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화 천천히 가도 돼요
헐!
망할 놈의 인정둥이 같으니라고.
아니, 나도 모르게 언제 저런 수작을 벌였다는 말인가?
솔직히 미리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이렇게 황당하진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녀석들이 눈독 들인다는 낌새는 있기는 있었다.
사실, 강석이네 이 층 자취방은 강형우가 처음 살 때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 년 넘게 살다가, 전기세(?) 사건이 터진 후, 에이~ 돈 좀 쓰자 하면서 무지막지하게 업그레이드해 버렸다.
팬티 곰팡이 때문에 공지혜가 오래된 장롱을 버리고 깔끔한 행거를 설치해 줬다. 환기가 잘되면 그런 일 없다면서 빨래 꿍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에어컨을 달았다.
원래 산동네는 앞뒤로 창문만 열면 바람이 잘 분다.
맞바람이 무시무시하게 불어서 오히려 초가을 새벽에는 춥기까지 할 정도였다.
때문에 에어컨이 없어도 들어가서 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지난 여름 폭염 때문에 지성분식 에어컨을 가져와서 설치했다.
오래된 털털이였지만 업소용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정용이 10분이라면, 얘는 2분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 공장 기숙사 살다가, 원룸에서 둘이 살다가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경우라 정말 좋았다. 게다가 옥상에 마당까지 있는 그런 집이라 진정한 독립이라 느껴졌었다.
운동하기도 좋고,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피울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선선한 가을에는 강석이랑 창호 불러서 삼겹살도 구워 먹었고, 술 마시다가 평상에서 그대로 자기도 했었다.
물론 새벽 모기들이 잠을 깨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평화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또, 공지혜랑 사귀기로 한 뒤 침대 매트리스도 빵빵한 걸로 바꿨다.
특히 인정둥이가 눈독을 들인 건 따로 있었다.
거금을 들여 장만한 내 컴퓨터였다.
덜덜거리던 애물단지가 사망한 뒤로 큰마음 먹고 질렀는데 아직도 PC방 현역으로 뛰어도 좋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시원시원한 모니터에 태구가 권해준 기계식 키보드, 또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게이밍 마우스와 우렁찬 스피커까지, 거의 최고 사양이었던 거다.
보증금에 기타 자취방에 들어간 금액은 따지면 몇백이었다.
인정둥이는 그걸 날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딜 감히!
“그런데, 진짜 애들이 그랬다고요?”
“어. 왜 못 들었어?”
“아니 그게…….”
뭐라 말하려는데 어머니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난 것처럼 태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잘됐다 싶더라. 지혜랑 그 집에서 살 건 아니잖니?”
“그야 그렇죠.”
신혼집을 야산 옥탑방에서 시작한다면 돌 맞아 죽을 거다.
공지혜야 괜찮다고 하겠지.
하지만, 어머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영지가 안다면 칼부림 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집 얻으라고 돈까지 내준 상황이었고, 못 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너랑 지혜가 집 얻어서 나가면, 둥이들 거기서 살게 하면 되잖아.”
“그야 그렇기는 하죠.”
“왜? 안 돼?”
“아닙니다. 어마마마, 당연히 됩니다. 돼요.”
강형우가 억지로 웃으면서 말하자, 박혜숙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걔들도 다 컸으니 독립해야지.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애들 밥 챙겨주고 해야 하니?”
“맞습니다.”
군대 갔으니 빨래랑 청소 정도는 기본이었다. 게다가 내 밑에서 배웠으니 음식 만드는 거나 설거지 정도도 능숙하게 하겠지.
하지만 이 집에 들어오면?
아마도 천하의 게으름뱅이가 될지도 몰랐다. 어머니 박혜숙의 성격을 생각하면 잔소리하기보다 일일이 챙겨줄 가능성이 더 컸던 것이다.
때문에 강형우는 박혜숙의 결정을 적극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은 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것.
동시에 다른 게 걱정되었다.
“그런데, 어마마마. 혼자 계시면 적적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나야 하루 종일 가게에 있으니까. 그리고 지혜 나가고 심심하면 현숙이 놀러오라고 하면 되고.”
바로 근처에 사는 친한 동생이었다. 전에 듣기로 현숙 이모도 딸하고 둘이 살았는데, 지금은 혼자였다. 취직 때문에 딸이 서울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집도 가깝고 하니 놀다 가든가, 자고 가든가 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타박을 주더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지혜 데리고 나가서 살 궁리나 해. 이것아.”
“옙.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형우는 잽싸게 대답했지만, 조금 미심쩍은 것도 있었다.
왠지, 애물단지 내치우는 느낌이랄까?
솔직히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
설 연휴 내내 인사드리러 다녔다.
중간에 잠깐 병원을 다녀왔고, 유리 형수도 만났다.
아직도 주혁이 형은 차도가 없다고 했다. 수술도 잘됐고 부러진 뼈도 회복되고 있다는데 여전히 정신만은 돌아오질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많이 무리하기는 했거든요.”
“예?”
“우리 오빠는 처음 만났을 때, 동생 집에 얹혀살고 있었어요.”
군대 제대한 직후 돈이 없어서 친구 동생 집에 더부살이를 했었다. 그러다 황룡 본점 건물 옥상에 있는 형수 자취방으로 이사했단다.
“그때부터 무슨 한이 맺힌 건지 몰라도, 십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리더라고요. 사람이 쉴 때는 쉬고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부족한 사람처럼 일했거든요.”
유리 형수의 입에서, 강형우가 몰랐던 과거들이 속속들이 나왔다.
망해가는 PC방을 성공시켜 인정을 받았다. 창업 공신인 이사를 설득시켜 초창기 자본을 투자하게 한 것이다.
그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퓨전 중식 황룡이었다.
주혁 형은 그 가게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일했고, 어떨 때는 일주일에 고작 열 시간도 안 잤단다.
낮에는 중식집, 야간에는 중식주점을 운영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터졌다.
황룡 2호점, 3호점을 오픈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가맹점들이 늘어났고, 여기에 PC방 프랜차이즈와 퓨전포차가 합류했다는 것이다.
그게 두루 컴퍼니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후 6년을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희망국수를 만들었다.
삶은 면과 육수를 주면 끝이었다. 테이블에 각종 고명과 비빔장까지 놔두어서 손님이 알아서 만들어먹는 방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박 행진을 거듭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격은 얼마 전에 올랐는데도 고작 3,500원이었다.
면만 주문하면 이 금액으로 물국수, 비빔국수도 가능했고 밥까지 추가해 국밥이나 비빔밥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각 가게마다의 특성도 인정해 주었다.
기존의 프랜차이즈는 본사의 수익을 우선해 메뉴에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주혁이 형은 달랐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말자.
기준만 지키면 뭐든지 해도 된다.
때문에 황룡의 경우, 영업시간도 자유에 메뉴 추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물론 본사에서 확인하는 과정은 필수였지만 대체로 기본만 지키면 운영에 크게 관여하질 않았던 것이다.
일례로, 거제도에 있는 황룡에서는 충무김밥도 팔았다.
관광지 바가지 스타일이 아닌, 가성비 우선의 메뉴로 개량한 거다.
기장에 있는 황룡은 미역짬뽕을 팔았고, 공주의 황룡은 뻥튀기로 튀긴 밤을 넣은 중화볶음밥이 있었다.
또, 속초에는 젓갈과 함께 먹는 짜장밥이 유명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대부분 특산품에 맞추어 메뉴 개발을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본사도 먹고 살지만, 점주도 먹고 살라는 거였다. 프랜차이즈의 수익은 줄었지만 반대로 각각의 가게들 수명은 늘어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 주혁 형이 개입했다.
같이 메뉴를 고민하고, 특산품을 가져와 연구했으며, 직접 만들어서 편하게 팔 수 있게 개량했단다.
지금은 직원들을 시키지만 항상 마지막에 확인하는 건 본인이었다. 한 달에 절반 가까이를 출장으로 보내는 게 그래서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이 맞는가 싶더라.
“사람이 쉴 때는 쉬고 그래야 되는데, 오빠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늘이 쉬라고 한 거예요. 지금도 지난 십 년치를 몰아서 쉬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
“형우 씨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돈도 돈이고 사람도 사람이지만, 다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예. 맞습니다.”
강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 형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은… 조금 늦게 가도 괜찮아요.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서 박혔다.
***
“아오, 놀고 싶다!”
그런 마음과는 달리 일요일인 오늘, 인성식품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식품 회사의 특성상 영업일 전에 납품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이번 설 연휴는 주말 포함 무려 5일이었다.
때문에 미안하게도 김민석과 누님 세 분에게 출근을 부탁했었다.
대신 저번 주는 여유 있게 일했다.
월요일 식자재를 받고 만들어놓은 걸 납품하는 것만 하고 마쳤다. 그리고 화요일은 김민석과 차인철만 출근, 휴일을 하루 앞당겨서 줬던 것이다.
어쨌든 공지혜와 함께 출근해서 이번 주 장사할 걸 미리 만들기로 했다.
우리 통닭의 치킨 이백 마리를 염지하고, 화끈 오뎅과 태성반점의 육수를 만들었다.
다행히 형님네 버거는 일이 좀 적어 오전에 전부 끝낼 수 있었다.
오후에는 지성분식 돈가스와 육수를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마치고 시계를 보니 거의 4시였다.
해서 강형우는 간단한 회식을 제안해 인성식품 식구들을 푸짐하게 먹인 뒤, 해산했다.
이후 공지혜와 함께 온천천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아파트는 싫다고?”
“예. 좀 그래요.”
“이상하네. 보통은 다 아파트를 선호한다던데…….”
강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연휴 때 PC 가지고 검색을 해봤다.
일단 지성분식 1, 2, 3호점을 생각해 인근의 아파트를 알아봤다.
신축이 2억 후반대, 10년 정도 된 아파트들이 2억 언저리였다. 좀 더 오래된 아파트들은 1억 중후반 대인데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 한단다.
전세가는 집값의 70% 선.
현재 여윳돈이 일억 이천 정도였으니 약간의 대출을 끼면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해서 공지혜의 의견을 물어봤는데, 계속 아파트가 불편하단다.
“그럼 빌라나 주택이 좋을까?”
“기왕이면 독채거나, 한 층에 여러 세대 안 사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
다시 강형우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혹시나 해서 근처 빌라 시세도 알아봤고, 신혼부부한테 좋다는 신축 투룸이나 비슷한 집들도 확인을 했었다.
신축 원룸 올 전세가 사천에서 육천 선, 투룸은 팔천에서 일억까지도 했다.
빌라는 거의 30% 정도 비쌌다.
위치 좋고 넓은 곳은 거의 이억 가까이 했으며 조금 빠지면 일억 정도로도 가능했다.
강형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 공지혜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따로 생각한 게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공지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우리 당분간은 둘이서만 살거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
은주 형수의 일도 있고 해서, 넌지시 공지혜에게 물었었다.
피임을 하잖다.
아직 오빠 일도 바쁘고 정리도 안 됐는데, 나까지 빠지게 되면 너무 무리가 간다. 그렇다고 일을 쉴 사람이 아니니 당분간은 조심조심하지는 것이다.
날 생각해 주는 게 고마워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공지혜의 나이도 걸렸다.
이제 스물넷이고, 강형우가 실수(?)하면 스물다섯에 애 엄마가 된다. 육아가 여성 경력 단절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걸 감안하면 당연히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사실, 오빠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그것도 내 욕심 같더라고요.”
“뭐?”
몇 번이나 곱씹었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가 않았다.
그때 공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