한 옛 기억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지성분식을 살렸다.
3,000원짜리 어묵 국밥.
물론, 창주 형한테 오뎅 국물을 배우긴 했다. 거기에 어렴풋이 기억하던 옛 추억을 떠올려 맛을 더욱 끌어 올린 것이다.
조금 짜다 싶을 정도의 간간함.
어묵 육수를 밴 커다란 무.
밥알은 국물을 머금어 씹기 좋았고, 약간의 칼칼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추운 겨울, 가벼운 마음으로 한그릇 뚝딱 해치우기 적절했던 것이다.
그게, 손님들을 불러왔고 지성분식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화끈 오뎅의 고추 튀김도 마찬가지였다.
진경찰서 인근의 작은 분식집.
특별한 맛집도 아니었고 멀리서 손님들이 찾아올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동네의 흔한 떡볶이 순대를 파는 분식집이었는데, 고추 튀김 하나가 제법 유명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쉬는 날 손잡고 거기까지 갔었다.
처음 먹을 때는 몰랐지만 튀김을 씹으면 씹을수록 색다른 맛이 올라왔고 어느 순간 다섯 개나 먹고 있었다.
그때 주인 할머니께서 이야기해 주기를, 삶은 자투리 오징어를 다져서 고추 튀김 안에 넣은 게 전부란다.
하지만 튀김의 바삭함과 오징어의 탱글함이 정말 최고였다. 여기에 매콤한 떡볶이 양념장에 찍어 먹으니 정말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그 기억을 되살려서 고추튀김 속을 만들었다.
동시에 화끈 오뎅의 튀김들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기존의 상식과 다른 약간의 변화를 더해서 인기 메뉴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블랙타이거 새우튀김은 정말 모험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기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었고 창주 형이 믿어주었기에 시도한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통닭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유명한 집에서 가져온 거라며, 월급날이면 가끔 통닭을 사오셨다.
검은 비닐 안의 누런 종이 봉투.
그 안의 통닭은, 현우 형 어머님이 튀긴 바로 그 통닭이었다. 지인들과 조촐하게 한잔하다가 아들 딸이 생각나서 포장을 주문한 바로 그거였던 것이다.
때문에 강형우는 어릴 때부터 그 맛에 익숙했고 길들여져 있었다.
고등학생이 돼서 친구들과 몰래 술 마실 때, 우리 통닭을 자주 갔던 게 그래서였다.
우리 통닭의 염지를 재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이미 많이 먹어봤기에 다른 통닭들과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떠올려 보니 그것 말고도 많았다.
“생각해 보면 다 아버지 덕이죠.”
“조기 교육 잘하셨네.”
“어쩌면 제가 장사할 줄 알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하긴,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
“근데 형우야. 너 취했냐?”
“아뇨? 이제 소주 네 병째인데…….”
“그럼 됐다. 한 병 더 시키자.”
직원이 소주를 가져오자 주혁 형이 또다시 잔에 술을 채워줬다.
강형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진짜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데요.”
아버지는, 헌신적이셨다.
부산에 롯X리아가 구덕체육관 앞에 딱 하나 있었을 시기였다. 당시 지하철 1호선이 전부여서 차로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거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햄버거 나오자, 어린 영지가 먹어보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직접 차를 몰고 우리를 데려가셨다.
또, 일본 라멘이란 음식이 생소할 때, 일식당 사장님한테 육수를 얻어와서 집에서 끓여준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그 음식인지 몰랐지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음식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음식을 포장해서 가져온 것에 그치지 않고,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맛집들을 자주 다녔었다.
그게 아버지가 표현했던,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그깟 등록금이 뭐라고…….”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회사 마치고 대리운전 일을 하셨다. 그러다 음주운전 차량이 중앙선을 넘는 바람에 사고가 났고,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로 도피했다. 그리고 복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했다.
스스로 집안의 가장이라 생각했기에 무작정 돈부터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장사를 결심한 건… 아마 그 이후죠.”
“하긴, 네 입장이라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대학 중퇴. 그건 이력서에 고졸로 적힌다.
배운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다. 게다가 인맥도 없고, 이끌어줄 사람도 없으며, 소개조차 받지 못했다.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뿐.
취직을 하려 해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결국 강형우는 남들이 꺼려하는 공장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정분석의 눈에 띄여서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때 분석이 형 만나고 나니까 이런 길도 있다 싶더라고요. 단순히 음식을 배워서 장사하는 게 아니라, 이건 열심히만 하면 가족들을 책임질 수 있겠다고 느꼈죠.”
맞다.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 했으면 애초에 취직을 선택했을 거다. 커다란 덩치랑 체격 때문에 힘쓰는 곳에서 여러번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돈 많이 준다는 곳은 드물었다.
어쨌든 강형우는 음식 장사로 성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길만이 가족들을 위한 거라 생각했고, 3년간 피나는 노력 끝에 지성분식을 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쉬운 길이 아니었다.
“장사해 보니까, 이게 사람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
잘되든 못 되든,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사장의 책임이었다.
때문에 주변에서 뭐라 하건 말건 거의 하루 종일 가게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평균 근무가 14시간.
새벽부터 문을 열고 가게 마치기 전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주 6일이었다.
그나마 설과 추석 연휴에 쉬는 게 전부였고, 여름에 눈치 보면서 며칠 휴가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힘든 장사를 이어온 건 이유가 있었다.
“진심으로 절박했으니까요.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는데, 장사 망하면 인생 망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목숨 걸고 매달린 거죠.”
“원래 다 그래.”
“헤헤, 그때는 막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게 제 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길?”
“예.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그리고…….”
강형우는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집안의 가장이니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다른 길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취했네. 횡설수설하는 거 보니까.”
“예. 지금껏 책임감 때문에 버틴 건데, 너무 힘들고, 힘에 부치고… 손님들 상대하면서 점점 감정이 깎여 나가는데, 너무 불안한 거예요.”
지금껏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난 5년간의 결실이 흔들리면서, 자신감까지 급격히 추락한 것이다.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진짜 가게 망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동생들도 먹여 살려야 하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그리고 저도 이제 애 아빠잖아요.”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하늘이가 태어나고 난 뒤 압박감도 상당했다.
진짜 가장이라는 무게가 어마어마했던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발 떨어져서 보니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뭐?”
주혁 형이 놀라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냥 망하면, 망하는 거죠.”
지금까지 잘 먹고 잘살고자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 수단이 장사였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벌고 있었고, 망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 번 갔던 길을 또 걷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 망해가는 가게에 앉아 신경질만 부렸던 게 너무도 미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확실히 마음가짐을 바꾸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 덕분일까?
몇몇 손님들이 인상이 좋아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까짓거 망하면 망하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았더니, 어이없게도 손님들이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재료 남아서 폐기할 바에 서비스라도 팍팍 주자 했는데, 덕분에 마감 시간에는 손님들이 꽉꽉 들어찰 정도가 되었다.
물론 계속 그럴 수는 없어서 직원들에게 눈치껏 하라고 일러줬다.
어쨌든 서서히 가게 분위기가 밝아지니 손님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영향력은 화끈한 형제들뿐만이 아니었다. 지성분식도 매출이 회복되더니 지금에 이르러서 거의 80% 수준까지 복구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메르스도 서서히 정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형우는, 마음 한구석 어디에선가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왜 장사를 하는 걸까?
그 질문의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천 원 백반 집을 찾아가게 됐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고, 잊고 있었던 많은 가게들을 기억했다.
대학가에 짜장면을 천 원에 파는 곳이 있었다. 학생들을 푸짐하게 먹이기 위해 거의 원가로 판다고 했다. 고급 음식이라는 탕수육도 겨우 오천 원이었다.
또, 가난한 어르신들을 위해 국밥을 싸게 파는 식당도 있었다. 재첩국에 양념장과 땡초, 밥을 넣어서 말아 먹는 게 전부였는데, 가격은 달랑 천오백 원이었다.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팔아서 남습니까, 했더니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게 아니란다.
그 가게들 외에도 믿기 힘든 가격으로 영업하는 집들이 적지 않았다. 다들 이웃에게 봉사한다는 의미로 장사한다는 것이다.
강형우는 뒤늦게 기억 속의 그런 가게들을 한동안 찾아다녔다.
인력 시장 구석의 이천오백 원짜리 비빔밥집. 가난한 시장 상인들을 위해 된장 백반을 삼천 원에 파는 집도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라면과 국수를 천오백 원에 팔았고, 밥까지 공짜로 주는 식당도 있었다. 또, 아직도 돈가스와 볶음밥을 사천 원에 파는 집도 있더라.
강형우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백 원 오뎅집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 일대가 택시 기사들로 마비가 된 것처럼.
갈 곳 없는 이들을 걱정하며 천 원 백반 식당을 이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분처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가슴속에 의문이 없었고, 세상이 달라 보였다.
강형우는 장사로 도(道)를 추구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