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계약합시다
“위치가 정말 좋아!”
망미동 주민센터 근처의 어머니 집하고,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 뒤에는 얼마 전 부산다움 건축상 대상을 수상한 키스와이어 센터가 있었다. 고려제강 기념관이라고 미리 예약만 하면 무료로 구경도 가능했던 것이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마을버스 정거장까지 5분, 수영강변 버스 정거장도 5분 거리였다.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아래쪽으로 10분만 가면 수영경찰서 예정 부지가 있었다. 향후 오 년 내로 이쪽으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사적공원과 수영팔도시장도 걸어서 15분 걸렸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일대가 정말 조용한 주택지라는 점이었다.
크게 높은 건물들이 없고 대부분 단독주택들이라 채광이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거의 정남향이라 오히려 암막커튼이 필요할 정도였던 것이다.
지하철 망미역도 걸어서 10여 분 거리니 진짜 조용히 살기 좋았다.
무엇보다.
“여긴 재개발할 이유도 없으니, 한 십 년은 그대로 살아도 될걸?”
부동산 삼촌이 웃으면서 말한 뒤,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춰서 속삭였다.
“이 동네 안쪽으로는 큰 아파트 못 들어와. 높은 건물도 허가도 안 나고.”
“왜요?”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 근처 단독주택 중에서 큰 집들이 제법 있거든.”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전직 국회의원이 몇 명, 대기업 회장도 몇 명이 있단다. 직접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과 관련된 집들이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맞다.
그들이 압력을 넣어서 못 하게 한단다. 동네 시끄러워지는 것도 싫고, 행여 누군가가 자기 집안을 볼 수도 있어서 높은 건물을 꺼려한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요?”
“물론 뜬소문이긴 하겠지. 이 동네가 부촌도 아니고, 집값도 저렴한 편이니까. 그래도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더라고. 멀쩡히 잘 있는 경찰서가 미쳤다고 이쪽으로 오겠냐 이거지.”
생각해 보니 조금 희한하기는 했다.
어머니 집 앞의 주민센터가 크게 재건축을 한다고 들었다.
부산 유일의 코스트코가 바로 뒤였고, 이 일대 자잘한 재공사가 줄지어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하철 가는 길에는 망리단길이라고 하는 게 생기면서 이쁘고 작은 음식점과 가게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런 현상들은, 이 동네의 저렴한 집값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회장설은 너무한 것 같았다.
그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왜 이런 데서 살겠는가?
“어쨌든, 집주인이 자기 식구들 올 때까지는 살아도 된다고 했어. 굳이 재계약 안 해도 그때까지는 쭉 지내라고 하더라고.”
“확실히 그건 좋네요.”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다 치면 최소 4년이란다. 적어도 그동안은 이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주인은 이미 보증금 이천에 월세 삼십 짜리 투룸으로 이사를 갔다. 한쪽 방을 창고처럼 짐들을 밀어 넣고, 방 하나를 혼자 편하게 쓴다나?
덕분에 이 집이 나왔다.
방 세 칸짜리 올 수리 된 단층주택!
게다가 완전 풀옵션이었다.
새로 구입한 냉장고에 2in1 에어컨, 세탁기도 최신형이었고 안방의 붙박이장도 신식이었다. 벽 한 면 전체가 미닫이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옥상에 평상도 있어서 고기 구워 먹기도 좋았고, 빨래 널면 삼십 분도 안 돼서 다 마를 것 같았다.
여기에 작은 마당까지 있으니 완전히 전원주택 느낌이었다.
그런 걸 보면, 집주인이 가족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더라. 얼마나 이쁘고 꼼꼼하게 공사를 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살림 적은 신혼부부가 들어오길 원하는 거지. 가능하면 흠집 안 내고 깔끔하게 지내는 사람들로 부탁하더라고.”
매물로 나온 건 거의 일주일 전.
부동산 삼촌이 펼쳐놓은 레이더망에 마침 이 집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집주인에게 연락해 사정을 들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서로 조건이 딱 맞는다고 했다.
종일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는 신혼부부!
일요일 제외하면 평일에는 거의 잠만 자고 나가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가격도 조금 저렴하게 조정할 수 있었단다.
“확실히 괜찮기는 하네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같은 평수 아파트 시세가 이억 후반인데, 거의 신축이나 다름없으니까.”
전세가 일억 팔천이었다.
이걸 일억 이천에 월세 40만 원 받는 정도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한테 받는 돈으로 투룸 월세와 관리비를 낼 계획이란다.
“문제는 금액이긴 한데…….”
“그 정도면 대출 좀 받아도 돼. 원래 팔천 정도로 잡았잖아.”
“그게… 지혜가 대출만은 안 된다고 해서요.”
“요즘 전세도 거의 다 대출이야. 거 뭐냐, 신혼부부 대출인가 하면 이자도 얼마 안 된다고. 그리고 월세 내나, 은행 이자 내나 별 차이도 없어.”
이미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부동산 삼촌한테 이야기 듣고 나서 계산도 새로 뽑아봤고.
일단 가전제품이 다 있으니 살 필요가 없었다. 그 돈을 보태고 조금 무리하면, 대출 없이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저는 좋은데 지혜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형우야.”
“예?”
“너 바보냐? 저렇게 좋아하는데 안 된다고 할 리가 없잖아.”
“헐.”
고개 돌려보니 진짜로 공지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옥상 보고 온다고 올라갔던 것 같은데, 언제 내려온 건지 모르겠네.
“오빠, 저기 안쪽 방은 오빠 전용 방!”
“어?”
“사업하는 사람인데, 서재 정도는 있어야죠. 컴퓨터도 갔다 놔야 할 거고. 또…….”
이야기를 들어보니, 왜 두 칸 이상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나만의 전용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란다.
갑자기 공지혜가 훨씬 더 이뻐 보였다. 게다가 이 집을 둘러보는 동안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것 같았다.
안방과 거실은 그대로 쓰기로 하고,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창고 비슷하게 쓰잖다. 또, 주방 옆의 다용도실은 식재를 보관하고, 바로 옥상으로 나갈 수 있다면서 무척 좋아하더라.
그런 표정을 보니 어찌 안 된다고 하겠는가?
“삼촌, 바로 계약서 쓰죠?”
“그러지. 그런데 입금은 어떻게 할래? 봐서 나눠줄 수도 있기는 한데?”
부동산 삼촌이 몇 가지를 설명해 줬는데, 굳이 어렵게 갈 건 없겠다 싶었다.
다행히 등기부등본상의 대출은 오천만 원 정도였다.
리모델링한다고 들어간 돈이라는데, 시세를 생각하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고 봤다.
해서 이틀에 나눠서 오천만 원씩 입금하고, 바로 이사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남은 잔금은 그때 주기로 했고.
“그럼 내일 집주인하고 약속 잡아놓을 테니까. 부동산으로 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들어오는 건 언제 가능하죠?”
“집이 비어 있는데 바로 들어와도 되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런 잡다한 건 부동산 삼촌이 다 알아서 해주겠단다.
그러면서 돈만 준비하라는 것이다.
***
“안녕하십니까?”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오는 남자가 집주인 같았다.
이름이 정인규라고 했다.
그런데, 마흔 중반이 아니라 오십은 훌쩍 넘어 보였다. 거기에 먹는 게 부실한지 비쩍 말라 있었는데, 음주를 즐기시는지 아랫배만 불룩 튀어나왔었다.
생각해 보니 저런 체력으로 그 큰집을 유지하는 건, 확실히 어려울 것 같았다. 자주 청소하고 관리 안 해주면 금방 낡아지는 게 일반주택이니까.
그래도 씨익 웃는데 인상은 아주 좋아 보였다.
매물 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뚝딱 해결됐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겠지?
어쨌든 일정은 이렇게 잡았다.
화요일까지 전세금 입금하면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겠단다.
강형우는 수요일날 청소하고 저녁에 이사를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짐도 별로 없었기에 금방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다음 집들이 겸, 인정둥이 제대 파티를 할 생각이었다.
가만히 듣던 정인규가 물었다.
“일정이 빠르군요.”
“예.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집을 못 구했다면, 인정둥이랑 당분간 지낼 생각이었다.
이미 휴가 나올 때마다 그렇게 했기에 어색한 것도 없었고, 야반도주(?)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집을 구했으니 대책을 세워야겠지?
“그런데, 음식점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작은 분식집을 운영 중입니다. 언제 한 번 오시면 식사 대접해 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집주인 찾아가 봐야 서로 불편하기만 하지 뭐가 좋다고.”
정인규는 그러면서 도장을 힘주어 꾸욱 찍었다.
부동산 삼촌이 양쪽의 서류를 확인하는 사이, 정인규가 조용히 당부하더라.
“단독주택이라서 손이 많이 갈 겁니다. 혹시나 문제 있으시면 바로 전화 주시고요. 여기는 제 지인이 하는 사무실인데 여기서 공사를 했거든요.”
내민 건 두 장의 명함이었다.
하나는 정인규 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무슨 무역 회사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건축 사무실 명함이었는데 위치가 망미역 근처였다.
아무래도 살다가 하자를 발견하면 연락하라는 것 같았다.
강형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얼마 전 새로 맞춘 명함을 꺼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지성분식이라고, 광안동하고 남천동에 있습니다. 그리고 배산역 쪽에도 이모들 식당이라고 운영하고 있고요.”
“아! 젊은 총각이… 생각보다 많이 하시네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강형우가 멋쩍게 웃는데, 정인규의 눈빛이 달라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좀 물어봐도 됩니까?”
“예. 말씀하세요.”
“그게… 식당 차리면 벌이는 좀 되나요?”
너무 범위가 넓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부동산 삼촌이 끼어들었다.
“허허, 잘 벌죠. 다른 데는 몰라도 이 친구가 무척 성실하고 착해서 손님들 많이 옵니다. 점심때는 몇십 분씩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해요.”
“그래요?”
“예. 잔금 같은 거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요. 이 친구 바닥부터 올라갔는데, 벌써 가게 세 개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공장 사무실도 있고요.”
갑자기 막 칭찬을 하는데, 이상하게 관절이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민망하고 부끄럽다고나 할까?
“한 달에 수천 벌어요. 지금 이것저것 사업 한다고 벌인 게 많아서 그런 거지. 몇 달만 지나면 원래 전세금 다 맞출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부동산 삼촌이 왜 그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전세금을 육천이나 깎고 일부를 월세로 돌렸다. 그 협의 과정에서 정인규가 몇 번이나 우려를 했다고 미리 일러주었던 것이다.
“허허, 젊으신 분이 성공하셨네요.”
“아닙니다. 아직은 소소한 수준입니다.”
강형우는 일부러 고개를 더 숙였다. 괜히 건방져 보일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요. 험험, 친구가 식당을 하나 차려보겠다고 하는데… 전망이 어떤가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요즘 불경기라고 하던데.”
“그게 정답이 없습니다. 열심히 하는 만큼 벌어가는 게 자영업이거든요.”
“그건… 그렇죠.”
“먼저 근처 식당 일부터 해보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체력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강형우의 대답이 뜬금없다고 느꼈던 것일까?
잠시 뚱한 표정을 짓던 정인규는 확인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
“체력이요?”
“예. 음식 장사가 보기보다 엄청 힘들거든요. 제가 보통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준비하는데요.”
최대한 간단하게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그게 쉽게 안 되더라.
어쨌든 모든 일 다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 거의 열한 시라고 했다.
그런 설명에 정인규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하는 걸 주 6일, 일 년 내내 반복합니다. 쉬는 날은 설하고 추석 정도고요. 여름휴가나 겨울 비수기 때, 직원들하고 이야기해서 며칠 쉬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공휴일도 일합니까?”
“당연하죠. 음식 장사는 꾸준함이 생명이니까요.”
강형우가 웃으면서 말하는데, 오히려 정인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걸 보니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