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242화 받아달라고요
“권리금 이억 오천이라고 하셨죠?”
“그 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박황수가 눈치를 보는데, 강형우는 보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잘 모르시네. 이 동네는 바닥 권리금만 억대입니다. 여기에 인테리어 비용하고 주방 집기, 설비에 영업 권리금 포함하면 못해도…….”
“매출 장부 볼 수 있습니까?”
“예?”
“방금 영업 권리금 이야기하셨으면, 매출 장부를 보여준다는 뜻 아닌가요?”
강형우가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박황수의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것만 봐도 최근 장사가 신통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월세가 석 달이나 밀렸을 정도니 뻔하지.
“아니, 그걸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저도 음식 장사 오 년 했습니다. 준비 기간까지 치면 팔 년이죠. 가게도 세 개나 가지고 있고요. 식품 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허허, 젊은 친구가… 능력이 좋네요. 하지만 동네 구석의 구멍가게하고, 서면은 완전히 달라요. 기본 깔세가 있는 동네인데…….”
“그래서 매출 장부 보여달라고 한 겁니다. 사실 설비나 집기는 3년 썼으면 중고죠.”
“그건… 그렇기는 한데.”
“인테리어도 오픈하고 쭉 그대로면 노후화된 부분이 있으니까 손봐야 하는 거 맞죠?”
“그거야 사장 취향이 따라 다른 거고…….”
박황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말을 돌리려 했다.
결국 강형우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매출 장부 확인만 되면, 처음 제시하신 권리금을 쳐드리겠습니다. 바닥 권리금 일억, 집기 설비비 오천, 그리고…….”
“그래서 얼마나 깎자는 겁니까?”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권리금 이억 오천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 젊은 친구가 진짜…….”
박황수는 몇 번이나 인상을 찌푸렸다.
주름이 생겼다가 펴지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서 말 몇 마디에 돈 몇천만 원이 왔다갔다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강형우도 나름 돌아다니면서 알아봤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시세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큰 비밀인 것처럼 꽁꽁 싸매고 있어서, 대략적인 유추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 입지에 정말 장사까지 잘되면, 권리금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이억 오천이 아니라 오억을 불러도 사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왜냐?
일 년 안에 투자금을 다 회수할 수 있어서였다.
이후 버는 수익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남는 장사인 셈.
그때 박황수가 말했다.
“이억 이천 합시다. 더는 양보 못 해요. 내가 분식집 할 사람 구해달라고 한 건데, 그 이하면 업종 상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강형우가 두말없이 OK를 하자, 박황수도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네. 정 과장한테 듣기는 했지만… 결단이 빨라요. 그럼 정식 계약은 어떻게?”
“저도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가게 인수했다고 바로 오픈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흐음, 너무 늦으면 곤란한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박황수가 이야기하는데, 확실히 상권과 월세가 다르니 편의를 봐주는 것도 달랐다.
여기는 계약 시점부터 무조건 월세 선불이었다. 건물주가 단 한 달이라도 월세 빠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손해 볼 이유가 없다나?
한마디로, 강형우가 늦게 인수하는 만큼 박황수가 월세를 내야 했다.
“조율합니다. 어차피 이달은 다 갔고, 인테리어하고 사람 뽑고 하는데 한 달 잡으면 되겠지. 여기 월세 비싼 동네라서 하루라도 빨리 여는 게 좋아요.”
“그건 맞는데 저도 준비가…….”
“대신, 한 달 월세 내가 쓸 테니 조건 하나만 답시다.”
무려 이천만 원짜리 조건이라니, 왠지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박황수의 제안의 정말 의외였다.
***
정식으로 도장을 찍기로 한 날은 3월 14일이었다.
박황수는 3월 초부터 합의된 부분의 정리를 해주기로 했고 그 전에 가게를 비울 거라고 했다.
사실 시설 설비나 집기를 통으로 넘기기로 한 터라, 막상 할 일은 많지 않았다. 2층 구석에 개인 사무 용도로 쓰던 공간만 정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3월 15일부터 월세 입금.
그때부터 바로 공사에 들어가서 4월초까지 마무리하는 게 1차 목표였다. 그사이 직원들을 뽑아서 지성분식과 화끈한 형제들에서 교육시키면 된다.
그 기간은 최소 일주일이었다.
이후 4월 중에 오픈하면 그럭저럭 맞을 것 같았다.
강형우는 다시 한 번 달력을 확인했다.
이제 2월 초순이니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은 상황, 그사이 우선적으로 정리할 걸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새로 오픈하면 한동안은 거기에만 매달려야 할 테니까.
만장일치였다.
강형우는 2월 14일 토요일과 일요일을 야유회로 잡기로 했다. 그러자 지성분식 식구들과 화끈한 형제들 직원들까지 무조건 시간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해서 강형우는 회사 야유회를 겸해 송정의 큰 펜션 하나를 전세를 내었다.
예상 참석 인원은 무려 백여 명.
지성분식 2호점, 3호점에서 서른 명 정도였고, 화끈한 형제들이 마흔이 넘었다. 여기에 인성식품 직원들에 사총사 형들까지 합세하니 그렇게 된 것이다.
솔직히 강형우도 놀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은 몰랐고, 1차 회식에서 재료비만 오백만 원이 넘게 나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행히 다들 음식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뚝딱뚝딱 수육에, 불고기에, 닭도리탕에… 아주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것이다.
2차로 노래방 큰 방을 세 개나 잡았고, 이후 마음 맞는 사람끼리 3차, 4차까지 달렸다.
다들 기상한 시점은 오전 11시였다.
그때 가볍게 낮술을 하다가 의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원이 형이 그러더라.
이영제가 찾아왔다고.
“연락 받았냐?”
“예? 무슨 연락요?”
“이영제가 전화 안 하든?”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냥 잊고 살자고 했음에도 마음속 한 구석에 응어리가 있었던 것이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게…….”
신원이 형이 주저주저 하는 걸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왜요? 빨리 말해보세요.”
“그러니까… 다시 우리 가게에서 일하고 싶대.”
“미친 새끼, 그걸 말이라고!”
입에서 바로 욕부터 나왔다.
지성분식 음식을 카피해서 근처에 새 가게를 차린 게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찾아갔을 때 했던 행동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런데 뭐? 다시 일하고 싶다고?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권리금 사기였다. 같이 동업하던 사장이 있었는데, 장사 잘되자마자 가게를 비싼 가격에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멍청하긴,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기에…….”
“그러니까, 전전세 계약이었던 거야.”
사기꾼이 먼저 건물주하고 임대차 계약을 했다. 그런 뒤,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이영제를 끌어들여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보증금 칠천만 원은 사기꾼이 내기로 하고, 인테리어랑 설비는 이영제가 하기로 했단다. 거기에 무려 오천만 원이나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사기꾼은 이영제에게 최소 월급 500만 원을 약속했고, 이후 남는 수익을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거기에 혹한 이영제는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를 한 것이다.
솔직히 장사가 잘될 때는 괜찮았다.
이영제는 한 달에 천만 원에서 천오백 정도를 벌어갔다. 차라리 그걸 아꼈으면 상관 없었는데, 큰돈이 들어오다 보니 눈이 돌아간 것이다.
월세에 관리비 포함 한 달에 육십만 원이나 나가는 고급 오피스텔을 얻었다. 삼천만 원이 넘는다는 외제차도 할부로 샀고, 명품 시계도 하나 장만했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자한테 한 달에 몇백을 쓰기도 했으며 수시로 유흥주점도 다녔단다.
그게 반년이었다.
이제 이영제는 오전 11시 느지막이 출근해서 7시도 전에 퇴근했다. 그마저도 잘 지키지 않았고 어떨 때는 주방 안쪽 창고 방에서 종일 자다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소문 다 났지. 손님들이 다 이야기해 주더라고.”
“그럼 형은 벌써 다 들었던 거예요?”
“어. 그런데 네가 들으면 심란해할까 봐 말 안 한 거야.”
그렇게 말하니 이해는 되었다.
“그런데 다시 일하고 싶다는 건 뭐예요?”
“그러니까 그냥 사기당한 게 다가 아니라…….”
사기꾼의 원래 계약은 보증금 이천에 월세 이백이었다고 했다.
그걸 보증금하고 시설비, 음식 만드는 직원에 레시피까지 통째로 넘기는 조건으로… 무려 이억이나 받고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 온 사장은 배 째라고 했다. 자신은 법적으로 정당하게 인수한 것이고, 보상받으려면 사기꾼한테나 하란다.
법이 그랬다.
결국 이영제는 사기꾼을 고소했지만 잡을 때까지는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새 사장이 유명한 조폭이라는 거였다.
“일단 이영제를 주방장으로 놔두기는 했대.”
“그런데요?”
“조폭이 괜히 조폭이겠냐? 아직 서른도 안 된 새끼가 월급 너무 많이 받아간다고 반토막 이하로 내려 버렸다더라.”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11시 출근을 10시 반으로, 7시 퇴근하던 걸 밤 10시까지 일하라고 했다. 주방장이면 그게 당연하다면서 월급 받아가려면 그렇게 하란다.
한마디로 꼬우면 나가라는 거였다.
어차피 가게 인수할 때 메뉴 레시피까지 다 받았으니, 다른 사람 고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영제는 이백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일만 더 하게 생겼다.
문제는 당장 그만둘 수도 없다는 것!
일단 투자금 대부분이 대출이었다. 신용 문제 때문에 제2금융권 어디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이자만 연 20%.
한 달로 치면 거의 80만 원이 넘었다. 여기에 월세와 외제차 할부를 더하면 오히려 손해인 셈.
이영제는 그제야 겨우 정신 차린 모양이었다.
우선 외제차를 큰 손해 보고 팔아 넘겨서 할부 일부를 정리했다. 고급 오피스텔에서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고, 남은 돈 박박 긁어서 대출 일부나마 갚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빚은 삼천이나 남아 있었다.
현실은 더욱 냉혹했다.
이영제는 몇 번이나 가게를 옮기려고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고졸에 조리자격증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식당 경력이 2년이 넘지만, 요리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정해진 것만 능숙하게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많은 돈을 주고 쓸 사장은 없었다. 게다가 불성실하다는 안 좋은 소문까지 퍼졌으니…….
“그래서 우리 가게 다시 일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솔직히 형우 너처럼 애들만이 챙겨준 사장은 없잖아.”
알바로 뽑아도 본인이 원하면 정직원 심사를 했다.
진짜 회사처럼 월급도 꼬박꼬박 줬고, 일년에 보너스도 네 번이었다.
여기에 매달 회식까지 하면서 생일인 친구들을 챙겼으며 몰래 상품권 같은 걸 쥐어주기도 했었다.
또, 군대 갈 때는 차비를 따로 붙여주기도 했고, 몇몇 협력 업체(?)도 만들어 두었다. 화끈한 형제들 위층이 헤어숍이라든가, 지성분식 2호점 옆의 미용실 같은 거 말이다.
덕분에 우리 가게 여자 알바들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일반 분식집 기준이라면 불가능할 일들이었다. 덕분에 많은 직원들이 큰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오히려 가족처럼 지내게 된 것이다.
“영제가 그러더라. 한 번만 용서해 주면, 평생 몸을 담겠대. 나가라고 할 때까지 붙어 있을 거라고 사정사정을 하는데…….”
“그래서 받아준다고 했어요?”
“당연히 아니지. 아무리 내가 점장이고 2호점 관리한다고 해도 네 허락이 우선이잖아.”
신원이 형이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데, 원래 성격을 알기에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받아줄 수도 없었다.
일단 지성분식 2호점에 끼친 손해만 수천만 원이었다. 게다가 이영제의 행동을 다른 직원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엇보다, 나쁜 선례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강형우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