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234화 예, 마님
“야, 차라리 여행이라도 다녀와라.”
“예? 여행요?”
“그래, 머리도 좀 식힐 겸 해서, 와이프도 이제 애 낳으면 멀리 못 가잖아. 둘이 가까운데 가서 며칠 쉬다가 와.”
강대용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런 뒤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네 마음 안다. 나 체육관 접기로 했을 때, 진짜 심란했거든. 이제 좀 편해서 말하는데 애들 다 내보내고 정리하면서 혼자서 소주 열 병도 넘게 마셨어.”
거의 삼십 년 넘게 운동을 했단다.
중학교 때, 태권도를 시작으로 합기도와 유도를 배우다가 군대도 공수로 갔다. 거기서 특공무술을 배웠고 나와서 복싱까지 하다가, 스승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밑에서 배우면서 학생들 가르치다가 독립한 게 십여 년 정도.
“스승님 밑에서 배울 때는 내 밑에 제자들만 백여 명이었다. 처음 체육관 할 때도 진짜 잘됐어. 하지만 요즘은 몸 쓰는 거보다 머리 쓰는 시대라고 하더라.”
그 덕분에 체육관이 점점 한산해졌단다. 합기도에 호신술, 다이어트 무술까지 시작한 게 그래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기에는 무리였다고 했다.
“나이 마흔 넘어서 뭔가를 배운다는 거, 정말 쉽지 않더라고. 그리고 안 되는 거 붙잡고 사람 가르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더라.”
어영부영 이 년을 더 끌어왔지만 한계가 왔단다.
체육관을 접은 게 그래서였다.
“진짜 망해서 정리하는데, 피눈물 나더라. 지금이야 좀 편해졌지만, 아직도 미용실에 사람 많은 거 보면 가슴이 짠한 게 있어.”
“아직도 그래요?”
“당연하지. 남자가 첫사랑을 못 잊는 것처럼, 딱 그런 거야. 원래 처음은 평생 가슴에 남는 거라고. 그리고, 넌 나처럼 망해서 접은 게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상실감이라는 거, 누구나 다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다른 일이 몰두해서 잊어버리는 게 최고라고.”
강대용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런 뒤, 오른발을 들고 허공을 마구 두들겨 찼다.
“화끈한 형제들은, 이 삼촌이 지키마. 양아치들이 집적거리면 이렇게 팍하고 날려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게 안에서 싸우면 절대 안 돼요. 그리고…….”
강형우가 말하는데, 강대용이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리고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말했다.
“예, 사장님. 잘 알겠습니다요.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정리하고 가시죠?”
***
“오빠, 술 한잔해요.”
웬일로 공지혜가 저녁 식탁에 소주병을 올렸다.
평소에는 뱃속의 곰이 때문에 못 마신다면서 집에서는 못 먹게 했는데, 진짜 뜬금없었다.
하지만 본능이 우선이었다.
“고맙습니다. 사모님! 주실 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자요.”
공지혜가 손수 따라 주는데, 소주가 무척 달았다.
그렇게 묵은지 김치찌개에 한잔하면서 배를 채우는데 거의 다 먹을 즈음에 본론이 나왔다.
“오빠. 우리, 집에 좀 다녀오면 안 돼요?”
“집?”
“예. 아빠하고 엄마가 저 보고 싶다고 해서요. 주말에 생신이기도 하고 해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아! 맞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분명 장인어른 생신이라고 들었는데, 요즘 심사가 복잡하다 보니 까먹은 것이다.
진짜 공지혜가 욕을 한바탕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사위 된 도리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전화드리고 있었다.
예정도 없이 임신하는 바람에, 결혼식도 못 한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알아봤는데 이미 배가 부르고 있어서 내년으로 미뤄 버린 것이다.
그게 죄라고 매번 전화드릴 때마다 죄송스러웠다.
그러면서 꼭 들르겠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반년이 훌쩍 넘어버린 상황.
“미안. 내가 신경 썼어야 하는데… 그래ㅡ 주말에 꼭 올라가자.”
“정말요?”
“당연히 시간 내야지. 사위도 자식인데. 왜? 안 될 줄 알았어?”
“그건 아니고요. 요즘 오빠가 걱정거리가 많은 것 같아서… 좀 그랬어요.”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조금요. 헤헤헤.”
공지혜가 웃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미안해. 내가 요즘… 너무 못하지?”
“조금 그렇기는 해요. 설거지도 안 해주고, 세탁기도 안 돌려주고, 빨래도 안 개고. 집에 들어오면 자기 바쁘고.”
말이 좀 이상(?)했다.
지금까지는 도와주려고 해도 공지혜가 못하게 말렸다. 일하고 오면 피곤하다고 오히려 서재에서 쉬라고 강제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지혜는 말없이 배를 문질렀다.
현재 우리 곰이는 팔 개월 됐다. 무게가 얼마 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크면 4㎏ 이상의 우량아가 나올 거라 했던 것이다.
그만큼 몸이 무겁다는 이야기였다.
“알았어. 앞으로 집안일도 도와줄게.”
“오빠!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절대 아니라고요.”
“그럼?”
“좀 웃어요. 이전처럼 웃고 다니고 그러라고요. 요즘 오빠 얼굴 보면, 저도 힘 빠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곰이도 눈치 본다고 얌전히 있어요.”
“아! 미안.”
“앞으로 미안하단 말 금지! 뭐가 맨날 미안하데?”
웃으면서 말하는데, 솔직히 뜨끔했다.
공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에서 슬쩍 껴안았다.
“우리 곰이 아빠는, 씩씩해요. 마음도 여리고 순수해서 남들보다 많이 아파해요. 하지만 옥상 올라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오면 다시 이전처럼 쌩쌩해질 거랍니다.”
“아니, 나 요즘 금연 중인데…….”
“담배는 백해 무익, 하지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랍니다. 그러니 답답할 때는 한 대 피우고 와도 됩니다.”
평소에는 담배 안 피울 테니, 한 번씩만 봐달라면서 내가 한 말이었다.
물론 요즘에는 잘 지키고 있었다. 주혁 형이 왔을 때 이후로, 아직 한 갑도 채 안 피웠으니까.
공지혜가 팔을 풀더니 등을 팡팡 두드렸다.
“자, 올라가서 시원하게 한 대 피우시고. 웃으면서 내려오세요. 오빠!”
“이거… 치우고 올라가면… 악!”
순간 등짝에 불이 나는 줄 알았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응축된 것 같은 파워라고나 할까?
하여간 등짝 스매싱은 정신 차리는 데 최고였다.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하늘 같은 마나님이 시켰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
강형우는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마님~”
“후우~”
진짜 담배 연기가 흩날려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속도 그랬으면 좋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요즘에 문제가 있었다.
그 이유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주혁 형이 와서 잔소리하고 간 이후, 조금 예민해진 건 사실이었다. 본심은 아니었겠지만 화끈한 형제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런 뒤, 고민해 보니 확실히 엉망인 부분이 적지 않더라.
뭐랄까?
시스템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것 때문에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
지성분식을 철거한단다.
그 광경을 직접 볼 때는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해졌다. 굴삭기가 지성분식의 벽을 부순 것처럼, 마음 한구석을 긁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동안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공지혜가 담배 피우고 오라고 등까지 다 떠밀겠는가?
“에구, 빨리 마음 정리를 하든가 해야지.”
간만의 허락이라 그런지 한 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결국 강형우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과거가 아닌, 앞으로를 고민했다.
현재 상황은 이랬다.
3호점의 경우, 이제 인정둥이를 빼도 될 정도였다.
이기섭과 오병헌이 작정을 하고 배우고 있었고, 습득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금일우도 제법 능숙해져서 홀 관리를 잘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 김밥도 말았고, 바쁠 때는 주방으로 들어와 음식 놓는 것도 거들기도 했었다.
본인이 목표한 대로 차분히 올라가고 있는 상황.
“내가 빠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지성분식만이 아니었다.
화끈한 형제들도, 이제는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오픈 주방은 채범식과 임상현이 꽉 잡고 있었다. 이제는 다른 알바들한테 지시까지 내릴 정도로 능숙해졌고, 창주 형과 덕수 형을 타박할 정도로 실력도 올라왔던 것이다.
카운터는, 최성만이 소개시켜 달라던 이주영이 컨트롤하고 있었다. 나이 스물여덟의 왕언니(?)로 여자 알바들을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 뽑은 알바들 포함해서 일정까지 조절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강형우는 이주영을 메인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뭐, 대용 삼촌이야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진짜 그러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화끈한 형제들 기준으로, 강형우는 남는 존재였다.
그런 사장이 걸레 들고 테이블이나 닦고 있었으니, 대용 삼촌 말대로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게 당연했다.
또, 주혁 형도 그랬다.
사장은, 사장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에구, 한심하다. 괜히 잡생각 없앤다고 청소나 하고 있었으니…….”
강형우는 바로 담배를 껐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진짜 해야 할 일이 떠오른 것이다.
***
“형님도 참~”
인정둥이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사실, 한동안 반강제(?) 휴가를 즐겼다.
우선 공지혜와 함께 처갓집을 다녀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시내로 나갔고, 그럴듯한 식당에 가서 유황오리 백숙과 염소 불고기도 먹었다.
그날 장모님께서 말씀하시길, 2월 설 연휴 지나서 적당한 날짜를 잡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때 깨달았다.
아! 아직 상견례도 하지 않았구나.
진짜, 장인어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런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귀한 딸 데려가서 임신까지 시켜놓고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매주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한 덕분에 그렇게 타박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또, 정재일이 좋은 고기나 사골 같은 거 들어오면 알려줘서 소갈비 같은 것도 종종 보내 드렸다. 그렇게 수시로 뇌물을 먹인 덕에, 나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결혼 날짜를 잡기로 하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후, 며칠간은 맛집 투어였다.
공지혜 기분도 풀어줄 겸, 곰이 튼튼하게 태어나라고 기원도 할 겸, 정말 많이 다녔다. 진짜 우리 곰이가 5㎏ 넘어서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서 강형우는, 이전부터 고민하던 새로운 라면에 대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그래서,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냈다는 겁니까?”
홍성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새우탕면의 경우 인정둥이를 상대로 몇 번 테스트해 봤다.
하지만 사골탕면은 대충 머릿속으로 정리만 했을 뿐 실제로 만든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성도는 훌륭했다.
“사실 걱정이 좀 많았거든. 이게 사골탕면의 경우, 너희들 말대로 호불호가 좀 있어.”
사골탕면은, 누구나 다 아는 라면 사리곰탕에서 영감을 얻었다. 게다가 이모들 식당 정리하면서 박첨기 어르신을 만났는데, 몇 번이나 우리 가게 사골육수가 좋다고 하셨던 것이다.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하지만 사골육수만으로 라면을 만들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했다. 매운 라면에 비해서 자극도 떨어졌고, 비주얼도 만족스럽게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경성대 쪽을 돌면서 깜짝 놀랐다.
아직 점심시간도 아닌데, 한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던 거다.
강형우는 호기심 때문에 20여 분을 기다렸다 입장했다. 그러면서 검색해보니 요즘 최고 인기라는 일본 라멘 집이었던 것이다.
주문한 건 최고 인기 메뉴라는, 돈코츠 라멘이었다.
하얗고 뽀얀 돼지 사골 국물.
여기에 두툼한 챠슈와 파가 잔뜩 올라가 있었고, 고소한 기름 같은 게 떠 있었다.
또, 숙주와 목이버섯도 보였고 반숙 계란 아래 얇은 면도 보였다.
그 순간, 강형우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황당하게도 돼지국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