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226화 사과 한번 하시죠
“황 선생님.”
“뭐야?”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좀 같이 가시죠.”
박 경위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자 황도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니까 무슨 일이냐고?”
“저, 그게요. 잠시만 저랑 이야기하시죠.”
황도양도 바보는 아니었다. 눈치를 보니 남들이 들어서는 곤란한 이야기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옆으로 빠졌다.
“뭔데?”
“예, 이번에 저희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백기수라고… 아시죠?”
찔리는 게 있는지 황도양은 입을 다물었다.
10대끼리 가출해서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술 마시고 폭행을 저질렀단다. 그것 때문에 잡혀왔는데, 자포자기했는지 다 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황도양의 이름까지 나왔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크게 걸리는 건 없을 겁니다. 어차피 경범죄 교사로 나오는 거 해봐야 벌금 10만 원 이하니까요.”
“뭐?”
“전에 동네 한 번 시끄러웠잖습니까? 맞은편 분식집에 누가 썩은 계란 던졌다고.”
“험, 험… 그게 말이야.”
황도양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박 경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 자술서에 기록된 대로라면 황 선생님이 홧김에 돈 주고 시켰다고 되어 있더군요.”
“나는 모르는 일…….”
“아이고, 선생님. 좋게 가시죠?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박 경위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CCTV 사진으로 백기수가 했다는 게 들통났고, 자술서까지 기록되어 넘어간 상황이었다.
이 경우는 사건으로 치부하기도 어렵기에 그냥 벌금으로 끝나고 만다.
“진짜 문제는 그 뒤입니다. 변호사 선임해서 손해배상 청구하면, 많이 피곤해지실 겁니다.”
“뭐?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 일인가? 오히려 비용이 더 들 텐데?”
“이 경우는, 돈이 문제가 아니죠. 아시지 않습니까?”
황도양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감정이 상하면,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죽자고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여러 번 봤던 것이다.
“분식집 큰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범인 잡으면 변호사 비용이 몇 배 더 들더라도 반드시 손해배상을 받아내겠다고. 그런데 학생한테 돈 받기는 불가능하고, 선생님이 교사를 했으니 민사상 청구가 가능한 경우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깔끔하게 사과 한번 하시죠? 그리고 청소비 정도만 주신다면 간단히 넘어갈 겁니다.”
이걸 돌려 말하면, 자존심을 굽히라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장사 안 돼서 잔뜩 성질나 있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황도양은 기분 나쁘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이 경우는 백 프로 진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재판 가봐야 합의금 조정이 전부인데, 선생님 이름도 있는데 법원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명색이 시의원 후보로도 나가신 분이 이런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흐음…….”
황도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고개 한 번 숙이고 끝내는 게 현명하기는 했다. 청소비야 몇십만 원 수준이니까.
잠시 갈등하는데, 박 경위가 쐐기를 박았다.
“황 선생님, 이거 업무 방해로 가면 피곤해집니다.”
“뭐라고?”
“이미 분식집 큰 사장님이 변호사 통해서 다 알아본 모양이더라고요.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이 상대의 장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불법적인 행위를 반복할 경우, 그게 3회 이상일 때 고의로 판결을 내리거든요.”
“아니, 그게…….”
“안 그래도 요즘 소문이 있어요. 분식집에 민원이 계속 들어간다고 하고, 썩은 계란 사건에다가 요즘 조폭들하고 양아치들이 분위기 잡는다고 하던데…….”
황도양은 뜨끔했는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내, 내가 아니라니까?”
“그야 당연히 알죠. 그래서 분식집 큰 사장님이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업무방해로 고소했다가 제대로 걸리면 5년 이하 징역에 벌금만 천만 원 이상 나옵니다. 경범죄랑 다르게 중죄가 되거든요.”
“헉. 그, 그런가?”
“벌금 크게 맞으면, 선거 못 나가는 거 아시죠?”
황도양은 가슴이 철렁하는 걸 느꼈다.
이번에 날린 돈만 해도 십억 가까이였다. 죽기 전에 의원 배지 한 번 달아보는 게 소원인지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쓴 것이다.
그 돈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다음 선거에도 나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여당 의원들 일부가 도와준다고 했다. 돈 먹인 게 있으니 다음번에는 반드시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선거 못 나가면 끝이었다.
“정말 사과만 하면 끝나나?”
“예. 큰 사장님도 일이 바빠서 크게 걸고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약속도 받아놨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은 더럽게 짜증 나지만, 살아온 나이가 있었다. 고개 한 번 숙이면 되는 일을 크게 만드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황도양은 선거에 나가는 국회의원들처럼 거의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청했다.
강형우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미 각서는 받았다.
물론 법적 효력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가중 처벌의 근거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만약, 황도양이 다른 수작을 부리거나 했을 때 영업 방해로 고소를 걸면 된다. 그때 이 각서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홧김에 한 일이라니 이해하겠습니다.”
이 역시 조언(?)대로 말하는 거였다. 게다가 상호 간에 합의해서 녹음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형우가 이번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을 해주기로 했었으니까.
이건 황도양에게 있어 필요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녹음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역시도 나중을 위한 대비였다.
강형우가 너그럽게 용서까지 해서 해결된 일이라는 증명하는 장치였으니까.
만약 또다시 비슷한 일로 문제가 됐을 때, 판사가 이 녹음을 들으면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아마 괘씸죄까지 적용할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이 모든 건, 박 경위의 조언(?) 덕이었다. 가출한 학생을 몇 달이나 못 잡았기에 그게 미안해서 있는 수단 없는 수단을 다 알려준 것이다.
강형우는 그중에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골랐다.
박 경위 입장에선 계속 마주칠 동네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서로 합의하고 끝내는 게 최선이었다.
황도양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고소니 뭐니 하면 동네 시끄러워진다. 게다가 찔리는 것도 적지 않았고, 변호사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일들까지 알려질지도 몰랐다.
물론 강형우는 부족함을 느꼈다. 청소비 50만 원, 그리고 사과만 받고 끝내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황도양이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자 진심이 아닌 걸 알지만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잠시지만 얼굴이 오만상으로 구겨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수작을 못 부릴 거라는 게 더 의미가 있었다. 그때는 진짜 변호사도 부르고, 할 수 있는 걸 다 동원할 거라고 경고까지 날렸던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황도양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먼저 고개를 숙였었다.
어쨌든 세 사람의 합의점이 맞았기에 크게 얼굴 붉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형우는 승자였다.
화끈한 형님들은, 오늘도 미친 듯이 손님들을 빨아 당겼다.
지성분식 매출이 휘청할 정도였으니 다른 가게들은 어떻게 됐겠는가?
듣기로 황도양 일당(?)들 가게에는 파리만 날린다더라.
물론 저 가게들이 망하라고 화끈한 형님들을 차린 건 아니었다. 충분히 사업적인 계산까지 끝냈고, 승산이 있기에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어쨌든 맞은편 가게들은 숨통이 끊기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물론 강형우처럼 밤잠 줄여가며 메뉴 개발하고, 손님들 한 명, 한 명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할지 말지는 본인들의 선택이었다.
가게가 다시 살아나고 죽는 건, 전적으로 사장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이제 강형우는 더는 이쪽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련함이 더 컸으니까.
***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화끈한 형제들은 지금까지 운영했던 가게들과 많은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단 휴일은 월요일 하루였다.
주말에도 장사하고 브레이크 타임도 없었으며, 마치는 시간도 밤 11시 이후였다. 뒷정리까지 끝나면 30분이나 더 오버가 되는 것이다.
그 덕에 인근 학생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크게 바쁘지 않은 시간에도 학생들이 늘 북적거렸고, 특히 밤늦은 시간에도 빈자리가 드물 정도였다.
그제야 강형우는 왜 황도양이 일찍 마치라고 압박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밤인데도 학생 손님들이 넘쳐났다. 학원 늦게 마치는 이들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건 강형우의 실수가 맞았다.
처음 상권 조사를 할 때 학생 수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밤늦게까지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실제로 밤 10시 전에 집에 들어갔기에 그 늦은 시간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얼추 계산해 보니 바로 옆 아파트만 천 세대에 가까웠다.
뒤쪽에도 팔백 세대였고, 인근의 작은 아파트 단지도 여러 곳이었다.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는데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특히 방송국 쪽에 입소문이 나면서 퀵 주문도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 밤늦은 시간, 야식으로 튀김과 떡볶이 오뎅 세트에 밥버거 주문까지 폭주했던 것이다.
어쨌든, 화끈한 형님들은 대박이 났다.
바로 옆 경성대 상권에서 넘어오는 대학생 숫자도 적지 않았고, 밤늦게 일 마치고 귀가하는 직장인도 간단히 때우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진짜 매출이… 미쳤구나.”
지난 구 일 동안 장사한 결과, 오픈발을 감안해도 믿기지 않는 수치였다.
일 매출이 천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특히 오픈 직후 사흘 동안은 천삼백 이상을 찍었다.
달로 계산하면 최소 이억에서 삼억 정도, 물론 그만큼 나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보자, 보증금에 인테리어, 그리고 인건비를 계산하면… 반년 안에 투자한 거 다 뽑겠네.”
이것도 최대한 늦게 잡은 거였다.
지금까지 장사해 본 경험으로, 오픈발 기준 70% 전후로 평균 매출이 정리가 되는 편이었으니까.
물론 그걸 오래 유지시키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하기는 했는데, 좀 더 조정을 하긴 해야겠네.”
현재 알바들이 삐꺽거리고 있었다.
거의 20명이 돌아가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점심 파트와 저녁 파트였다.
오전 10시 반에 첫 출근, 거의 밤 11시 반에 마친다. 이걸 반반씩 나눠서 7시간씩 교대로 하고 있었는데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형들의 피로도가 거의 한계였다.
거의 풀타임을 매달렸기에 당장 병원 예약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역시 사람 관리가 제일 큰 문제구나.”
결국 강형우는 대대적인 인원 점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