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240화 당장 가봅시다
“일단 명함 받으십시오.”
상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데, 조금 미심쩍었다.
나이는 서른 후반 정도로 보였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상태였다. 여기에 고급 정장에 광이 나는 구두,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품 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
“뭡니까?”
강형우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명함을 살폈다.
금송 부동산 컨설팅, 정현상 과장.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옆에 두룡 아파트 106동 380X호에 사는 정현상이라고 합니다.”
강형우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두룡 아파트는 이 일대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였다. 거기다 106동이면, 지하철에선 멀지만 광안리 바다 쪽에 제일 가까웠다.
무엇보다 38층이면 로얄층이었고, 광안리 바다뿐만이 아니라 광안대교와 그 건너 마린시티까지 볼 수 있다고 들었다.
한마디로 잘사는 집 사람이라는 건데…….
“저희 와이프가 이 집 단골인데, 임승희라고, 두리두리 엄마라고 하는데… 아시죠?”
“혹시 쌍둥이, 또 쌍둥이 말하는 거 맞으시죠?”
“하하하, 예. 맞습니다.”
정현상은 쑥스럽다며 멋쩍게 웃었다.
강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람을 스캔하듯이 본다는 건, 명백한 실례였다.
하지만 소문이 소문인 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임승희 씨가 수다 떨면서 한 말이 그거였다.
처음 손(?)잡고 잤을 때 한 방에 쌍둥이가 들어섰단다. 그래서 부랴부랴 결혼식을 했고 쌍둥이 놓고 한 달 만에, 또 한(?) 방에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힘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확실히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어쨌든 임승희는 잊을 수 없는 손님이었다.
전에, 우리 가게에서 깽판 부린 한 아줌마가 있었다. 포장한 거 들고 가다 뭉개졌다면서 환불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카드 결제 취소를 해줬는데, 난장판이 벌어진 사이에 포장한 걸 그대로 들고 갔었다.
지성분식 입장에서는 졸지에 음식만 날린 상황.
강형우는 해프닝으로 넘겨 버렸다.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는 진상들이 너무 많았고, 그런 경력이 4년이나 되었다.
그냥 장사하면 하루에 진상 한 명, 일주일에 한 번 개진상을 겪는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허허, 하고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걸 손님 중에 누가 봤나 보다.
그 일이 소문 났고, 그 아주머니는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몇 달 전인가?
무슨 어머니회 모임이 있었는데, 거의 열 명 정도가 단체로 와서 돈가스를 시켰다. 거기 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때 임승희 씨가 공교롭게도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우리 동네에 참 염치도 없는 진상 아줌마가 하나 있단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적반하장으로 환불을 요구, 계산 취소되자 음식 들고 그대로 날랐다는 거다.
그 말에 다른 아주머니들이 번갈아가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같이 예의 지키고 고상한 사람들도 오해를 받는다면서, 상종하지 말잔다.
그때 그 아주머니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말 한마디 못했고, 행여 내가 알아볼까 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나갈 때도 후다닥 도망치듯이 빠져나갔다.
물론 강형우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놀라운 건 임승희 씨였다. 자기가 전부 계산하고 나가면서 한마디를 툭 던진 것이다.
“사장님, 저 잘했죠?”
결국 강형우는 빵 터지고 말았다.
그 뒤로 오다가다 얼굴 마주치면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실제로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기도 했으며, 의외로 한 성깔 한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하긴 쌍둥이 남자애들 넷을 키우려면, 그 정도 강인함은 있어야겠지.
이후에 몇 번 이야기하다 알게 된 것이, 그 아줌마는 상습범이라고 했다. 꼭 무슨 핑계를 대면서 돈 한 푼 안 쓰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날 이후 모임에 안 나와서 다들 행복해졌단다.
역시 진상은 어딜 가도 진상이구나, 싶었다.
“저희 와이프가 사장님 이야기 많이 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 득남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정현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진짜 호감도가 훌쩍 올라갔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를 어쩐 일로…….”
“명함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그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 의중이 어떠신가 싶어서요.”
결국 잠시 시간을 내서 내용을 들었다.
진짜 좋은 조건에 좋은 이야기였다.
정현상이 하는 일은 일종의 부동산 관리였다. 설명이 많았는데,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거였다.
건물주한테 위임을 받아 관리를 하는 것.
동시에 건물의 가격을 높이는 영업도 병행한다고 했다. 즉, 리모델링을 한다거나, 이름난 프랜차이즈, 혹은 유명한 가게를 입주시켜 건물의 가치를 올리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기존 건물에 있던 임대인이 가게를 내놨습니다. 요즘 경기도 안 좋고, 비슷한 형태의 식당들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업종 전환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테리어 비용에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어이없게도 주식에 손을 댔다고 했다.
친구 말 믿고 질렀다가 통장을 잘라 버리게 된 상황.
게다가 장사도 안 돼서 월세가 삼 개월이나 밀렸다는 것이다.
“물론 보증금이 있으니 독촉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최대 1년까지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고 싶다고 하네요.”
이것도 정현상 과장의 일이라고 했다.
애초에 건물주한테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이니 적당한 음식점과 유명한 카페를 알아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와이프 이야기가 생각나서 지성분식을 찾았다는 거다.
“중요한 건, 거기가 분식집이라는 겁니다. 가능하면 동종업종을 하시는 분한테 넘기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겠죠.”
“아! 그래서 절 찾아오신 거군요.”
“예. 사실 규모도 있고 해서, 어지간한 가게가 들어서기에는 엄두도 안 나죠.”
4층 건물인데, 무려 1, 2층을 동시에 쓰고 있다고 했다. 합치면 무려 90평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위치죠. 어디 쪽입니까?”
“아! 제가 깜빡했군요. 서면, 경남공고 들어가는 쪽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전 뒤쪽 학원가 골목이라 보시면 됩니다.”
“헐, 거기는…….”
돈만 있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끼리만 가게를 주고받는 동네. 한마디로 서면에서도 알짜라 불리는 위치였던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보증금 삼억에 월세 이천입니다. 제일 잘됐을 때가 칠 년 전인데, 월 매출 칠억까지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럼 권리금도 있을 텐데요?”
“예. 이억 오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사장님이 사정이 급해서, 적정 수준으로 조절이 가능할 겁니다.”
바닥 권리금만 일억, 인테리어와 시설비, 집기 포함해서 이억 오천이라고 했다. 그만큼 가게 외관과 내부를 꾸미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는 거다.
사실 서면에서 장사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었다.
부산의 중심이자 최대의 번화가.
백화점만 세 곳이 있고, 지하 쇼핑 센터도 있었다.
최근 전포동 카페거리가 흥하면서 관광객들도 많이 늘어났고, 경찰 학원부터 공무원 학원까지 많아서 고정인구도 엄청났다.
배대포 골목의 네 평짜리 1층 튀김집이 바닥 권리금만 이천만 원 하는 동네.
한참 외각의 세 평도 안 되는 옷가게가 권리금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한마디로 무지하게 비쌌고, 그런 만큼 입지는 부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당황한 강형우는 본심을 꺼내고 말았다.
“한번 가봅시다.”
***
“확실히 이 동네가 대단하기는 한데.”
화요일 오후 3시였다. 그런데도 골목 끝에서 봤을 때 백여 명이 넘게 보였다.
그마저도 제대로 센 것이 아니라 대충 느낌이었다.
학원에 학원에 학원.
또, 뒤쪽에 경남공업 고등학교가 있었고, 그 앞에는 한국전력공사가 보였다.
거길 넘어서면 더 센트럴 파크라고 1,300세대 주상복합 아파트도 있었다.
특히 서면 이쪽 동네는 대부분 걸어서 10여 분 거리였다. 지하철 전포역에서 NC백화점 가는 라인은 거의 다 원룸촌이었고, 제법 큰 오피스텔도 많았다.
한마디로 입소문만 제대로 타면 이 일대의 원룸, 오피스텔 인구들까지 죄다 끌어들일 수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이렇다.
지성분식과 화끈한 형제가 있는 상권의 최소 다섯 배 크기였다.
물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식당 몇 개가 없어지고, 새로운 아이템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맛집들이 생기기도 하니까.
거기에 전국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프랜차이즈는 거의 다 들어와 있었다. 실제로 부산에 매장을 낸다고 하면 무조건 서면이 1순위였던 것이다.
그런 황금 같은 동네에 건물 1, 2층을 쓸 수 있는 자리가 나왔다. 그것도 학원가를 관통하는 위치였고, 무수히 많은 맛집들 중간이었다.
“정말, 이 건물 맞습니까?”
강형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확인했다.
정현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맞습니다. 이 정도면 위치도 괜찮은 편이고, 외관 리모델링도 재작년에 한 거라서 깔끔합니다.”
그 말대로였다.
1층은 반 오픈, 2층은 창문을 다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위로 3층 호프집과 사무실로 보이는 4층이 있었다.
유일한 단점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
그건 그만큼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이었다.
강형우가 그걸 생각하자, 정현상이 설명했다.
“사실 이 일대 건물들이 좀 오래되기는 했습니다. 몇몇 새로 지은 곳을 제외하면 엘리베이터는 많이 없습니다만, 1층 음식점은 상관이 없죠.”
“그건 그렇죠.”
“그리고 롯X리아나 맥도X드처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심지어 버거왕 서면 1호점은 1층하고 지하를 쓰기도 하니까요.”
“한마디로 계단 이동에 거부감이 없다고 보시는 거군요?”
“예.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그래도 부동산 전문가라고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사실 같이 차 타고 오면서 들었는데, 그만한 규모에 들어갈 만한 분식집은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기존 사장님의 요구 때문에 우선하기로 했지만 정말 까다로운 조건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경쟁력 있는 음식점을 찾는 거였다.
실제로 이 건물에 들어선 가게들 상당수는 장기 영업을 했다고 했다.
최소 3년, 최장 8년이었단다.
중간에 쭈꾸미집이 들어서기도 했고, 학생 상대로 하는 정식집에, 잠깐이지만 커피 전문점도 있었다고 했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입지 때문에 망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확실히 이 위치라면 그럴 만도 하겠네요.”
강형우는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아본 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사장님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정현상이 정중히 묻는데, 강형우는 잠시 고민했다.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보증금 삼억에 권리금만 이억 오천, 여기에 월세만 이천만 원이었다.
초반 투자 비용이 너무 높았고, 월세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실 화끈한 형제들만큼만 매출이 나온다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와는 스케일이 너무 달랐다.
결국 강형우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드려야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럼 얼마나?”
“글쎄요. 다른 경쟁자가 없으면 한 달 정도겠지만, 개인적으로 빼드릴 수 있는 건 열흘 정도입니다. 애초에 여기 자리 자체가 금방금방 나가거든요. 다만 저희 쪽에서 심사를 해서 결정하는 터라서…….”
지금 사장님이 분식집을 고집하는 건 권리금을 더 받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일 뿐.
강형우는 그렇게 시간을 번 뒤, 정현상과 헤어졌다.
아무래도 근처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