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205화 세상에 공짜 없어
“악!”
“끄억!”
“형님.”
“장군님.”
인정둥이 입에서 곡소리가 났다. 강형우가 진심(?)으로 등짝을 후드려 팼던 것이다.
“이 썅놈 새끼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와?”
“오늘 아침에 제대 했는데… 우리도 짐 정리해야죠.”
“맞아요. 놀다 온 것도 아니라고요.”
인정둥이가 변명하는데, 안 봐도 뻔했다.
이미 어머니 집에서 공지혜가 짐을 다 싸놨다.
입을 옷이며 소지품 같은 걸 다 챙겼고, 그걸 홍태구가 날라다 놨다. 거기에 강형우가 쓰던 그릇이나 냄비 같은 것도 고스란히 다 있었다.
한마디로, 할 게 없었다. 옷만 옷장에 넣으면 끝인 거다.
그걸 하는데 다섯 시간이나 잡아먹었으면, 욕도 같이 처먹어야겠지?
“내가 너희들 모르냐? 분명히 컴퓨터 확인한다고 게임 화면 켰다가 그대로 몇 시간을 보냈겠지.”
“헉.”
강인우가 뜨끔해하는데, 강정우가 눈알을 굴렸다.
“형, 집에 감시 카메라 달아놨어요?”
“미친놈아! 그 비싼 걸, 볼 것도 없는데 왜 달아!”
강형우가 버럭하자 인정둥이가 쪼그라들었다.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딱 한 판만 하려고 했는데요. 그게 참 마음대로…….”
“전 네 판째 끝나고 그만두자고 했습니다만, 인우가 멋대로 스타트를 누르는 바람에…….”
변명이라고 하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전화하면서 그렇게 빌고 빌더라.
둘이서 PC 한 대로는 부족하다고 형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기대한단다. 그런 어려운 말까지 써가며 사정하니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내 컴퓨터 하나 맞추는 김에,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성능을 하나 더 샀다.
그러면서 드는 걱정이 그거였다.
이 녀석들이 게임만 하면 어쩌지?
그럼 컴퓨터를 압수해야 하나?
그래도 군대까지 갔다 왔는데 알아서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앞으로 부려먹을 길이 구만 리 같았기에 선물 하나 해주자 싶었다.
그랬는데 첫날부터 이런 사고라니.
“미리 와서 정리하는 거 도왔으면 벌써 밥 먹으러 갔을 거 아냐. 그리고 여섯 시 전에는 올 줄 알았는데, 지금 시간이 몇 시냐?”
“그게…….”
“그리고 일 돕겠다는 놈들이 다 끝나고 나니, 이제 기어와?”
인정둥이가 고개를 팍 숙였다.
애초에 저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집에 짐 정리만 하고 내려온다고 했고, 나도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몇 시간 전에 전화하고 까먹었던 것이다.
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 거지 같은 군대에서 이 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속세의 향락이 주는 유혹을 이기기가 힘들었겠지.
하지만 최소한 가릴 건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오빠, 시간 늦었어요.”
“어, 알았어. 지혜는 먼저 씻고 옷 갈아입고 있어.”
“알았어요.”
공지혜가 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가는 사이, 강형우는 인정둥이를 끌고 서재로 들어갔다.
개인 짐이 대부분이 여기에 있었다. 살림살이는 놓고 왔지만, 그 외에 개인 소지품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하려고 놔둔 거였다.
“저게 책 박스거든. 여기 책장에 꽂아 놓고… 옷 박스 풀어서 대충 정리해 놔.”
“형! 다 끝났다면서요?”
“니들 인생만 끝내면 정말 끝난 거지. 그러니까 한 번만 헛소리 더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눈을 부릅뜨니 애들이 공손해졌다.
결국 두 녀석이 주섬주섬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형우도 서둘러 박스를 열었다.
박스에서 책을 꺼내는데, 그동안 공부하면서 끄적였던 연습장만 수십 권이었다. 여기에 지난 사 년간의 피와 땀, 노력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가장 최근의 연습장을 꺼냈다.
이건 인성식품의 기록이었다.
각 가게의 육수라든가, 밥버거집에 들어가는 제육볶음과 불고기의 대량 조리 레시피 같은 것들이었다.
또, 우리 통닭의 염지 방법에 앞으로 개량할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이걸 보는데 뭔가 뿌듯함 같은 게 느껴졌다.
이런 노력들이 지금의 날 만들었겠지.
잠시 그런 감상을 하며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이 간지러웠다.
휙 고개를 돌렸더니, 인정둥이가 일은 안 하고 컴퓨터만 보고 있더라.
“와, 부팅 대박. 10초도 안 걸려.”
“그러게. 이 모니터로 게임 하면 죽이겠는데?”
순간 울화가 치미니까 욕부터 나왔다.
“야 이 썅놈들아! 니들은 컴퓨터밖에 안 보냐? 게임에 환장했어? 진짜 죽어볼래?”
강형우가 버럭하는데, 또다시 공지혜가 살렸다.
시간 없다고, 빨리 나갈 준비 하잖다.
결국 강형우는 두 녀석을 내버려 두고 욕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마나님의 말이 곧 진리였으니까.
***
강영지를 제외하고, 간만에 식구가 다 모였다.
이제 지혜도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어머니 모시고 소박(?)하게 한우 갈비살을 구웠다.
인정둥이가 먹고 싶다고 어머니를 간곡히 조르는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제대 기념이라나 뭐라나?
당연히 계산은 내 지갑이 했다.
물론 나중에는 이것까지 다 계산해서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1차로 배를 채우고 나니, 어머니께서 피곤하시다고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이제 젊은 애들끼리 놀라면서.
결국 강형우는 인정둥이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시간도 어중간했고, 은근히 피로감까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탕수육을 시키고 기다리는 사이, 인정둥이가 집구경을 시켜달란다.
그렇게 안방과 작은 방을 보고 옥상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운 뒤, 다 같이 서재로 들어갔다.
그제야 강정우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더라.
“형, 집 산 거예요?”
“전세야, 전세.”
이미 어머니한테는 다 말을 했지만, 인정둥이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만데요?”
“좀 비싸.”
“그러니까 얼마냐고요?”
강정우가 나름 진지하게 물으니 가볍게 넘기기가 그랬다.
“왜?”
“저희도 돈 벌어서 이런 집 사야죠. 그러니까 대충 얼마 정도인지는 알아야 목표를 잡을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까, 네 녀석들. 은근슬쩍 나 내쫓았더라?”
“아니, 그게요. 사실…….”
강인우가 뭐라 말하려는데 강정우가 다급히 입을 막았다.
어라? 뭐가 있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 강정우가 변명했다.
“우리도 다 컸잖아요. 그리고 어머니 집에 지혜 누나 있는데, 들어가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건 인정.”
“어차피 형도 곧 결혼한다고 했고 해서…….”
“그래서 어머니한테 날 팔았다 이거지? 그리고 내 자취방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거짓말한 거고?”
강정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전 그게 맞다고 봤습니다.”
“그야 순서상, 정황상은 그게 맞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왜 내 일을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거야.”
이게 포인트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으니까.
“그게…….”
다시 강인우가 말하려는데, 강정우가 또 끼어들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미처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러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이젠 피곤해서 한소리 할 힘도 없었다.
“됐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이 집 반전세로 들어왔다.”
“반전세요?”
“보증금 일억 이천에 월세 사십.”
사실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이 하나 있었다. 금액이 조금 간당간당했는데, 공지혜가 통장을 내밀더라.
거기에 삼천오백이 들어 있었다.
대출받지 말자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 일단 이 돈을 쓰자고 했다. 그게 맞는 거라며 극구 우겨서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근데 형. 그 돈이면 저쪽에 빌라 하나 살 수 있지 않아요? 왜 반전세를…….”
“새끼들아! 집 사는 건 어머니 집이 먼저지. 내가 먼저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 아팠는데. 후우~”
지금 사는 집은 확실히 오래됐다.
집주인 아저씨가 간간히 수리를 하곤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2층 올라가는 좁은 계단도 그랬고, 구조도 애매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박혜숙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다.
지금 사는 데가 자기 집이라면서, 이사를 거부하셨다. 게다가 아직 자기 손으로 벌 수 있으니 신세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때 공지혜가 몰래 말하길, 집은 나중에 사잖다.
우리가 먼저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전세 쪽으로 알아보자고 했던 거다.
이후 이 집 구하고 공지혜가 같이 살자고 했음에도 무조건 싫단다.
신혼일 때 즐길 거 즐겨야지, 내 눈치 본다고 못 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러겠냐고.
하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울 어머니는 아니었다.
강형우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일단 돈 모으면 어머니 집 사는 거 먼저 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예, 형님.”
“그리고, 이런 집은 너희 둘이 사 년 꼬박 일해서 월급 합치면 얻을 수 있을 거야.”
잠시 강정우가 계산을 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월급이…… 그거밖에 안 돼요?”
“이 형님이, 언제는 월급 적게 주더냐?”
“그건 아는데, 계산이 좀 그렇잖아요. 인우랑 합쳐서 이백오십이라니…….”
“처음에는 그것도 안 줄 거야.”
“예?”
인정둥이가 눈을 크게 뜨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일단 깔 게 많잖아. 자취방 보증금이랑, 니들이 부탁해서 산 컴퓨터 가격에, 사고치고 수습한 돈도 한두 푼이 아니고. 그동안 공짜로 먹고 자고 지낸 거, 계산 다 해야지.”
“헐.”
“그럼 그게 다 공짜인 줄 알았냐?”
순간 강인우가 버럭했다.
“아니, 형님. 저희가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도와드렸는데 그렇게 야박한 말씀을 하십니까? 진짜 군대 가기 전에 그렇게 일시키고, 휴가 나올 때마다 뺑뺑이 돌리고…….”
“월급 다 줬다. 일당도 남들보다 배는 더 챙겨 줬고. 그리고 내가 니들 공짜로 부려먹은 건 아니잖아.”
인정둥이는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강형우는 이참에 고삐를 쥐어야겠다고 단단히 생각했다. 오늘 벌인 일을 보니 초장에 잡을 필요성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하여간 한눈만 팔면 딴짓을 하니, 확 붙들어야겠지.
“세상에 공짜 없어. 그만큼 무서운 사회라고. 솔직히 너희 둘, 지금 취직해서 얼마나 벌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공장 다니면 이백은 받을 수 있다던데요.”
강인우가 당당하게 말하는데, 웃음이 나왔다. 아직 현실을 잘 모르니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나중에 성구한테 물어봐라. 그렇게 받으려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그리고 공장 다닐 거면 나야 좋지. 기숙사 들어가면 컴퓨터도 자취방도 다 필요 없을 거 아냐?”
“예엑?”
“맞잖아. 그거다 내 돈인데. 너희 둘이 탱자탱자 놀 때, 이 형님이 뼈빠지게 벌어서 산 거잖아. 틀려?”
“맞습니다. 형님.”
역시나 강정우가 눈치가 빨랐다.
사실 협박거리는 더 있었는데, 이 정도만 하기로 했다. 첫날부터 너무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그래. 순순히 인정하면 쉽잖아. 당분간 일해서 갚는다고 생각하고, 생활비는 걱정하지 마라. 이 형님이 삼시 세 끼 다 먹여주고, 편하게 잘 수 있게 자취방도 내어줬고, 또…….”
인터넷 요금도, 전기세나 수도세, 가스요금도 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월세도 자동이체로 해놨으니 전혀 걱정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일만 하면 돼.”
“그럼 일요일은… 웁.”
강인우가 뭐라 하려는데, 강정우가 또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공지혜가 불렀다.
“오빠, 탕수육 세트 왔어요.”
“어, 금방 나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정둥이가 후다다닥 뛰어나갔다.
역시 이놈들은, 아직 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