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막걸리는 좀 하는가
“어. 들어… 가자.”
강형우는 일단 심호흡을 했다.
전에 신원이 형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라.
우황청심환을 두 알이나 먹었는데 처갓집 입구에서 토할 뻔했단다. 그만큼 긴장되고 떨렸다는 것이다.
마치 지옥문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나?
설마 그렇게 느껴질까 싶었는데, 떨리는 건 사실이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말이다.
“오빠? 떨어요?”
“엉? 아니, 아닌데?”
“근데 손에 땀이…….”
“헉.”
화들짝 놀라서 보니 진짜 손에 땀이 흥건했다. 다행히 손수건이 있어서 닦고, 미닫이문 유리를 보며 머리와 옷을 다시 살피는데…….
드르르륵.
갑자기 미닫이 새시 문이 열렸다.
“뭐 하니? 왔으면 바로 들어오지 않고.”
화들짝 놀란 강형우는 곧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솔직히 민망했다. 거울 보듯 머리를 만지는데 갑자기 지혜 어머니께서 나오신 것이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그 뒤에 아버님이 보였는데, 순간 사람을 착각한 줄 알았다.
마지막에 봤을 때가 병실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져서 입원해 있을 때였는데,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에 살이 올라 있었고 환하게 웃는데 인상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생활하니 건강이 많이 회복되신 모양이었다.
“어여, 들어와.”
“알았어요.”
공지혜가 잡아끄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가판대를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는데 묘한 시골 냄새가 났다.
오랜 만에 맡아보는 흙 내음 같은 거였다.
강형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십시… 욱.”
공지혜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오빠는, 새삼스럽게.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꼭 절부터 하라고 들었다.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 먹을 거면, 하고 욕먹는 게 훨씬 낫다나?
하지만 여기서는 지혜 말을 들어야겠지?
그렇게 고민하는데, 아버님께서 호쾌하게 말하셨다.
“그래. 나도 예비 사위 절 한 번 받아보자.”
그러면서 양반다리로 자세를 잡으시더라.
멍석까지 깔아주셨는데, 안 하면 이상하겠지?
강형우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크게 절을 했다.
“아버님, 어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조심스럽게 일어선 강형우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공지혜가 옆에 앉더라.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지은 죄도 없는데, 벌받는 기분이랄까.
강형우가 그렇게 앉아 있는데, 아버님은 말없이 웃기만 하셨다.
그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형우야, 편하게 앉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그 덩치로 그렇게 있으면 금방 다리에 쥐가 나요.”
어머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시는데,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 많이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강형우가 자세를 고쳐서 앉는데. 어머, 하필 그 타이밍에 엉뚱한 소리가 들렸다.
삐이이익.
바로 압력솥에서 증기가 빠지는 소리였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한 뒤, 서둘러 주방으로 나가셨다.
그때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저녁 다 돼서 올 줄 알았더니.”
강형우도 시간 많이 걸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오늘 아버님 어머님 뵐 거라고 공지혜랑 같이 자취방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탕 갔다가 이발도 하고 정장까지 갖춰 입었다.
그런 다음에나 출발했는데, 황당하게도 여기를 거쳐 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동래에서 환승하니 거의 한 시간이 안 걸렸던 것이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버스 타고 간다고 서너 시간 걸릴 줄 알았는데, 시골이라고 해서 한참을 더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이었다.
게다가 차가 하나도 안 막히는 바람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줄 알았다.
덕분에 아직 해가 환한 이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때 아버님이 황당한 제안을 하셨다.
“자네, 막걸리는 좀 마시는가?”
***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 줄 아는가?”
“예?”
“허허, 그 유명한 공자 집안의 78대손, 공영범이 바로 나라네. 지혜랑 배우 공유가 같은 항렬이지.”
이거 진짜인가 싶었는데, 아버님이 웃는 걸 보니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 받게나.”
“예.”
아버님이 막걸리를 따라주자 강형우는 공손하게 받았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
공지혜가 그랬다.
설에 자기 집에 가잔다. 부모님 뵙고 인사만 하면 된다면서 미리미리 얼굴 비춰놓는 게 좋다는 것이다.
당시 같이 살자고 해놓은 터라,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어릴 때, 어머님은 자주 봤었다.
영지가 지혜 집에 자주 놀러를 갔었다. 그런데 으레 애들이 그렇듯, 시간 가는 걸 모르고 놀아서 여러 번 데리러 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 밥도 자주 얻어먹고 같이 놀기도 했었다.
그때는 이런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아버님 어머님을 뵙는 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옛말이 이런 말도 있지 않았던가?
사위는 딸 도둑이라고.
“우리 딸이 어릴 때 정말 이뻤는데 말이야. 지금도 물론 이쁘기는 하지. 그래서 남편감으로 아주 잘생긴 놈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 어디서 이런 산도적 같은 놈을 데려오다니.”
“예?”
“허허, 그냥 하는… 마음의 소리라네. 마음의 소리.”
강형우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공영범은 그저 웃으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환상을 본 모양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헛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참 인연이란 게 묘하단 말이지. 남자 친구 생겼다고 했을 때는 좀 그랬는데, 그게 자네라고 하니 안심이 되더라고.”
“예?”
“어릴 때, 우리 집 자주 왔잖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아! 그랬었죠.”
“그때부터 동생 잘 챙기는 거 보니까 괜찮다 싶어 했거든. 지혜가 자네 이야기도 많이 했고…….”
“아이고, 아빠. 별소리를 다해요. 진짜!”
공지혜가 득달같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하지만 공영범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왜, 예비 사위랑 이런저런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
“도장 찍기 전에는 아직 모르거든요. 뭐, 벌써 사위래.”
공지혜가 툭탁거리는데, 살짝 서운할 뻔했다. 웃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면서 테이블에 노릇노릇하게 지진 파전을 올렸다.
“이거 급하게 한 거예요. 엄마가 백숙 뜸만 들이면 끝난다니까 많이 마시지 마세요.”
“허허, 알았다니까 그래.”
“오빠도요.”
“어, 어. 알았어.”
그렇게 공지혜가 사라지자 다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두 사람은 잔을 치고 막걸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공영범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버님, 물어보실 거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허허, 그게… 딱히 궁금한 건 별루 없어서 말이야.”
“예?”
“지혜가 집에 자주 오잖아. 벌써 자네 이야기 다 했다네.”
이건 정말 몰랐던 거였다. 그래서 당황해하는데, 아버님이 말을 이어가셨다.
거의 2년을 지겹게 들었단다. 아니, 고등학교 때부터 이야기했으니 햇수로만 벌써 8년이나 됐다는 것이다.
순간 홍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혜 첫사랑이 나라고 했던가?
“사실 나도 긴장을 좀 하긴 했어. 그런데 막상 자네를 보니까, 그냥 올 게 왔구나 하는 기분이라네.”
“아. 그러시군요.”
갑자기 공영범이 속닥거리듯 말했다.
“사실, 요즘은 말도 함부로 못 해.”
“예?”
“사업도 망했지. 내가 장사도 잘 못해. 그래서 맨날 구박받는 처지라네. 역시 남자는 돈 있고 힘 있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야.”
“아~ 예.”
“그래도 지혜가 우리 와이프 닮아서, 일 하나는 억척스럽게 잘하지. 아마 자네 굶길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서 뜬금없이 슈퍼 이야기를 하셨다.
사기당한 충격 때문에 뇌출혈이 생겼다. 수술 하고 퇴원해 보니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시골로 내려온 게 그래서란다.
집 팔고 이것저것 정리하니, 딱 여기 살 돈만 남았단다. 그래도 다행인 게 이 시골 마을에 슈퍼는 여기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딱히 큰돈 벌리는 건 아닌데, 먹고살 만은 해. 그런데 와이프가 욕심을 부리더라고.”
반찬도 팔고, 예약받아서 백숙이나 수육도 삶아주고, 공장에 행사 있으면 음식도 배달하고, 가끔 퇴근하는 아저씨들이 들러서 술도 한잔할 수 있게 한 게, 그래서란다.
“우리야 이렇게 살면 되는데, 지혜 시집은 보내야 한다면서 자꾸 일을 벌이더라고. 허허허.”
가게가 특이하게 바뀐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확실히 이런 퓨전(?) 슈퍼는 외가가 있는 시골에서도 보지 못했다. 대체 파는 게 몇 종류나 되는지 세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아버님 결론은 이거였다.
사업 망해도, 지혜가 먹여 살릴 거란다. 하지만 실패해서 자기처럼 잡혀 살지는 말라는 것이다.
확실히 인생 선배의 조언은 뼈에 새길 만했다.
술 마시고 들어가도 안 혼나는 법이라든가, 몰래 비상금 만드는 방법 같은 걸 전수받았다.
또, 기분 풀어주려면 무조건 맛있는 집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된단다.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음식이 나오면, 수저 들기 전에 빌라고 했다.
그럼 백 프로 용서받을 수 있다나?
그렇게 예비 장인과 사위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데, 공지혜가 기습했다.
“오빠! 백숙 다 됐어요.”
정말이지 간만에 과식하고 말았다.
어머님께서 왜 백숙을 파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맛이 일품이었던 것이다.
친구분이 양산 내원사 계곡에서 백숙집을 하는데, 거기까지 가서 특별히 받아온 놈이라고 했다. 거의 산을 날아다니는 토종닭이라는 것이다.
진짜 세상에서 이렇게 큰 닭다리는 처음 봤다.
거의 강형우 팔뚝만 했던 거다.
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혜가 좋아하는 소갈비찜에다가 잡채, 삼색전에 된장찌개까지 있었다. 여기에 직접 무친 나물까지 한 상 가득 차려지니 무려 네 공기나 먹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님과 소주 한 잔을 걸치니, 정말 잠이 잘 오더라.
어쨌든, 운이 좋게도 위험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다 공지혜 덕분이었다.
물론 이것도 아버님의 가르침이었다.
***
“잘 다녀왔어?”
박혜숙은 환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시골에 지혜네 집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더니, 무척 궁금했나 보다.
“예. 인사 잘 하고 왔습니다.”
“그게 다야?”
“아니, 뭐 그냥. 밥 잘 얻어먹고 온 게 전부죠.”
강형우가 더듬더듬 말하는데, 박혜숙이 공지혜를 쳐다봤다.
“별일은 없었고?”
“헤헤, 그냥 인사 갔다 온 건데요.”
그 대답에 박혜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또 왜요?”
강형우가 투덜거리는데, 박혜숙이 푹 하고 찍어버렸다.
“날 잡자고 안 해?”
“컥.”
입에서 연거푸 기침이 나오는데, 공지혜는 모른 척 딴청을 부리더라. 게다가 몰래 빠져나가기 스킬까지 펼친 것이다.
“어머니, 저 짐 좀 정리할게요.”
그렇게 슬그머니 사라지자, 강형우는 사격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독박을 쓰게 된 것이다.
“너는 방으로 가자.”
박혜숙이 바닥에 앉자 강형우는 바로 맞은편에 잽싸게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날 잡고. 빨리 집 구해서 이사 가고 그래.”
“아~ 예.”
“어차피 다음 달이면 살던 집에서도 나와야 하잖아.”
“앵? 그게 무슨…….”
그때, 박혜숙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둥이들이 그러던데? 제대하면 거기서 살기로 했다고?”